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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93화 (9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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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처럼 세레나를 쫓아나간 루이자가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루이자는 한 주임의 방에 들어와 조용히 문을 닫고 그대로 다릿심이 풀린 듯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저를 말려 죽이실 작정이신가 보죠?”

“죄송해요…. 화가 나서 그만….”

무안해진 한 주임이 미엘라와 함께 그녀를 붙잡고 부축해서 소파에 앉히는데, 이번에는 쾅쾅거리는 노크 소리가 방 안에 크게 울렸다.

“악! 없던 애가 다 떨어질 뻔했잖아요, 단장님!”

문밖에 서 있던 포라킨을 안으로 들이며 미엘라가 펄쩍 뛰었다.

포라킨은 잠시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다가 소파에 늘어져 있는 루이자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바른 몸가짐을 유지하는 집사장이 왜 한 주임의 방에서 저러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의아해서 다가가던 그녀는 루이자의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발견하고 곧바로 인상부터 찌푸렸다.

“설마, 공주님 짓입니까?”

면목이 없어 보이는 루이자를 대신해서 한 주임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포라킨은 그녀의 처참한 얼굴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회복마법을 가동했다.

“5년 사이에 세레나 공주님이 좀 변하신 것 같네요.”

“변하다뇨! 벌써 잊으신 거예요? 악마가 다시 돌아왔다고요!”

대번에 푸르죽죽한 낯으로 경기를 일으키는 미엘라를 보며 한 주임은 속으로 격하게 동감했다.

아무리 신분이 다르다지만 어머니뻘과 다름없는 분에게 손찌검이라니, 한 주임으로선 세상이 거꾸로 뒤집힐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루이자는 포라킨의 말을 곰곰이 곱씹다가 동의를 표했다.

“헤르미네 양의 말이 맞습니다. 예전에는 사람을 시켜 체벌했지, 공주님이 직접 손을 올리진 않으셨어요.”

“더군다나 ‘제국’의 귀족을 말이죠.”

포라킨은 ‘제국’을 힘주어 강조했다.

아무리 왕녀라지만 델피온은 레비탄 제국에게 있어 변방의 가난한 약소국에 불과한 곳이었다.

세레나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녀가 직접적으로 횡포를 부리는 대상은 자연히 평민이나 동향인에 한했다. 이방인 역시 마뜩잖아 한 것은 예전과 같았으나, 오늘처럼 대놓고 모욕을 주는 일은 없었다.

왕녀의 태도가 노골적으로 변한 이유는 추측건대 단 하나.

“……아들이 있어서일까요?”

예리하게 파고드는 한 주임을 세 여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쳐다봤다.

선뜻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다들 입에 추라도 매단 것처럼 아무 말도 못 하니 분위기가 절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저, 저는 시에나 부인한테 가 볼게요. 갑자기 공주님 시중을 들으라니 많이 당황하실 것 같아서….”

“그래, 그래요. 미엘라가 경험이 있으니 도움을 주면 좋겠어요.”

미엘라가 벌떡 일어나자 루이자가 얼른 부추겼다. 아무래도 한 주임의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치맛바람까지 일으키며 도망친 미엘라를 보고 루이자도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저도 다 나은 것 같으니 이만.”

“잠시만요. 두 분께 할 말이 있습니다.”

지팡이를 거두며 포라킨이 루이자를 멈춰 세웠다.

허리를 세우고 앉은 루이자의 머리 위로 무형의 실드가 전개된 건 순식간이었다. 밖으로 새어 나갈지 모르는 소리를 차단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포라킨은 가슴을 부풀려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두 손을 결연히 모았다. 그리고 집중된 이목을 향해 단숨에 폭탄 발언을 던졌다.

“세레나 공주님의 아이는 황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맙소사, 헤르미네 양! 지금 무슨 말을!”

루이자가 머리를 감싸며 빽 소리를 지르다가 저도 모르게 헉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제법 큰 소리였으나 실드가 조금 일렁이며 파동을 막았다. 루이자는 공연히 자세를 낮추고 요란스럽게 소곤거렸다.

예법이고 뭐고,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물론 저도 공주님이 돌아오신 게 심히 유감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귀부인에겐 치욕적인 언사예요!”

그러고는 힐끔 한 주임을 쳐다봤다. 아까부터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는 한 주임이 몹시도 오싹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결혼할 남자의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내가 떡하니 살아 돌아온 여자의 심경이란!

그런 일을 겪는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참담한 기분일 텐데, 조금 창백한 낯빛을 제외하고 한 주임은 별다른 반응이랄 게 없었다.

두 손을 다리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잘 만든 인형 같기도 했다.

어쩜 저렇게 귀족적이고 우아한지. 루이자는 동정도 잠시, 경탄을 마지않고 마음속으로 기립박수를 쳤다.

한 주임은 술렁이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속으로 한 박자 쉰 다음 질문했다.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요?”

포라킨은 황손이 아니라고 단언을 한 게 아니라 ‘아닐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맞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단순히 한시름 놓기에는 이른 시점이었다.

“이야기에 앞서 델피온의 낡은 풍습부터 설명해 드려야겠군요.”

포라킨은 큼, 하고 작게 목을 가다듬은 뒤 매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델피온은 사제들 가운데서도 극단적으로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의 집단이 독립해서 황량한 대지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운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신도’라는 뜻의 고대어를 그대로 왕국 이름으로 붙였을 정도니까요.”

여기까지는 한 주임도 간략하게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작게 고갤 끄덕인 후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덕분에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악습이 많습니다. 가령 종교적인 이유로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든지, 첫날밤에 신부가 순결하지 않으면 이유를 불문하고 죄를 묻는다든지.”

“…!”

한 주임과 루이자는 동시에 몸을 굳혔다. 영민한 두 여자가 마지막 말의 의미를 알아챈 것이다.

포라킨은 간략하게 배경을 설명한 뒤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공주님이 아크만으로 오실 때 델피온의 사제들과 왕실 기사들이 함께 왔습니다. 사제들은 첫날밤의 증거를 목도하기 위해, 기사들은 불상사가 발생할 경우 공주님을 체포해서 고국으로 호송하기 위해서요.”

그런 다음 그녀는 아직도 생생한 제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제가 본성으로 불려간 것은 매우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신혼부부의 침실 앞에 서 있는 우락부락한 남자 사제들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좀… 역겹더라고요.”

말과 동시에 한 주임은 미약하게 눈썹을 구겼다.

자국의 왕녀에게까지 그런 무도한 짓을 하다니, 찰나지만 같은 여자로서 세레나에게 얄팍한 동정심이 들 정도였다.

“제가 도착하니 황자님이 직접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빈틈없이 제가 들어갈 만큼만 열었기 때문에 내부를 들키진 않았어요.”

그랬겠지.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니까. 한 주임은 문득 그의 다정함이 씁쓸해졌다.

힐끗 한 주임을 한번 보던 포라킨이 말을 계속했다.

“저는 처음엔 공주님이 많이 다치신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초야를 치르자마자 황자님께서 저를 찾으실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제가 치료한 사람은 공주님이 아니라, 황자님이었습니다.”

곧바로 두 사람의 눈이 포라킨에게 날아들었다.

“황자님이 당신의 팔에서 피를 내어 증거를 만드셨거든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루이자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포라킨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시에 야닉이 지었던 멋쩍은 표정을 떠올렸다.

[나한테 상처가 있으면 의심을 살 테니.]

그러면서 알리온 주교님을 부를 순 없지 않냐며 농담까지 던졌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해서 한 주임은 애꿎은 천장만 노려봤다.

“그때 세레나 공주님은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침대 구석에 웅크리고 계셨습니다. 떨지도, 울지도 않으셨어요. 그냥 가만히. 가만히 황자님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어리고 몸이 약한 세레나가 초야 후에 너무 힘들어해서 포라킨을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루이자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기에 더욱 놀란 얼굴이었다.

그 일로 야닉이 아내를 무척이나 아낀다더라, 하는 소문이 영지 안팎으로 퍼져서 모든 사람이 세레나의 말이라면 더욱 꼼짝을 못 했으니까.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루이자가 갈급하게 물었다.

“그렇지만 이후에 공주님은 늘 규방에서 홀로 주무셨습니다. 곁에는 미엘라가 항상 붙어 있었을 텐데, 외도를 해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 납득이 어려워요.”

“아크만에 오기 전부터 배 속에 아이가 있었다면 가능한 일이죠.”

그 말에 루이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과거를 회상했다.

지금에야 말이지만 세레나는 결혼할 당시는 보통 체형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식사량을 늘리고, 입에 단 것을 물고 살더니 빠른 속도로 체중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델피온에서 많이 못 드시고 자랐나 생각해서 짠하게 생각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왕녀인데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먹어 댈 때는 살짝 의아하기도 했다.

마치 억지로 살을 찌우려는 사람처럼…….

그때 당시에는 별거 아닌 일로 넘어갔던 것이 갑자기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초야에 비해 일찍 배가 나오면 의심을 살까 봐, 일부러 살을 찌웠던 거군요…….”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포라킨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제는 목소리가 높아질 일이 없으니 포라킨은 실드를 거두고 대신 방문을 잠갔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소파로 돌아와 테이블 위에 있던 물병을 잔에 기울이는데, 물 대신 보랏빛 액체가 주르륵 흐른다.

포도주를 왜 물병에…?

한 주임을 바라보자 멍하니 있던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 추울 때 마시면 도움이 좀 돼서….”

그 말에 포라킨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설마 마력이 부족하신 겁니까? 황자님이 구속구를 꽤 많이 놓고 가시지 않았나요?”

요새에 있는 금붙이란 금붙이는 전부 모아다가 장신구를 만들 기세로 쌓아 둔 걸로 기억하는데,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되묻자 민망한 웃음이 되돌아왔다.

“……그냥, 좀 아까운 것 같아서 아껴 쓰고 있어요.”

포라킨은 뭐 그런 걸 아까워하냐고 하려다가 그만두고 잔을 내려놓았다. 고백을 마무리 지을 시간이었다.

“어쨌든 저는, 공주님이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계획적으로 성을 빠져나갔다고 생각합니다.”

“머리카락 색이 본인이나 황자님과 다를까 봐 염려됐겠죠. 결국 실종이 아니라, 제 발로 나간 거로군요. 그렇지만 어떻게?”

포라킨이 내려놓은 잔을 대신 집어 들어 목을 축인 루이자가 심문하듯 물었다.

포라킨은 심드렁하게 어깨를 추켜올렸다.

“당연히 황자님이 도와주셨죠. 두 분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까지는 모릅니다. 저희는 그저 황자님의 명령을 이행했을 뿐이라서요.”

“…‘저희’요?”

이번에는 한 주임이 물었다.

이미 모든 것을 밝히겠다고 작정한 포라킨은 어렵지 않게 동료의 이름을 발설했다.

“스캄 님이요. 저와 부대장님 둘이서 공주님을 로엘 왕국까지 호위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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