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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그러니까 세레나 공주님 실종사건이 전부 다 조작된 거다…….”
루이자가 이마에 손을 짚으며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어쩐지 델피온이 난리를 치든 말든 태연자약하더라니!
황당함이 지나간 자리엔 야닉에게 치미는 배신감이 몰려와 루이자는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내가 5년간 그치들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집사장님께서 섭섭하신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세레나 공주님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함구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말에 심기가 상했는지 움찔, 루이자의 눈썹이 비뚜름해졌다.
“헤르미네 양은 내가 입이 가벼워 보였나요? 델피온에 너희 왕녀가 멀쩡히 살아서 제 발로 도망친 거라고 밀고라도 할까 봐?”
“그럴 리가요. 집사장님께는 사실대로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황자님께 먼저 말씀드린 건 접니다.”
루이자가 의외라는 듯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이유를 묻자, 가느다란 목소리가 담담히 끼어들었다.
“아내의 명예를 지켜 주고 싶었을 거예요.”
한 주임은 조금 쓸쓸하게 웃었다.
“그런 사람이잖아요.”
포라킨은 이내 먹먹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만약 델피온에서 알았으면 공주님은 아마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본보기를 위해서라면 공개처형도 불사할 만큼 꽉 막힌 곳이거든요. 황자님은 그걸 염려하신 겁니다.”
야닉이 세레나에게 가진 것은 애틋한 마음이 아니라, 인류애에 가까운 동정과 배려였다는 것을 포라킨은 강조하고 싶었다.
그가 세레나 때와는 달리 한 주임을 바라보는 눈빛이 어떤지, 얼마나 낯간지러운 행동을 하는지, 심지어 목소리는 또 어떻게 바뀌는지 하나하나 조목조목 읊어 주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한 주임은 다른 면에서는 눈치가 빨랐으나 본인의 연애 쪽으로는 영 그렇지가 못한 것 같았다.
* * *
구름같이 포근한 침대에 몸을 파묻고 있으면서도 한 주임은 자갈길에 누운 사람처럼 연신 뒤척거렸다.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세레나의 얼굴이 떠올랐고,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하면 포라킨이 한 말이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돌아온 이유가 뭐냐고 물어도 제자리로 돌아온 것뿐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어요. 그러니 황자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 말고는….]
야닉이 돌아올 때까지 세레나를 저지할 별다른 수가 없다. 어쨌든 그녀는 아직까진 공식적인 황자비이자, 여전히 델피온의 왕녀였다.
그녀가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 한들 사실이 밝혀지고 마땅한 결과에 이르기 전까지는 지위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지시를 내리면 기본적으로 아랫사람들은 따라야 한다. 세레나는 요구할 권리가 있고, 그럴 자격이 있다.
그 사실이 가슴을 옥죄어 오는 듯했다. 타는 목마름이 되어 속을 갉아 댔다.
유일한 위안이 되는 것은 야닉이 지난 5년간 실종된 아내를 그리워했다는 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뿐.
묻지도 않았건만 루이자와 포라킨은 앞다투어 야닉이 세레나를 사랑했을 리 없다고 열변을 토하다가 캄캄한 밤이 다 되어서야 돌아갔다.
결혼했을 당시엔 로기아 후작이 영지에서 모든 손을 놓고 두문불출을 시작했을 때라, 모든 것을 떠안은 야닉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고 한다.
밤을 새우는 것은 일상이었고 영지 사업과 마물 토벌, 병력 충원을 위해 볼이 패일 정도로 일에 매달려 살다 보니 세레나를 신경 쓸 틈도 없었다고 했다.
세레나는 성의 안주인 노릇을 하기는커녕 야닉이 번 돈을 모조리 탕진할 기세로 사치를 즐겼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학대했으며, 끊임없이 야닉을 의심하고 몰아세웠다.
야닉은 세레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 적도 없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세레나가 야닉의 침대에서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단전에서부터 울화가 치밀지만…….
‘그런 뻔뻔한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거야.’
한 주임은 제 수첩 낱장이 뜯긴 것도 모자라, 아끼던 볼펜이 세레나의 로브 주머니로 들어갔던 장면을 떠올리며 이를 박박 갈았다.
* * *
다음 날 이른 새벽에 그녀는 누구보다 빨리 일어나 하랑을 배웅했다.
마음 같아선 뒤라도 밟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애써 눌러 담으며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무거운 손을 흔들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발을 움직여 천천히 몸을 돌리는데 머지않아 움직임이 멈췄다. 어제 자로의 장례식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도중에 빠져나와 버린 것이 기억난 것이다.
미쳤어. 미쳤나 봐. 한 주임은 주먹을 말아쥐고 서둘러 사원으로 달렸다.
분명 사원에서 그의 유해를 보관하며 안식 기도를 올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자로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야 했다.
‘…고맙다는 말도 못 했는데.’
연무장에서 사원까지 내리 이어지는 오르막을 쉬지 않고 달리다 보니 찬바람에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는 밭은 숨을 연거푸 내쉬며 익숙한 길 위에 다다라 멈춰 섰다.
“하아. 안녕하셨어요. 영주님. 오랜만에 뵙네요….”
오늘도 어김없이 비슷한 자리에 서서 서성이는 로기아 후작을 보니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놓였다.
여전히 이상한 주문을 외고 있었지만, 오늘은 예전과 달리 금방 지나가지 않고 그는 가만히 서서 한 주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어딘가 저를 살피는 듯한 착각마저 일어서 그녀는 어색하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오늘은 저도 사원에 볼일이 있어서 가는 거라서요. 영주님 따라가는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
혹시라도 후작이 오해할까 봐 한 주임은 얼른 앞장서서 걸었다. 곧이어 자박자박 땅을 밟는 소리가 그녀의 뒤에 따라붙었다.
하얗게 서리가 낀 약초밭을 지나 개방된 회랑을 걸으며 한 주임은 문마다 걸린 글자를 띄엄띄엄 읽었다.
“고해실… 기도실…. 여긴가?”
제국 글자로 쓰여 있어서 확신 없는 음성으로 중얼대다가 문에 손을 대는데, 돌연 뒤에서 누가 어깨를 덥석 잡는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소리도 안 나온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한 주임은 순간 너무 놀라서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벌렁벌렁한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몰아쉬는 와중, 정작 아무 동요도 없이 후작이 울퉁불퉁한 손가락으로 명패를 가리켰다.
“…네, 네?”
자세히 보니 제가 열려고 했던 문에는 기도실 옆으로 ‘남성’이라고 작게 덧붙여져 있었다.
성별이 나누어져 있구나. 한 주임은 육성으로 아아 소리를 내며 꾸벅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
로기아 후작은 유령처럼 스산한 걸음으로 그녀를 지나쳐 기도실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무안해져서 이마를 긁적이던 한 주임은 얼마쯤 더 가서 여성용 기도실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단박에 몸을 굳혔다.
주인의 외투를 든 본성 하녀장이 입구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에나를 시중으로 들인 사람이라면 바로 어제 현장에서 목격하지 않았던가.
‘공주가 왜 기도실에…….’
시에나는 인사할 틈도 없이 곧장 한 주임을 향해 다급한 눈빛을 보냈다. 세레나가 보기 전에 얼른 나가라는 뜻이다.
제대로 알아들은 한 주임이 몸을 돌린 순간, 등 뒤로 낭랑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왔으면 들어오지, 왜 나가지?”
“…….”
한 주임은 애써 의연한 얼굴을 가장하고 돌아봤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머리와 목을 흰 천으로 전부 가린 세레나가 푸른 눈을 빛내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은 기도실과 어울리지 않게 흡사 지옥에서 온 사자처럼도 보였다.
“내 기도는 막 끝난 참이니 들어와서 네 기도를 올리려무나.”
단상 위에 기다랗게 줄지어 놓인 양초들 사이, 성인(聖人)의 작은 조각상이 놓인 소박하고 단출한 공간이었다.
단열도, 난방도 안 되는 냉랭한 실내임에도 한 주임은 머리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렇지만 괜히 허둥지둥하는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잘못 들어온 거라서요. 유해 보관실에 가려던 참이었어요.”
이 정도면 침착하게 말한 편인가.
혼자 되새기면서 나가려던 찰나, 세레나의 입에서 ‘기다려.’ 하는 명령이 떨어졌다.
한 주임은 눈을 꾹 감았다가 뜬 다음 형식적으로 웃으며 돌아봤다. 사회생활로 다져진 ‘미소 가면’을 장착한 채로.
“내가 어젯밤에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세레나는 한걸음 다가와 시에나를 옆으로 가볍게 밀치고는 눈을 치켜세웠다.
“내 남편에게 여자가 있다고 하던데.”
“…….”
일순 가면에 쩌적, 금이 갔다.
세레나의 손가락이 한 주임이 입고 있는 하얀 모피를 툭 건드렸다. 한 주임은 옴짝달싹도 못 하고 서 있었다.
“그 사람 옷장에도 같은 종류의 외투가 있더라고. 이렇게 희고 부드러운 털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쉽지 않지.”
“…그냥 옷일 뿐이에요.”
한 주임은 손등으로 세레나의 손을 가볍게 밀어내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세레나는 오히려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바보 같긴. 이건 그냥 동물 털이 아니야. 그리즐리 숲에 서식하는 희귀 아인종 마수의 털이지.”
그녀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시에나를 향해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이한테 필요도 없는 겨울옷이 옷장에 있는 걸 보고 내가 물어봤을 때 네가 뭐라고 답했지? 말해 봐, 시에나.”
이에 시에나는 당황한 낯을 숨기지 못하고 허둥지둥거렸다.
“어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기도실 안에 메아리치자 시에나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벌벌 기었다.
“화, 황자님께서 간만에 라이칸스로프를 잡으신 기념으로 마, 만드신 거라고 했습니다….”
승기를 거머쥔 표정으로 세레나는 한 주임의 어깨를 꾹꾹 눌렀다.
“그런, 귀한 옷을, 이방인이, 어디서 구해.”
마디마디 힘을 주어 누르는 탓에 한 주임의 몸이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모욕감과 부끄러움으로 순식간에 귀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제 와 무슨 말을 한들 세레나에게 있어 자신은 주제도 모르고 두 번째 부인 자리를 꿰차려는 야망에 찬 여자일 것이다.
반면에 심연 속에 웅크려 있던 자아 하나가 불뚝 튀어나와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야닉에게 떳떳지 못해서 도망을 친 게 아니냐’는 말을 목구멍까지 밀어냈다.
안 돼. 거기까지 바닥을 드러내선 안 돼. 한줄기 이성이 필사적으로 말을 막았다.
세레나는 단내나는 과일에 모여든 날파리를 보는 표정으로 쯧 혀를 찼다.
“내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운 탓이지. 당연히 남편한테 벌레가 꼬일 수밖에.”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톡톡 두들기던 세레나는 이제 비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이를 이해해. 한창의 나이에 아내도 없이 얼마나 외로웠겠니. 마음이 허하니 몸이라도 위로받고 싶었겠지.”
“저기….”
모욕을 참지 못하고 섣불리 연 입에 세레나는 애잔한 얼굴로 고갤 들었다.
“물론 네 처지 역시 이해할 순 있어. 그가 침대에서 얼마나 자상한지… 겪어 봤으면 알 거 아니니. 돈 몇 푼으론 쉽게 떨어지지 못하겠지.”
순간 머리가 멍해지고 귀가 먹먹해졌다.
지금 세레나는 명백하게 자신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두 번째 부인은커녕 대가를 받고 놀아난 장난감 취급을 하는 것이다.
도발에 넘어가 진실을 말할 것인가, 장단에 맞춰 세레나의 속을 긁어 놓을 것인가.
한 주임은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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