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97화 (97/155)

)

브레고는 자신을 향해 있는 사미 크랩턴의 검 끝을 보고 하! 큰 소리로 웃었다. 커다란 홀에 브레고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한가득 울렸다.

사미 크랩턴은 검을 겨눈 상태에서도 브레고를 향해 느물느물 히죽거리고 있었다.

“어이쿠. 예, 예.”

브레고는 건들거리는 사미에게 맞서지 않고 가슴 높이로 양손을 들어 가볍게 항복 표시를 했다. 뒷걸음질 치면서도 그는 예리하게 사미의 손을 눈여겨봤다.

검을 든 자세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손잡이를 쥔 손이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브레고는 내색하지 않으며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무도한 자 같으니라고! 남편이 돌아오면 엄벌을 내리겠어요.”

한껏 으름장을 놓은 세레나는 곧바로 시에나에게 이리 오라는 턱짓을 했다. 그녀는 여전히 브레고를 노려보면서 속사포로 명령을 내렸다.

“율리안을 데려가서 씻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혀. 식사는 우선 방으로 가져와. 음식은 넉넉히 준비하고.”

시에나가 허리를 굽혀 율리안에게 주춤주춤 다가갔다.

“저, 저를 따라오세요. 율리안 님.”

불안에 떠는 아들을 다독이며 세레나는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시에나가 율리안을 데리고 자리를 뜨자 그녀는 이번에는 한 주임을 대놓고 쳐다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똑똑히 봤겠지, 하는 적나라한 도발이 담긴 표정이었다.

노골적인 적의에도 한 주임은 허리를 바르게 세우고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잠잠한 눈에서는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다.

허탈함이나 좌절감, 또는 분노라든가 질투심 따위에 사로잡힌 추한 모습을 기대했건만, 하다못해 당황하는 하인들보다도 못한 반응에 세레나는 김이 팍 샜다.

‘제법 얌전 떨 줄은 아는군.’

그녀는 속으로 혀를 크게 차고는 휙 몸을 돌렸다.

“사미 경, 내가 없는 동안 율리안이 어떻게 지냈는지 보고를 받아야겠으니 따라오세요.”

“예!”

사미 크랩턴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세레나를 따라 껑충 계단을 뛰어올랐다.

두 사람이 1층 응접실을 지나쳐서 3층에 있는 야닉의 침실로 함께 들어가는 장면은 복도에 있던 사용인들에겐 경악 그 자체였다.

세레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운영팀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 주임에게 달라붙었다.

“저, 저, 저 여자가 세레나 공주야? 대박! 완전 대박…….”

박 차장이 연신 대박을 뇌까리며 세레나가 사라진 자리와 한 주임을 번갈아 쳐다봤다.

김유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 주임의 팔을 다독였다.

“주임님, 괜찮아요?”

“유정 씨. 괜찮겠니? 혼자도 아니고 애를 데려왔잖아, 애를! 눈동자 색이 바뀌는지 보려면 적어도 5년은 더 기다려야 된다는데, 재인이 그러면 서른다섯이야! 어떡할 거야, 정말!”

박 차장은 제가 다 속상하다는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뭐, 그래도 예쁘지는 않네. 공주라고 다 여신은 아닌가 봐. 일단 비주얼부터가 한 주임 압승이네. 안 그래요, 현자님?”

공 대리는 시시덕거리면서 이한율의 어깨에 팔꿈치를 올리려다가 그가 무심히 피하는 바람에 공중에서 휘청거렸다.

이한율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해사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주임님. 그보다 로엘에서 맛있는 생선요리를 팔길래 사 왔는데 가져가서 좀 드세요.”

“아. 고맙…….”

한 주임은 엉겁결에 나뭇잎으로 감싼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그러다가 김유정이 야영했을 때 자기가 만들었던 어죽이 훨씬 더 맛있지 않았냐며 공 대리의 멱살을 잡고 뒤흔드는 것을 멍하니 쳐다봤다.

율리안이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메인 홀에 나와 있을 때부터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세레나가 자리를 비우자 둑이 허물어지듯 맥이 풀려 버린 듯싶다.

그녀는 경직됐었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야닉이 돌아올 때까지 움츠리지 말고 당당하게 기다리자던 결심은 생각보다 지키기가 어려웠다.

5년 전의 세레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가 된 것처럼 쳐다봤다. 야닉이 저 말고도 다른 부인을 들일까 봐 밤낮으로 눈에 쌍심지를 켜 대던 세레나를 알기 때문이었다.

성의 사용인들, 용병들, 사제들 너나 할 거 없이 자신을 아련한 눈으로 보고 있다. 눈시울을 글썽이는 사람, 괜히 와서 등을 두드리고 가는 사람 등등 정말 다양하게 동정심을 사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장단에 맞춰서 식음 전폐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순간 어지러워진 한 주임은 날아드는 수많은 눈을 피해 얼른 제방으로 피신했다.

오늘은 야닉이 두고 간 장신구 중에 커다란 목걸이를 하나 깰 참이었다.

누군가 손만 갖다 대도 곧바로 깨질 수 있을 정도로 마력을 꽉꽉 눌러 담아 놔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두어 번 심호흡을 한 뒤에 여기저기 금이 가 있는 두꺼운 목걸이에 손을 뻗었다. 금속의 차가운 느낌이 전달됨과 동시에 몸속에 남아 있던 야닉의 마력이 구속구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약간의 현기증이 일 때쯤 쨍그랑! 하는 파열음과 함께 응집된 마력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거대한 양의 마나가 공중으로 흩어지며 일부가 한 주임에게 다시 흡수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져오려고 두 팔을 뻗어 보았지만 벌써 대부분이 휘발되어 사라진 상태였다.

그녀는 입으로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벗어 둔 장갑을 집어 들었다.

획기적으로 마력을 충전하는 방법이긴 한데, 어째 버려지는 양이 더 많은 것 같단 말이지. 밀폐된 공간에서도 딱히 차이는 없었다.

가장 좋은 것은 야닉과 직접 접촉해서 받는 건데…….

그를 못 본 지도 벌써 보름이 넘었다.

구속구가 모자란 건 아닌데, 마음이 공허하고 뒤돌아서면 습관처럼 한숨이 흘렀다.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느라 잠까지 설친 적이 있었던가, 한 주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이한율에게서 받아 든 꾸러미가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것이 보여 눈살을 찌푸렸다.

“아… 괜히 저런 걸 받아선.”

될 수 있으면 이한율과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길게 짓눌렀다.

똑똑.

“…….”

율리안을 목격했으니 다른 하녀들과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을 미엘라는 아닐 테고, 역시 박 차장인가 싶어 한 주임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적당히 그녀의 기분을 맞춰 주다가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미적미적 문을 열었는데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한 주임은 문가에 가만히 서서 눈만 끔뻑거렸다.

“좀 비켜 봐요, 들어가게.”

루가 입을 삐죽거리면서 퉁명스럽게 한 주임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선 그녀는 한 주임의 방을 빙글 둘러보다가 권유도 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소파로 가더니 냅다 몸을 앉혔다.

멀거니 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한 주임이 서둘러 문을 닫고 강아지처럼 뒤를 쫓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혹시 임 사장님이 어디….”

“아빠는 괜찮아요. 아직 목발은 해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고, 아무튼.”

루는 얼굴을 벅벅 문지르다가 돌연 심각한 얼굴을 하고 한 주임을 쳐다봤다.

“좀 전에 왔죠. 공주님 아들이랑 남자 기사.”

한 주임은 낯선 그녀의 모습에 적응할 새도 없이 낯빛을 흐렸다. 갑자기 찾아와서 이런 얘길 꺼내는 이유가…….

“그 남자 기사요.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어쨌든 그 사람.”

“…사미 크랩턴이요.”

“맞아요, 그 개자식!”

* * *

사미는 흥분을 감추지 않으며 침실 곳곳을 개처럼 기웃거렸다.

“맙소사, 레나. 여기 좀 봐! 방 하나가 로엘에 있던 우리 집보다 더 큰 것 같지 않아?”

“얌전히 좀 있어, 사미. 성에 오자마자 팔이 잘려 나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세레나의 엄포에 벽난로 위에 있던 금장 촛대를 집어 들던 사미가 낄낄 웃으면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오랜만이라 잊었나 본데 아크만은 델피온과는 달라, 공주님. 도둑질 따위로 팔을 자르거나 하진 않는다고.”

능청스럽게 대꾸한 그가 세레나의 뒤로 걸어와서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목덜미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용연향을 발랐어? 당신에게서 정어리 냄새가 아닌 향수 냄새가 나다니…….”

과장되게 킁킁대면서 얼굴을 비비는 것이 간지러워서 세레나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허리에 감긴 사미의 팔을 끌러 그의 어깨를 뒤로 툭 밀었다.

별로 세게 밀지도 않았건만 사미가 혼자 어, 어! 하더니 소파까지 뒷걸음질 치다가 풀썩 뻗어 버렸다.

늘어지게 앉은 그가 까만 물소 가죽을 매만지다가 그 위에 깔린 부드러운 러그를 손등으로 쓸며 황홀하게 중얼거렸다.

“여기서라면 맹세컨대 일주일이라도 안 깨고 잘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둘이서 자기엔 좁지.”

세레나가 눈웃음을 흘리며 다리 위에 앉자 사미는 익숙하게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당신, 걸을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거 알고 있어?”

뭉근하게 묻는 그에게 세레나는 허리가 젖히도록 깔깔거리며 비웃음을 선사했다.

“그야 벨벳에 금실로 자수를 넣은 드레스니까 그렇지, 멍청한 사미 크랩턴. 무거워서 걷기도 힘들 지경이라고!”

“이런. 진작에 돌아왔으면 당신의 아름다운 빨간 머리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안 그래?”

사미의 손이 세레나가 두르고 있는 윔플을 안타깝게 쓸어내렸다.

그러나 위하는 말과는 달리 그는 음험하게 웃고 있었다. 세레나는 얼굴을 굳히면서 그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그녀는 무릎에서 일어나 팔짱을 끼고 단조로운 톤으로 빠르게 내뱉었다.

“머리는 다시 기르면 돼. 그러니까 당신이야말로 이제 정신 차려.”

“잔소리하지 않아도 벌써 그러고 있습죠.”

“손을 떨던데… 며칠째야?”

날카롭게 노려보며 묻자 사미가 양손을 쫙 펼치더니 손가락을 몇 개 접는 듯하다가 어깨를 들썩였다.

“이젠 숫자도 제대로 못 세겠군. 어쨌든 잘 참고 있으니까 염려 마.”

세레나는 못 미더운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그건 그렇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생겼어. 그이한테 여자가 생긴 모양이야.”

“응? 나한테?”

“…….”

살벌하게 노려보는 것으로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든 세레나는 곧바로 이를 짓씹었다.

“남편한테 여자 한둘쯤 들러붙을 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니까. 당신은 그저 평소 하던 짓만 실행에 옮기면 돼. 할 수 있겠지, 사미?”

“아아. 그거야 어렵지 않지. 여자 신세 망치기야말로 내 전문이니까.”

그래…. 네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아직도 생선 내음이 남아 있는 것 같은 비릿한 침을 삼켰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