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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로 위에 철판을 올리고 그 위에 이한율이 준 꾸러미를 풀었다. 널찍한 잎사귀 안에는 하얀 죽을 뭉쳐 놓은 듯한 음식이 동그랗게 얼어 있었다.
루는 쇠 국자로 꽝꽝 언 돌덩이 같은 것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화로보다도 뜨겁게 열을 올렸다.
“그때 딱 뒤를 돌아보는데, 세상에 이 미친 자식이 우리 아빠 등 뒤에서 단검을 들고 있는 거야!”
벽난로 앞에 쪼그려 앉은 두 여자는 화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한 주임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면서 어떡해, 하고 입을 막자 루는 더더욱 열성적으로 목소리를 드높였다.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고 웃고 있지, 그놈은 언제든지 찌를 수 있다는 것처럼 칼 들고 웃고 있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자다가도 오줌이 마려워서 일어난다고 내가!”
“그래서 시녀 노릇을 했던 거예요? 아버지 때문에?”
한 주임이 안타깝게 묻자 루는 텁텁한 표정을 지으며 음식을 꾹꾹 눌렀다.
“…그럼 어떡해. 착하게 굴지 않으면 네 아버질 죽일 거다, 다른 사람한테 말해도 죽일 거다, 내가 죽게 돼도 네 아버지는 죽이고 죽을 거다.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는데…….”
얼어 있던 음식이 열기에 녹아 곤죽처럼 흐물흐물해진다. 루는 열심히 저어 가며 말을 이었다.
“사미 크랩턴. 그놈은 기사가 아니라 순 무뢰배예요. 아빠는 그자더러 백수건달이라고 했어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거예요.”
한 주임은 단호하게 말하곤 사미 크랩턴의 멀끔한 낯짝을 떠올렸다.
행색이 초라하고 머리를 산발하고 있어 그렇지, 얼굴만 보자면 나름 번지르르했다. 그렇지만 나쁜 놈이 어디 얼굴에 나 나쁜 놈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던가.
<저것이 알고 싶다>에서 보니까 흉악범 중에는 외모가 준수한 사람도 제법 된다고 했다. 얼굴만 보고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아무튼, 그놈을 조심해야 한다고요. 야닉이 돌아올 때까지 혼자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이제 막 성인이 된 아가씨가 진지하게 충고를 하는 광경이 생소해서 한 주임은 저도 모르게 설핏 웃었다.
“…그 말을 해 주려고 내 방까지 온 거예요?”
“네? 아, 아닌데요. 모트루스 먹으러 온 건데.”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마구 떨리던 루는 국자로 멀건 죽을 푹푹 내리찍으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한 주임이 비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매만지다가 모트루스? 하고 되뇌었다. 그러자 루가 얼른 턱으로 죽을 가리켰다.
“닭고기랑 생선 살을 으깨서 달걀, 설탕, 밀가루, 레몬즙을 넣고 뻑뻑해질 때까지 끓이는 거예요. 그냥 먹어도 되지만 식혀서 호밀빵에 올려서 먹으면 더 맛있어요.”
“오….”
“로엘 동북부 대표 음식이에요. 다른 지역은 닭고기만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모트루스의 진가는 원래 생선 살에서 나오거든요.”
전문지식을 한껏 뽐내면서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루를 보자니 새삼 용병들이 루를 왜 예뻐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한 주임은 무릎을 끌어안으며 따스하게 웃었다.
“임식당이 망할 일은 없겠어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아빠는 자기가 음유시인이라고 하지만, 아빠가 만든 요리는 제국에서… 아니 대륙에서 최고로 맛있거든요?”
루는 자기가 말해 놓고도 히히 웃으면서 국자에 묻은 모트루스를 조금 떼어 먹었다.
* * *
율리안이 본성에 입성하고 이틀이 더 지나 수도에서 출발한 전령이 요새에 도착했다. 야닉이 보낸 아크만 기사단원이었다.
기사는 콧수염에 얼어붙은 서리를 녹일 틈도 없이 관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캄에게 붙잡혀 버렸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다.”
“이 날씨에 무사히 도착한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돌아다니기엔 아직 이른 계절이지.”
기사가 앓는 소리를 내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스캄이 얼른 다가오더니 군장부터 냅다 끌어내렸다.
“오는 길에 하랑 그 녀석은 못 봤나?”
마음대로 기사의 짐을 뒤적거리던 스캄이 돌돌 말린 양피지를 찾아내고는 투박한 손으로 매듭을 풀었다. 그러자 굳은 목덜미를 문지르던 기사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도와줄 행인 하나 없는 길을 혼자 오려면 안전한 길로 돌아서 와야 해. 하랑은 보지 못했는데, 그가 수도로 간 건가?”
“이런 젠장. 길이 엇갈렸나 보네.”
혼잣말처럼 욕설을 내뱉은 스캄이 양피지로 시선을 돌렸다.
적힌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그의 두꺼운 미간이 급격하게 좁아졌다.
종마의 허가가 떨어졌다. 검은 늑대는 신도를 만나러 간다. 장미는 여덟 송이가 준비됐다. 대비할 것.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는 입맛을 쩝 다시며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야심한 시각, 용병대 관사 회의실을 밝히는 은은한 불빛이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루이자와 함께 마지막으로 도착한 한 주임은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스캄의 좌우로 알리온과 임철우가 그녀에게 눈인사를 건네 왔다. 그 옆에는 의자 위에 나무 상자를 받치고 앉은 다위가 팔짱을 끼고 있었고, 맞은 편에 있던 포라킨이 두 사람을 보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회의실의 문을 열어 준 사람은 브레고였다. 그는 짐짓 과장되게 허리를 굽히며 수도 귀족 흉내를 냈다.
“어서 오십시오. 숙녀분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용인들이 잠들길 기다리다 보니.”
루이자가 빈 의자를 끌어 앉으며 여상히 인사를 받았다.
뒤따르던 한 주임은 엉거주춤 그녀의 옆에 앉아 눈을 굴렸다. 비밀 회합과 다를 바 없는 자리에 제가 끼어들어도 되는 일인지 눈치가 보인 까닭이었다.
그렇지만 야닉의 소식을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철판을 깔고 뻔뻔하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중앙에 앉은 스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스캄은 테이블 위에 야닉이 보낸 서신을 내려놓으며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늘상 낄낄대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아른한 불빛에 비친 진중한 얼굴이 낯설어 한 주임은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원래는 로하겔 그 양반이 진행하는 건데, 지금은 대장을 따라가서 없으니 내가 주도하겠소.”
“누가 진행하는지 따위는 관심 없고, 저 이방인이 이 자리에 껴도 되는 거냐?”
한 주임은 순간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에 급속도로 목이 타들어 감을 느꼈다.
의도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공격적인 다위의 말투가 오늘따라 유독 칼바람 같았다.
가뜩이나 눈치만 보고 있는 판국에 굳이 콕 집어 지적하다니, 곱게 땋은 주황색 턱수염을 아래로 쭉 잡아당겨 조용히 하라는 경고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시에 회합을 가지는 인원이 고정되어 있다는 걸 깨닫고 그녀는 다시금 좌중을 훑었다.
다위가 말하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란, 다른 말로 요새의 보안을 공유하는 주요 인물이란 뜻이었다.
양피지를 슬쩍 들여다본 알리온이 끌끌 웃음을 터뜨렸다.
“주인공이 빠지면 곤란한 일이지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들을 향해 스캄이 콧바람을 길게 내뿜고 팔짱을 꼈다.
“……대장이 결국 결혼 허가를 받아 낸 모양이다. 델피온으로 이동한다고 하는구만.”
“세상에! 축하드립니다. 한 주임님!”
루이자가 눈을 빛내며 한 주임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한 주임은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내 눈을 땡그랑 떴다.
결혼? 결혼이라니. 내가, 야닉이랑?
야닉이 수도로 떠날 때 넌지시 흘리긴 했지만, 그가 직접 결혼을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가 분명히 말한 것은 시즈와 이야기할 것이 있다는 것뿐이었는데, 정말 결혼이라고? 진짜?
고장 난 로봇처럼 같은 말만 머릿속에 윙윙 맴돌았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는 생경한 소식이었다.
연애도 해 본 적 없는데 갑자기 결혼이라니,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기쁘기보단 당혹스러웠다.
주변 사람들이 하도 설레발을 쳐서 그런가, 그들이 말하던 결혼은 대부분 농담에 가깝게 들렸다. 아니면 저를 놀리는 게 재밌어서 그랬다든지…….
막막한 얼굴을 하고 있던 한 주임은 퍼뜩 세레나를 떠올리고는 입매를 일자로 굳혔다.
부인이 여러 명이라던 시즈가 저절로 연상된 까닭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것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제가 황자님의… 두 번째 부인이 되는 건가요?”
쥐어짜 내듯 겨우 물어본 말에 스캄이 대번에 엥? 하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있나! 두 번째라면 델피온까지 갈 이유가 없지, 제국법에 따라 강행하면 되니까. 그게 아니라, 대장은 이혼하러 간 거야.”
“아…….”
한 주임은 곧바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회의실에 오기 전에 야닉의 귀걸이 하나를 깨뜨리고 왔는데도 어깨가 잘게 떨려 왔다.
양초 몇 개만 켜진 어둑한 실내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대낮이었으면 분명 귀까지 빨개진 것을 들켰을 테니까.
은근한 웃음을 머금은 시선들을 외면한 채 그녀는 애써 의연함을 가장했다.
“ㄱ, 그 일 때문에 이렇게 모인 거예요?”
혀를 깨물 뻔한 것을 모른 척하고 던진 질문에 스캄이 음. 하고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것도 있지만… 진짜 안건은 이거야.”
그가 두툼한 손가락으로 양피지에 쓰인 내용을 툭 짚자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곧 웃음기가 사라졌다.
한 주임은 목을 길게 빼고 그가 가리킨 문장을 살폈다.
장미는 여덟 송이가 준비됐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위가 성마르게 끼어들었다.
“전쟁이로군. 얼마든지 오라 그래! 이 다위가 전부 쓸어 줄 테니까!”
“진짜로 쓸어 버리시면 곤란합니다.”
포라킨이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한 주임은 결혼에 이어 난데없이 튀어나온 전쟁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번에도 역시 멀거니 스캄만 쳐다봤다.
그 시선을 눈치챈 포라킨이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만간 황실에서 아크만으로 군대를 보낼 겁니다. 명분은 반군 진압. 저희는 제국의 반역자가 되는 겁니다.”
“……네?”
한 주임은 내용을 듣고도 되물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한 것도 아닌데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야닉이 반역이라니… 그가 제위를 노리는 건가? 그런 말은 전혀 듣질 못했는데…?
결혼도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전쟁이니, 반역이니, 여기에 깜짝 카메라 같은 게 있을 리도 없고….
그야말로 머릿속은 뒤죽박죽 엉망으로 포화 상태였다.
한 주임은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라 자부했던 스스로가 순간적으로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실제로 반역을 일으키겠다는 건 아닙니다. 황실의 관심을 최대한 북부로 돌리는 게 목적일 뿐이니까요.”
머리 위에 물음표만 띄우고 있는 한 주임을 보며 포라킨은 차분히 설명했다.
“제국의 병력이 아크만으로 집중될 때를 노려서 2황자 시즈 오베라 님이 반정을 일으킬 겁니다. 이때 발생할 유혈사태를 최소화하려는 겁니다. 시즈 황자님에게는 제국군을 상대할 군대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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