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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99화 (99/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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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 오베라.

한 주임이 기억하는 그 미남자는 만찬회에서 운영팀에게 실없는 퀴즈를 내며 말장난이나 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제위를 노린다… 더군다나 야닉이 이를 돕고 있다니…….

한 주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의 민낯을 들여다봤다. 조금 전까지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비장함마저 감도는 무거운 전운이 회의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스캄은 낮게 깔린 음성으로 포라킨의 뒤를 이어 말했다.

“…계획은 이렇다. 제국군이 출정하고 닷새가 지나는 시점에 맞춰 2황자가 궁을 장악하고 황제와 황태자를 끌어내린다. 반정에 성공하면 그 즉시 전령을 보내 군대의 회군을 명령한다.”

“전형적인 빈집털이 수법이란 말씀. 빈집치고는 으리으리하겠지만 말이죠.”

브레고의 첨언에 스캄이 적갈색 눈을 번뜩이며 매섭게 테이블을 노려봤다.

“만에 하나를 위해 우리는 진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군은 보급대가 있으니 굳이 마을마다 쉬어 가지 않을 거야. 전령 놈이 제때 도착하지 못하면 얼마간은 실제로 공성전이 벌어질 거다. 영지가 피해를 보는 일만은 반드시 막아야 해.”

한 주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반문했다.

“아무리 군인들이 많이 와도 최소한의 병력은 남아 있을 거잖아요. 성공한다면 모를까, 만에 하나라도 실패하면 야닉은 정말 반역자가…. 아크만이 너무 위험해지지 않나요?”

야닉이 이끄는 용병단과 기사단이 아무리 강하고 영지민들이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기껏해야 척박한 북쪽 일대의 요새일 뿐이다.

지형의 유리함이나 날씨의 영향은 오래가지 못한다. 대규모 병력과 전면전에 돌입할 경우 요새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쯤은 한 주임이 알고 있는 현대의 전쟁 상식으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껏 심각해진 그녀를 보고 브레고가 사뭇 밝은 목소리로 다독였다.

“성공해야 반정공신이지, 실패하면 역도에 그치고 말겠죠? 근데 우리 대장님이 실패할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요새를 걸었을까.”

“신성 기사단이 2황자님을 지원할 겁니다.”

가만히 있던 알리온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한 주임은 아연히 고갤 돌렸다. 평화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던 교단에서 개입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대사원과 지금의 황실이 대척을 지고 있는 건 사자님도 잘 알고 계시지요?”

알리온의 질문에 그녀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멋대로 대주교를 갈록으로 임명하고 압박하자 사원은 제국민을 사제로 받지 않는 것으로 응수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포라킨에게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반역에까지 합세할 줄은 몰랐다.

“오웬 황정의 정복욕으로 신성 기사단이나 치료 사제들을 멋대로 차출해서 갈등이 깊어진 것은 이미 오래된 역사입니다. 관계가 회복되기에는 서로가 너무 먼 길을 건넜어요. 이번 반정에 힘을 보태는 대가로 대주교 임명 권한 위임, 더불어 마물 토벌을 제외한 나라 간 전쟁 차출 중단, 그 외에도 몇 가지 조건을 추가해 교단의 완전한 독립을 약속받았습니다. 2황자님이 내민 손을 우리가 거절할 이유는 없지요. 대사원은 그분을 지지할 것입니다.”

알리온은 단호하게 말했다.

약초밭이나 과수원에서 손에 흙을 묻히고 선량하게 웃던 모습이 갑자기 낯설어지는 것은 왜일까, 한 주임은 아주 약간 몸을 움츠렸다.

알리온의 뒤를 이어 루이자도 자연스레 합세했다.

“거기다, 황태자비 가문이 대부분의 상권을 독점하면서 제후들의 불만 역시 쌓여 있습니다. 뤼시크 상단이 활개를 치고 거기에 소속된 부유한 자유민이 늘어나니, 농노를 고집하는 영주들은 골머리가 썩을 수밖에요. 원로회를 비롯한 대귀족들 역시 모건 뤼시크를 숙청할 새 정권을 무리 없이 인정할 거예요.”

“실패할 가능성이 희박한 반역입니다.”

포라킨은 확신에 찬 어조로 결론지었다.

양피지에 적힌 ‘장미’는 시즈를 의미하고, ‘여덟 송이’는 계획의 8할이 준비에 마쳤다는 뜻이었다.

스캄은 이르면 돌아오는 봄, 제국군이 진군할 것이라고 했다.

계획을 설명한 다음으로는 공성전을 대비하는 획책이 이어졌다. 제국군이 투석기를 만들지 못하도록 일대의 나무들을 미리 베어 버리고 방벽에 칠할 기름을 준비한다는 등의 만약을 대비한 구체적인 방비가 한참을 오갔다.

테이블 위에 이런저런 양피지들이 쌓여 가고 이러다가 해가 뜨지 않을까 염려가 들 때쯤, 임철우가 먼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쯤 하죠. 식당 문 열 준비를 하러 가야 해서요.”

그의 말을 시작으로 그제야 사람들은 저린 팔다리를 쭉쭉 뻗으며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아직 깜깜한 새벽녘이었다.

자박거리는 발소리만 울리는 고요한 사위 속에 임철우가 먼저 말을 걸어 왔다.

“정신이 하나도 없죠? 갑자기 결혼이니, 전쟁이니.”

생각에 빠져 묵묵히 걷고 있던 한 주임은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아뇨, 그게…….”

부인하려던 그녀는 조금 전까지 혼란 속에 빠져 있던 자신을 인정하고 순순히 고갤 끄덕였다.

임철우는 설핏 웃으며 장난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나 나나 이런 세상에 온 걸 어쩌겠어요. 적응해야죠. 한국인 주특기 아닙니까. 저 때는 사람들이 돈 벌러 독일도 가고, 중동도 가고 그랬어요.”

그 숨결을 따라 하얀 입김이 기다랗게 이어지다가 이내 흩어졌다.

“우리도 그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해요. 돌아갈 수 없다는 것만 빼면.”

한 주임은 잠시 망설이다가 내내 고민하고 있던 것을 어렵사리 물었다.

“사장님은… 만약에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가실 건가요?”

그러자 임철우가 눈을 접어 웃었다. 이곳에서 30년 가까이 산 그에게는 다른 이방인들에게 벌써 몇 번이나 들었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선희 두고 내가 어딜 가요. 나중에 온 사람들 말을 들어 보면 세상이 뒤집히게 변한 것 같던데, 어휴. 난 안 가요. 아니, 못 가요. 세상에 손바닥만 한 전화기를 들고 다니면서 바깥에서 테레비도 보고 서로 얼굴을 보고 통화를 다 한다나요. 그런 어릴 적 공상과학 같은 이야기보단 차라리 마법이 더 평범해 보일걸요, 나한텐.”

한 주임은 그를 따라 조금 웃다가 문득 얼굴을 굳혔다. 걸을 때마다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임철우의 몸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리는 좀 괜찮으세요?”

“으음. 이쪽 다리가 이상하게 힘이 잘 안 들어가더라고요. 치료마법도 소용이 없고. 양 선생님 말씀으론 절단될 때 신경이 좀 손상된 것 같대요.”

남 일처럼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그러면서도 되레 한 주임의 등을 다독여 준다.

그녀는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회의실에서 내내 인상을 쓰고 있던데,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군대는 다시 돌아갈 겁니다. 그러니 얼굴 펴고, 가슴 펴고.”

임철우는 딸아이를 대하듯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른 사람 걱정 그만하고 아가씨 결혼 준비나 잘해요. 세레나 그 여자는 황자님이 돌아오면 전부 해결될 거고.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답게 패기를 가집시다! 알았어요?”

“……넵.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임철우는 도움의 손길도 거절하고 제 말 위에 올라타더니 힘차게 어둠을 뚫고 달려 나갔다.

한 주임은 발이 땅에 달라붙은 것처럼 서서 단단한 심지가 깃든 그의 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만 가시죠. 주임님.”

조용히 뒤따르던 루이자가 가만히 서 있던 그녀를 성으로 이끌었다.

한 주임은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조금 전부터 루이자는 야닉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깍듯이 모시고 있었다.

두 사람은 주방에 나 있는 덧문을 통해 본성으로 돌아와 숨을 죽이고 조용히 홀을 가로질렀다.

어스름한 새벽 달빛에 의지해 계단을 오르던 그들은 동시에 까무러치게 놀랐다. 1층 난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서 있던 까만 인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괴한이 한 발자국 앞으로 걸음을 내딛자 달빛에 그늘진 얼굴이 천천히 드러났다. 한 주임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달린 제 검을 확인했다.

“사, 사미 크랩톤 경!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하얗게 질린 얼굴로 루이자가 경악하자 사미가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잠이 안 와서. 두 숙녀분은 이 밤에 어딜 다녀오시는 길이신지?”

스산하게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 소름이 일었다. 한 주임은 기에 눌리지 않으려 턱을 치켜들고 싸늘하게 일축했다.

“내가 그쪽한테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나요?”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실실 웃고 있는 낯짝을 깡그리 무시하고는 계단을 마저 올랐다. 루이자가 황급히 따라가다가 이상한 느낌에 무심코 뒤를 돌았다.

루이자는 순간적으로 기절할 뻔했다. 사미 크랩턴이 소리 없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고 있는 모습은, 머리털이 쭈뼛 솟을 만큼 섬뜩한 광경이었기 때문이었다.

* * *

초조한 걸음으로 집무실을 배회하던 루이자는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한숨도 못 자고 내내 불안에 떨던 그녀의 눈빛이 무겁게 침잠했다.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라 지난 밤 사미 크랩턴의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사람의 형상을 한 악마래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흉흉한 모습에 절로 몸서리가 쳐지고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사고를 쳐도 크게 칠 분위기였어.’

오감이 불길하게 신호를 보낸다.

5년 전 세레나를 따라왔던 기사가 여전히 그녀의 곁에 머물면서 제멋대로 성을 돌아다닌다? 바보라도 알 수 있다.

사미 크랩턴은 위험인물이다. 정황이 그러했고 서임을 받은 기사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불량한 태도도 추측에 일조했다.

그는 세레나의 수족이고, 현재 세레나의 걸림돌은 단 한 사람일 것이다.

바로 한 주임.

그녀가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백번을 생각해도 칼날이 겨눠질 방향은 그곳뿐이었다.

제가 세레나의 입장이었어도 눈엣가시인 한 주임부터 해코지하려 들었을 것이다. 실행에 옮기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대비를 해 두어야 한다.

생각을 마친 루이자는 집무실 문을 박차고 나가 그대로 본성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한달음에 찾아간 곳은 트라야누스 단원들이 기거하는 숙소였다. 앞에서 보초를 선 병사에게 찾는 이를 전달하고는 그녀는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야닉이 돌아올 때까지 한 주임을 지킬 호위가 필요했다.

스캄에게 말하면 당연히 기사를 붙여 주겠지만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은 세레나의 명령에 눈 하나 깜짝 않을, 말 그대로 신분에 연연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요새에서 세레나를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한정적이었다. 다름 아닌 이방인들.

덧붙여 낯을 가리는 한 주임이 불편하지 않을 가까운 사람.

그중에서도 자신이 알기로 사상 최고로 강한 이방인이 떡하니 있지 않은가.

“…집사장님?”

바로 이한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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