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00화 (10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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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탄 제국의 수도 라비티움.

황성이자 뤼시크 상단의 본거지이며 황실에서 저택을 하사받은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 영주와 가신 귀족들, 부유한 평민들로 구성된 대도시다.

웬만한 소국만큼 드넓은 영토와 인구수를 자랑하는 이곳은 농경지가 적은 대신 무역 상권이 발달한 곳이었다.

수도 인근에서 헐값에 곡식과 축산물을 사들여 비싸게 유통하는 구조는 당연하게도 뤼시크 상단의 독점으로 이루어진다.

상단이 얼마나 큰 자금을 끌어모을지는 세 살짜리 아이도 알 수 있을 터.

야닉은 한 집 걸러 한 집꼴로 간판마다 그려진 사자 문양을 보고 조소를 머금었다. 여느 왕국에서나 사용할 법한 문장을 일개 상단이 버젓이 쓰고 있는 꼴이라니.

도시는 매우 활기차고 분주했다.

골목에 자리를 깔고 앉아 드렐라이어를 연주하는 음유시인과 그 소리에 맞춰 오우거 흉내를 내며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광대, 주사위 내기를 하다가 싸움이 붙어 주먹을 휘두르는 노인들의 성난 목소리가 골목을 가득 메웠다.

그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바쁜 걸음을 옮겼다.

로하겔 경은 기사 모양의 장난감을 들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손으로 밀어 내며 야닉의 뒤꽁무니를 겨우 따라잡았다.

“황… 아니, 주인님! 같이 가시죠! 걸음이 너무 빠르십니다.”

야닉과 같은 종류의 짙은 로브를 입은 로하겔 경은 말하면서도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인님이라니. 그대도 엄연한 귀족인데 그냥 ‘이안’이라고 부르래도.”

타박하는 투로 가짜 이름을 말해 주는데도 로하겔 경은 요지부동이다.

“주군에게 하대라니, 아무리 잠행이라도 그럴 순 없습니다. 차라리 종자가 되고 말지요.”

“자네를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어. 그냥 혼자 올걸.”

야닉은 자조적으로 고개를 내젓고는 재차 발을 놀렸다.

입궁하는데 홀몸이라니, 당치도 않다는 말을 늘어놓으며 따라붙는 고지식한 사내를 뒤로하고 얼마간 더 걷던 그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멀찌감치 사람들이 한데 뭉쳐 있다. 널찍한 공터엔 어림잡아도 50명은 넘는 인파가 몰려 있었고, 그곳 한가운데 선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얕은 연단에 올라선 검은 머리의 중년 남성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세상에 풀리지 않는 비밀은 없다! 선천 생명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우주를 경영하고 후천 생명은 신명이 주체가 되어 우주를 지배한다!”

그는 손수 바람 마법을 써 가며 우렁찬 제 목소리를 사방팔방 퍼트리고 있었다. 야닉과 로하겔 경은 자연스럽게 인파 속에 몸을 섞으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열변을 토하는 와중에 가만히 듣고 있던 사람 가운데 젊은 남자가 번쩍 손을 들었다.

“우주가 뭡니까?”

중년 남성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우주는 만물! 삼라만상이 곧 우리의 미래이자 나아가 제국의 미래입니다. 신도여. 저를 따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남성의 말에 감탄하는 사람도 있고 재미있는 구경거리인 줄 알고 왔다가 귀를 후비적거리며 돌아가는 이도 더러 있었다.

인파가 흐트러지든 말든 남성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로하겔 경이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저치는 수도에 와서도 저러고 있군요.”

“……구병호.”

야닉은 조그맣게 이름을 말하고는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문질렀다.

한 주임의 말대로라면, 저자가 바로 아성의 유령을 만든 장본인일 것이다.

황성에 온 김에 제대로 확인을 해야 했다.

뭐라고 지껄였길래 아크만의 영주를 폐인으로 만든 것인지.

“자, 다 같이 외쳐서 영생으로 가는 문을 엽시다! 한천 구씨 십 대손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사바하!”

그는 구병호의 선창과 일부 군중의 후창을 뒤로하고 유유히 인파를 빠져나갔다.

* * *

향신료를 곁들인 고급 요리들이 줄지어 나오고 마지막으로 주문한 음식이 빈자리를 막 채웠을 때, 구병호는 느릿느릿 식당 안에 등장했다.

그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테이블을 보고 꿀떡 군침을 삼켰다가 앞에 앉아 있는 야닉을 보고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무례할 정도로 노골적인 적대감이었다.

야닉이 포도주를 홀짝이다가 구병호를 발견하고 무심히 잔을 내려놓았다.

“재료가 신선하지 않으니 온갖 향신료 범벅에, 품질 낮은 포도로 만든 술이라…. 수도 음식치곤 형편없군. 안 그런가?”

“잘살고 있는 사람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뭡니까?”

구병호는 풀썩 소리가 나도록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팔짱을 꼈다.

정확히는 불뚝 튀어나온 배에 걸쳐진 팔을 보던 야닉이 내색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었다.

“나도 반가워. 그동안 잘 지냈나?”

예의는 밥 말아 먹게 대했는데도 돌아오는 건 순한 음성이었다. 괜히 무안해진 구병호가 헛기침을 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큼. 무슨 일이 있어서 연락을 안 한 건 아니고, 먹고살기 바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수도로 떠난 이방인들은 정착은 잘했는지, 근황은 어떠한지 등의 편지를 요새와 얼마간 주고받는다.

구병호는 황실에서 저택을 받은 후로 아크만에 한 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득시글한 아크만에서 그는 철저하게 배척당했고, 그것이 여전히 앙금으로 남아 있던 이유였다.

“그래 보이더군.”

야닉은 별일 아니라는 투로 대충 넘기고는 이윽고 진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은근슬쩍 흘려 볼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까, 끌고 가서 다그칠까. 찰나의 고민이 금안을 스친다.

짧은 고민 끝에 그는 직구를 던졌다.

“요새에 있을 때 로기아 후작에게 무슨 말을 했지? 당신이 밖에서 떠들던 괴상한 주문을 후작이 외우고 다니길래, 그걸 물어보러 찾아온 거야.”

은근슬쩍 떠보기엔 헛소리만 늘어놓을 것 같고, 끌고 가 목에 칼을 들이밀기엔 사실 좀 귀찮았다. 물론 대답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예정이겠지만.

다행히 구병호는 눈치가 있는 위인이었다.

그는 지척에서 검 자루로 손을 쓱 가져다 대는 로하겔 경과 눈이 마주치자 일말의 고민도 없이 입을 열었다.

“아아. 그거요? 딸이요, 딸. 그 왜, 영주 딸내미가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세상을 떴잖아요. 본래 순수한 어린 영혼은 심판을 거치지 않고 새 생명을 얻어서 다시 태어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처참하고 억울하게 갔으니 애가 올라가지 못하고 구천을 막 헤매고 지 애비 영혼까지 붙잡고 흔드니까….”

“짧게. 결론만.”

온기 없는 황금색 눈동자에 구병호가 무어라 입을 벙긋하려다 포기하고 술술 불었다.

“다른 거 없어요. 난 그냥 딸 영혼을 달래 주는 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야 애가 좋은 곳에 갈 수 있으니까.”

“……언제까지?”

“가만 있어 보자…. 1,977일 동안 다른 사람과 말을 섞지 않고 기도만 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근거리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로하겔 경의 이마에 순간 핏대가 흉흉하게 돋았다.

저런 미친놈의 말을 듣고 영주님이 그 오랜 시간을 온갖 손가락질과 조롱 속에서 버텨 왔단 말인가!

로하겔 경은 재판이고 뭐고 야닉이 눈짓만 해도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이방인의 목을 몸통과 분리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안 남았을 텐데? 아직 잘 지키고 있나 봐요? 이야. 믿음이 대단하네. 그 양반도.”

“…….”

야닉은 대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가만히 서서 입술을 매만지던 그가 자못 산뜻한 얼굴로 빙글 웃었다.

“잘 알겠어. 조만간 다시 볼 테니 그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

“내가 막 만나고 싶다고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다음에 또 올 거면 미리 예약을 하고, 헌금도 얼마간 챙겨서….”

“참고하지. 그리고 음식은 잘 먹었어.”

야닉은 깔끔하게 말을 자르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잘 먹었다고?”

구병호는 로하겔 경이 뒤따라 나가는 장면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별안간 뒤통수를 맞은 걸 깨닫고 튀어 오르듯 일어섰다. 그러나 야닉을 채 쫓기도 전에 계산하고 나가라는 우락부락한 직원에게 뒷덜미를 붙잡혀 버렸다.

로하겔 경은 문밖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욕지거리를 무시하고 주군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만두실 겁니까? 감히 영주를 속이고 농락한 사기꾼입니다. 참수를 해도 시원찮습니다! 당장에 잡아들여서,”

“이방인 처벌은 자칫하면 골치 아파져. 그보다 좋은 기회가 있을 테니 그때를 즐겁게 기다리자고.”

야닉의 말을 잠시간 곱씹던 그가 금방 깨닫고는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저택을 받았으니 저자 역시 군역의 의무를 지겠군요. 전장에서 만난다면 반드시 제 손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결의에 가득 찬 부관의 다부진 표정을 보며 야닉은 껄끄러웠던 마음을 다잡았다.

결국 이방인들도 평범한 사람이고 모두가 제 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4년간 선의를 베푼 끝에 돌아온 허망한 결과에 입이 썼다.

야닉은 문득 떠오른 이에 누그러진 낯으로 로하겔 경을 돌아보았다.

“이번에 돌아갔던 두 사람은 결국 황실의 제안을 거절했다지?”

“아, 지웅 님 말씀이십니까? 부부가 현명한 선택을 했더군요. 저택을 거절하고 수도 외곽에 작은 집과 텃밭을 사서 지낸다고 합니다.”

야닉은 지웅과 상아의 밝았던 표정을 떠올리며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기사 몇 명을 보내서 금화를 좀 더 챙겨 주고 와. 아이가 태어나면 돈 쓸 일이 많아질 테니.”

“직접 가 보시지 않고요? 황, 이안 님께서 가시면 더 좋아할 텐데요.”

야닉은 도열을 갖춰 대기하고 있던 검은 갑옷의 기사단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시커먼 후드를 벗어 종자에게 건넸다.

햇살을 받은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태양처럼 밝게 빛난다.

새하얀 군마에 가볍게 올라탄 그가 저 멀리 보이는 희끄무레한 산등성이를 향해 헤바투스의 머리를 돌렸다.

“하루빨리 돌아가야 해. 요새에 날 기다리는 여자가 있거든.”

로하겔 경은 또다시 시작될 강행군에 앓는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가는 길에 마주칠 마물들이야 야닉이 손가락만 까딱하면 전부 잿더미가 될 예정이니 기사들이 검을 뽑을 필요도 없겠지만, 20킬로에 달하는 갑옷을 입고 하루 종일 말을 타야 하는 그들의 원성은 오롯이 기사단장인 제 몫일 터였다.

어쩌겠는가. 이제 막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 그런 것 따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텐데.

그는 빠르게 포기한 뒤 제 말에 올라타고는 아크만 정예 기사단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델피온을 향해 전력 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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