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01화 (10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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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율이 한 주임의 호위로 임명되기까지는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순식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한 주임의 의견은 묵살되다시피 했다.

루이자는 한 주임의 거처를 임시로 이방인들이 지내는 저택으로 옮기고 이한율에게 밤낮으로 그녀 곁에 붙어 있어 달라 부탁했다.

방을 옮기는 것은 한 주임도 흔쾌히 동의했다.

온종일 본성 이곳저곳을 신나서 뛰어다니는 율리안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착잡하기 그지없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상대로 불쾌함을 느끼는 자신에게 환멸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세레나의 사치병이 도져 하루가 멀다고 본성을 드나드는 상인들을 보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녀가 아크만의 재산을… 정확히는 야닉의 돈을 마음대로 펑펑 쓰고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속 쓰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느 순간부터 세레나는 옷과 보석들을 더는 사들일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공주에게 매달 주어지는 일정의 품위 유지비를 넘어서 사용하려면 야닉의 허가가 필요한 까닭이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웠던 시간만큼 쌓인 예산을 사용하겠다는 발악은 루이자가 무시했다.

루이자는 제 뺨이 닳아 없어질 것을 각오했으나 세레나는 가만히 서서 노려보기만 할 뿐 손찌검을 하진 않았다.

배불리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있으니 갑자기 체면이라도 선 건가. 루이자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성채에서 시가지로 나 있는 내리막길 중간에 지어진 이방인들의 저택은 신축건물답게 고딕 양식을 벗어난 현대식 빌라에 가까운 석조건물이었다.

탑에서는 상상도 못 할 테라스들이 방마다 붙어 있었고, 한국인들답게 바닥에 온돌을 깔아 벽난로 없이도 내부가 훈훈했다.

황궁에서 지냈던 별궁과 비슷한 구조로 지어진 호텔 같은 분위기였기에 그다지 어색하진 않았다.

복도나 저택 앞에서 마주치는 검은 머리, 또는 갈색 염색모가 저만치 아래로 내려온 사람들도 하나같이 한 주임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녀에겐 조금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날도 과한 관심으로 시도 때도 없이 방문을 두드리는 고향 사람들을 피해 한 주임은 일찌감치 피신한 상태였다.

“오늘도 연무장으로 가세요?”

저택을 벗어나자마자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이한율을 보고 그녀는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호위는 정말이지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사미 크랩턴을 보고 루이자가 마음을 써 준 것은 고마울 일이지만, 그게 이한율이라면 사정은 다르다.

하필이면 왜. 왜 이한율이란 말인가.

싱그러운 미소를 보면서도 한 주임은 체한 것처럼 불편한 속내를 감추고 애써 괜찮은 척했다.

“수업 전에 미리 몸 좀 풀어 두려고. 나 때문에 한율 씨가 고생이네.”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뭘.”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까끌까끌해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둘만 있는 게 너무 불편했다.

‘원래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연무장으로 걷는 내내 그는 겨울 햇볕처럼 희고 어딘가 서늘하게 웃고 있었다.

한 주임은 괜히 롱소드 폼멜을 만지작거렸다.

“용병단 일은 빠져도 괜찮아? 나도 어느 정도는 검술을 익혔고, 호위가 무조건 필요하진 않은데….”

“저 하나 빠진다고 문제 될 건 없어요. 블라산코 님도 주임님 수업 때문에 토벌에서 매번 제외되잖아요.”

“으응. 그렇지.”

반박할 거리가 없어서 무안하게 대꾸한 그녀는 보폭을 넓혀 큰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그녀를 이한율은 여유롭게 따라붙으며 고집스럽게 옆자리를 지켰다. 호위란 자고로 두세 걸음 뒤에서 묵묵하게 따라오는 것이 정석 아니던가. 그는 벌써 자격 미달이었다.

옆에 찰싹 달라붙은 이한율은 계속해서 마력은 좀 괜찮냐, 장신구는 얼마나 남았냐, 모자라면 말씀하시라 등의 한 주임을 불편하게 만드는 대화를 끈질기게 이어 나갔다.

그녀가 빨리 걸으면 이한율도 빨리 걷고, 슬쩍 뛰면 그도 같이 뛰었다. 나중에는 뜀박질과 다를 바 없는 속도로 연무장까지 걸어온 두 사람은 동시에 헉헉대면서도 서로 괜찮은 척을 했다.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던 한 주임은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렇다니까. 이거 몇 방울이면 천하의 황태자비도 자빠뜨릴 수 있다고.”

멀지 않은 곳에서 병사 몇 명이 한 사람을 둘러싸고 수상한 열기를 띠고 있다. 그 틈 사이로 보이는 얼굴을 보고 한 주임은 곧바로 미간을 좁혔다.

‘사미 크랩턴. 저 남자가 왜 여기에…….’

창고 앞 낡은 나무상자 위에 걸터앉은 사미가 한 주임을 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병을 품 안에 쑥 집어넣었다.

“자, 자 오늘은 여기까지…. 불청객이 오셨네.”

누가 봐도 꺼림칙한 말을 하고 있는 걸 다 들었는데, 한 주임이 무어라 입을 열던 순간 이한율이 먼저 튀어 나갔다.

그가 사미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병사에게 대뜸 소리쳤다.

“외지인이 함부로 병영에 들어와도 되는 겁니까? 누가 허가했습니까?”

“혀, 현자님. 아닙니다! 저자가 멋대로 들어와서 멋대로 호, 혼자 떠든 것뿐입니다!”

갑작스러운 호령에 병사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마구 내저었다.

“잘만 들어 놓고선, 뭘…….”

사미는 피식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오늘은 영 글렀네. 형씨들, 잊지 말라고. 내가 급하게 온 바람에 물건을 많이 못 챙겼거든. 그런 고로 선착순이란 말씀.”

“어디서 개 오줌으로 사기를 치려고!”

괜히 찔린 병사가 위협적으로 주먹을 들자 사미가 냅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빙글거리는 웃음을 머금고 병사를 피해 빠져나왔다.

“이봐. 진정해. 안 그래도 갈 참이었으니까.”

그러면서도 한 주임을 향해 눈을 찡긋하며 입술을 내밀고 쪽쪽 거리는 시늉까지 한다. 대놓고 희롱을 일삼는 모습에 이한율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그가 분노에 찬 손으로 사미의 어깨를 잡아 돌리려던 순간, 침착한 목소리가 동작을 멈춰 세웠다.

“저기요.”

한 주임이 예리한 눈으로 그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방금 숨긴 거. 꺼내 보세요.”

“응? 뭐라고, 아가씨?”

못 들은 척하는 방만한 태도에 한 주임은 지그시 이를 물었다. 뻔뻔한 작자 같으니라고.

“로브 안에 숨긴 거 보여 달라고요.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요새에 들어오시면 안 되잖아요.”

그녀는 이번엔 허수아비처럼 멀거니 서 있는 병사들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여러분들은 저 사람이 가져온 게 수상해서 모여 계셨던 거 아닌가요? 설마하니 이상한 걸 사려고…….”

“아니, 아닙니다! 저희도 물론 수상해서 검문하려던 참이었어요. 그치? 그렇지?”

속내를 들킨 병사가 황급히 동료들을 끌어들이자 지레 겁먹은 자들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불리하게 돌아가는 형국에 눈알만 굴리던 사미가 돌연 호탕하게 웃었다.

얼굴만 반반한 줄 알았던 이방인에게 한 방 먹은 것이 가학적인 성격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한 주임을 향해 걸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몇 걸음 정도로 가까워지자 이한율이 당연하다는 듯 앞을 막아섰다.

사미는 이한율의 어깨너머로 게슴츠레한 눈을 떴다.

“내가 숨긴 게 뭔지 궁금하면 아가씨가 직접 벗겨 보면 되겠네.”

“말, 조심하세요.”

사미는 고개를 꺾어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이한율을 마주했다.

어디서 꼬리 잘 흔드는 개 한 마리 데려온 모양이지. 그가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키득거렸다.

“검을 찬 걸 보아하니 이방인 아가씨가 재미 삼아 검술 좀 배운 모양인데, 이건 어때? 나랑 저 아가씨가 대련을 하는 거야. 아가씨가 이기면 내가 가져온 걸 군말 없이 내놓지.”

“그게 무슨….”

“그쪽이 이기면요?”

이한율이 반박할 새도 없이 한 주임이 끼어들었다.

사미는 흠. 하고 고민하다가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우리 공주님께서 아가씨가 제법 거슬리는 모양이라, 아크만을 떠나는 건 어때? 내가 로엘에 잘 아는 가게가 하나 있는데 원한다면 소개도 해 줄 수….”

“그럼 내가 이기면 그쪽이 꺼지면 되겠네요.”

이번에도 한 주임이 말을 잘랐다.

“내가 이기면… 그쪽이 멀리 꺼지라고요. 다시는 돌아오지 말고.”

“주임님!”

이한율이 노기 어린 음성으로 소리쳤다.

사미 크랩턴은 기사였다. 루이자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델피온의 왕실 기사 출신이며 세레나의 호위였다고 했다.

이곳에서 기사들은 어릴 때부터 수련을 받으며 종기사와 견습, 수습 기사를 거쳐 정식 기사가 된다.

그 과정만 자그마치 10년이 걸리는데, 다른 말로는 10년이 넘는 기간 내내 검을 끼고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검을 쥔 지 고작 몇 달밖에 안 되는 한 주임이 10년 차 기사를 이길 리 만무했다.

황량한 오전의 연무장 한편에 싸늘한 바람이 휘날렸다.

숙소에서 나온 용병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향해 몰려들었다.

일이 커지리라 예상한 이한율이 다급하게 한 주임의 팔을 붙들었다.

“이런 정신 나간 사람 말은 들으실 필요 없어요! 주임님이 다치시기라도 하면…!”

“괜찮아. 안 져. 제정신이 아닌 사람에게 질 리가 없어.”

한 주임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사미를 자극하는 발언마저 서슴지 않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이번 기회에 세레나의 수족을 치워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망신만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만족스러운 성과일 것이다.

세레나의 얼굴에 먹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한 주임은 그것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연무장엔 용병들과 몇몇 기사들, 구경을 나온 병사들로 제법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한 주임은 그 가운데 스캄이나 블라산코가 있지는 않은지 빠르게 살폈다. 다행히 두 사람은 물론 친분이 있는 신입 용병들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녀는 롱소드를 꺼내 들었다. 사미 크랩턴이 흥얼거리듯 규칙을 정하면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상대의 검을 떨어뜨리거나 항복선언을 받아 내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어느덧 두 사람을 빙 둘러싼 커다란 원이 생겼다. 이들은 걱정스럽거나 재밌는 구경거리를 보는 시선으로 제각기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빠지세요. 제가 제압할게요.”

기대감에 부푼 구경꾼들을 착잡하게 보던 이한율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한 주임은 작게 고갤 끄덕이고는 손잡이를 쥔 오른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께름칙한 얼굴의 이한율이 뒤로 물러서고, 그녀는 이제 사미 크랩턴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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