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02화 (10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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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얼굴에 흉지면 내가 책임져 줄게. 그게 더 자극적일 것 같으니까.”

“약속이나 지켜요. 나중에 딴소리 말고.”

잠깐의 침묵 뒤에 사미가 먼저 달려들었다.

사미의 검은 검신이 가늘고 길이가 긴 델피온의 대표적인 장검으로, 주로 기마병들이 많이 쓰는 바스타드 종류였다. 장검이니만큼 휘두르는 데 속도가 느리게 붙지만 그만큼 파괴력도 강력하다.

한 주임은 눈을 번뜩이며 날아오는 칼날을 받아 냈다. 몸이 절로 휘청일 만큼 드센 공격이었다.

두 검이 처음으로 날을 부딪쳤을 때 공중에 불티가 튀었다. 동시에 한 주임이 왼쪽 다리를 뒤로 빼고 몸을 사선으로 돌렸다.

끼기기긱!

쇠가 긁히는 소리가 고막을 찌르자 군중이 곧바로 귀를 틀어막았다. 해도 너무한 소음에 용병 하나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거 기사 양반, 검 관리를 어떻게 한 거요? 이빨이 다 나간 걸로 무슨 시합을 하겠다고!”

“칫!”

뒤로 물러난 사미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낡은 제 검을 살폈다.

‘한동안 안 썼더니 그새 녹이 슬었나. 바닷바람을 너무 맞았어.’

그는 반대로 후광마저 비치는 한 주임의 매끈한 롱소드를 노려보다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이봐, 아무나 칼 좀 빌려줘라.”

그가 구경꾼들을 향해 대뜸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 남은 기사의 증표다. 한낮 계집과의 심심풀이로 두 동강 내 버릴 순 없었다.

다행히 어딘가에서 브로드 소드 한 자루가 불쑥 튀어나왔다. 사미는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소중한 장검을 검집에 넣었다.

바스타드보다 길이가 짧은 검을 손에 쥔 그는 능숙하게 손목을 돌리며 브로드 소드를 자유자재로 휘둘렀다. 종류에 상관없이 많은 무기를 다뤄 본 솜씨였다.

이전의 장검은 그녀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무기였다. 정확히는 아이노스 식 검법과 상생이 좋지 않았다.

때문에 사미가 무기를 바꾸는 건 그녀로선 반가운 선택이었다. 초조해진 이한율과는 달리 한 주임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검신이 짧아진 만큼 상대의 몸이 가까워진다. 빙글빙글 검을 돌리면서 여유를 부리는 놈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그녀는 타이밍을 기다렸다.

한 주임은 검을 일자로 세우고 다리를 모았다. 왼손은 블라산코가 그랬던 것처럼 허리 뒤로 접어 감추고 중심을 잡았다.

“남부식 검술인가? 계집이나 사내 구실 못 하는 귀족 놈들의 실내운동이라던데.”

한 주임의 자세를 본 사미가 대놓고 낄낄거렸다.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검에 집중했다. 이윽고 그가 다시 땅을 짓치고 돌진했다.

[상대가 여자라면 단순한 놈들은 머리를 쓰지 않아. 그저 힘으로 밀어붙일 뿐이지. 제인은 그걸 명심해야 해.]

블라산코와 검을 겨눌 때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번쩍 떠올랐다.

사미의 검은 공중이나 측면으로만 날아온다. 가볍게 피하거나 옆으로 흘려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몇 번 검끼리 부딪치다 보면 상대는 초조해질 거야. 어? 왜 안 맞지? 왜 안 넘어지지?]

언뜻 본 사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져 있었다. 평정심을 잃고 있는 것이다.

[냉정함을 잃은 검사가 가장 먼저 무너지는 곳은 하체다. 분노와 의욕이 상체에 집중될 때 상대는 중심을 잃는다!]

“이익…!”

사미가 이를 짓씹으며 크게 들이쳤다.

한 주임은 코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날을 확인하자마자 몸을 돌려 그의 무릎 안쪽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크악!”

그가 크게 휘청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사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눈앞엔 이방인이 아니라 메마른 흙이 가득했다.

내가 지금, 땅에 무릎을 꿇고 있는 건가…?

멍하니 넋을 잃고 있던 그의 귓가에 사내들의 야유와 휘파람 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제가 이겼죠?”

그리고 뒤통수에 날아드는 여자의 목소리.

그 소리에 현실로 돌아온 사미가 푸흐흐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검은 아직 내 손에 있고…… 나는 항복선언을 하지 않았어.”

“뭐라고요?”

잘 들리지 않는지 가까이 다가오는 여자를 향해 그는 손안에 가득 움켜쥔 흙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읏…!”

먼지가 뒤섞인 마른 흙을 뒤집어쓴 한 주임이 소매로 눈을 가리고 주춤하는 사이, 사미가 잽싸게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아직 안 끝났다고!”

퍼억!

칼날이 채 닿기도 전에 사미의 몸이 옆으로 거세게 밀려나더니 조금 전에 앉아 있던 나무 상자에 크게 처박혔다.

성인 남성이 날아가다시피 한 충격에 상자가 와지끈 부서지고 자리에 흙먼지가 높이 피어올랐다.

한 주임은 따끔거리는 눈을 힘겹게 뜨고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연방 두리번거렸다.

“끝났어. 인마.”

사미가 원래 있던 자리엔 웬 거한이 서서 풀풀 날리는 먼지를 손으로 걷어 내고 있었다. 덩치만큼 위협적인 발차기가 군중을 일순 침묵하게 했다.

“부대장님!”

누군가 소리침과 동시에 이한율이 다급히 한 주임에게 달려왔다.

“주임님, 괜찮으세요?”

그녀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아연히 스캄을 올려다보았다. 스캄은 구석에 처박혀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사미를 보며 쯧쯧 혀를 차고 있었다.

“재밌는 것 같아서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보자 보자 하니까…. 저딴 놈이 서임을 받은 기사라니, 차라리 홉고블린한테 검을 내리는 게 낫겠구만.”

그러더니 한 주임에게 다가와 집채만 한 몸을 기울였다.

“자빠뜨렸을 때 모가지를 날려 버렸어야지!”

커다란 머리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말하는 모습이 좀 무서워서 그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돌아서서 병사들을 향해 짜증 섞인 어조로 명령했다.

“저기 처박혀서 자고 있는 놈은 데려다가 양 선생한테 던져 줘라. 회복마법도 아까운 놈이야.”

“주, 죽은 건 아니겠죠. 부대장님?”

병사의 호들갑에 스캄이 심드렁하게 귀를 후벼팠다.

“사람 그렇게 쉽게 안 죽어. 뭐… 죽었으면 저놈 명줄이 여기까진 거겠지.”

* * *

아까부터 이상한 진동이 느껴진다 싶더니, 도르르 작은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눈을 뜬 사미 크랩턴은 시야에 한가득 들어오는 까만 밤하늘을 보고 생각했다.

‘……밤인가? 아. 춥다.’

그는 눈을 몇 번 더 깜빡인 다음에야 자신이 웬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일어나셨네요.”

지척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혼미했던 정신이 단숨에 선명해졌다. 사미는 고개를 돌려 제가 누운 병상을 질질 끌고 가는 이한율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너, 너는!”

곧바로 몸부림을 쳤으나 팔다리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갈비뼈가 여러 대 부러져서 부제님들이 일부러 묶어 놓은 거예요.”

차분해도 너무 차분한 목소리가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오밤중에 사지가 침대에 묶여 끌려가고 있는 처지였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침착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뭣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사람이 많은 곳은 그쪽도 곤란할 것 같아서.”

나긋나긋하게 말한 이한율이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 보여 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가 갖고 있던 물약이었다.

“병원에는 본성으로 옮긴다고 말하고 제가 그쪽 데리고 나온 거예요.”

사미는 약병을 보자마자 단박에 긴장감을 풀었다.

“하. 그거였어? 난 또…….”

계집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충성스러운 개인 줄 알았더니, 그냥 발정 난 개였어?

사미는 허무함에 피식거리다가 옆구리에서 전해지는 찌릿한 통증에 안면을 와락 구겼다.

“윽…. 이봐, 아까는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몸이 날아간 다음부터 기억이 아예 없는데. 누가 마법을 쓴 건가?”

“용병단 부대장님이 걷어차서 그래요. 그 자리에서 안 죽은 게 천만다행이었어요.”

“아, 그 거인 야만족. 젠장! 그럴 줄 알았어! 난 고르곤이 달려와서 몸통 박치기라도 한 줄 알았다고!”

사미의 말에 이한율이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대화하는 내내 바퀴가 달린 침대는 꾸준히 어딘가를 향해 굴러가고 있었다. 사미는 싸늘한 바람에 잔기침을 하다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근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그 약이 이렇게 멀리 올 정도로 긴 설명이 필요하진 않은데.”

“거의 다 왔어요. 조용하고 인적 없는 곳.”

자신이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까부터 발가락에 감각이 없는 걸로 봐선 20분은 족히 넘게 바깥에 있었음이 분명했다.

이한율은 매서운 추위에도 한 번도 쉬지 않고 힘주어 침대를 밀었다. 곧이어 깡깡거리는 금속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침대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사미는 문득 불안해져서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물었다.

“정말 약 때문에 날 데려가는 거지……?”

“그럼요. 정확한 효능이랑 용량이 필요하거든요. 주임님한테 조금이라도 해가 되면 안 되니까.”

“그냥 지금 말하면 안 될까?”

“포장길이 끝나서 좀 흔들릴 거예요. 가만히 계세요.”

사미는 어느새 추위도 잊고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굴렸다.

그 와중에도 메질 소리는 더욱 커져서 귀가 울릴 지경이었다. 하도 덜컹거려 속까지 안 좋아질 무렵, 침대가 천천히 멈췄다.

이한율은 한동안 제자리에서 숨을 고르다가 사미를 결박하고 있던 끈을 하나씩 풀었다.

“정확히 무슨 약이에요?”

“아아. 바이킹들한테 구한 건데, 원래는 뱃멀미하는 놈들을 재우는 용도였다는군. 소량만 쓰면 정신을 못 차리는 정도고.”

사미가 욱신거리는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끙,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딱 봐도 안 좋은 일에 쓰기 좋은 물건이잖아? 수도 귀족들은 벌써 알게 모르게 많이들 쓰고 있다고.”

“부작용은요.”

“자주 복용하면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되지.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을 떨고… 한두 번 가지고는 딱히 문제 될 건 없어.”

그 뒤로도 두 사람의 은밀한 대화는 얼마간 더 이어졌다.

어느샌가 사위는 고요해지고 바람이 마른 가지를 스치는 소리, 부엉이가 먼 곳에서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정보를 모두 전달한 사미가 침대보를 벗겨 오한이 든 몸에 두르고 이를 딱딱 부딪치며 물었다.

“그게 내가 아는 전부야. 굳이 산속까지 들어와서 할 얘긴 아니라고. 대체 여기가 어디야? 요새 안에 이런 숲도 있었나?”

“아. 여기.”

이한율의 눈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채로 번뜩였다.

“……네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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