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03화 (10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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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쿨럭! 으…….”

“버러지 같은 새끼가 감히 누굴 건드려.”

옆으로 쓰러져 나뒹구는 침대. 바닥에 엎어져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 내는 남자는 이미 한참 전부터 만신창이였다.

“감히. 하찮은 네까짓 게 감히!”

무자비한 주먹질로 피떡이 된 사미의 고개가 자꾸만 뒤로 넘어갔다.

이한율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저항할 새도 없이 무력하게 얻어맞고 있던 그가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끅끅거렸다.

“이제 보니… 발정 난 개가 아니라… 미친개였네.”

“후우…….”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쓸어 넘긴 이한율이 싸늘하게 답했다.

“그러니까, 얌전히 공주 옆에 붙어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금 크게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엔 이한율도 지쳐서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쪽 때문에 내 계획이 다 망가져 버렸는데…. 어떡할 거예요. 이러면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하잖아.”

“계…획?”

“그쪽이 주임님을 납치하는 걸로 위장하려고 했거든요. 둘이 동시에 사라지면 그게 제일 자연스럽잖아요.”

이한율은 고개를 들어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을 응시했다.

루이자가 자신을 찾아왔던 날, 그녀는 야닉이 한 주임과 결혼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니 황자님이 델피온에서 정리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만 한 주임님을 부탁드립니다. 사미 크랩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꼭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아요.]

[……그렇군요. 그럼 황자님이 돌아오면 두 분은 곧바로 결혼…하나요?]

루이자는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 바로는 안 될 겁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절대,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이한율은 소리내어 웃었다. 반역이라니! 전쟁이라니!

마치 하늘이 저를 돕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실성한 사람처럼 웃다가 돌연 입매를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로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너 때문에 내가 나쁜 놈이 되게 생겼잖아요. 아. 정말로 쓸모없는 새끼.”

“사, 사… 살려 줘…. 제발….”

“그런 말은 주임님 눈에 흙 뿌리기 전에 했었어야지.”

사미는 흐릿한 시야 너머 자신에게 다가오는 악마를 향해 지문이 닳도록 싹싹 빌었다.

“비밀! 비밀을 알려 드릴게요! 세레나! 세레나 그 여자!”

주먹이 허공에서 잠시 멈추는 것을 보고 그가 황급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여자, 황자랑 결혼하기 전부터 애를 배고 있었어요! 율리안이요! 친부는 내 동생이에요. 지미 크랩턴! 그, 그 사실을 황자한테 말하면 큰돈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이한율이 비스듬히 고갤 젖히더니 그래서? 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사미는 태어나 처음으로 절박하게 울부짖었다.

“황자도 자기가 친부가 아니라는 확신은 없을 겁니다. 어쨌든 첫날밤은 치렀으니까요! 당신이 그 말만 해 주면 황자는 손쉽게 세레나를 치울 수 있어요. 워, 원래는 내가 하려고 했던 건데 당신이, 당신이 하면 돼요! 그러면 당신은 어마어마한 부자가… 우웁.”

뒷말은 얼굴을 감싸는 물웅덩이에 가려져 짓뭉개졌다. 그의 입에서 터진 피로 더럽혀진 물에서 부글부글 공기 방울이 끓어올랐다.

“아. 진짜 멍청하네. 황자가 공주랑 붙어먹든 말든, 애 아빠가 누구든 간에 나는 관심이 없다니까?”

그의 얼굴에 대고 마법을 전개한 이한율이 짜증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눈썹을 찌푸렸다.

“돈 같은 건 필요 없다고요. 난 그 여자만 있으면 돼요. 그 여자만!”

끄르륵거리는 소리가 얼마간 이어지다가 이윽고 사미 크랩턴의 몸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 * *

“허억! 헉…….”

번쩍 눈을 뜬 한 주임이 가쁜 숨을 내쉬며 깨어났다.

꺼진 장작에서 나는 희미한 훈연 향이 느껴지지 않는 낯선 공기에 순간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낯선 천장, 낯선 침대 머리맡에 걸린 자그만 포푸리가 반동에 흔들거렸다.

‘맞다. 방을 옮겼지.’

조금 무안해진 그녀는 몸을 일으켜 습관처럼 협탁에 놓인 병을 들어 벌컥벌컥 삼켰다.

“윽! 뭐야.”

물 대신 진한 포도주가 한꺼번에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일어나셨어요?”

미엘라가 가져온 물병을 협탁 위에 내려놓고는 밝게 웃었다.

“사원에서 잘 익은 포도주라고 갖다주셨어요. 주임님이 술을 좋아하시니까 이젠 다위 님 말고도 주임님 품평도 듣고 싶은가 봐요.”

“그래요? 난 술은 잘 모르는데. 먹기만 하지…….”

멋쩍게 이마를 긁적이던 그녀는 몇 모금 더 먹어 보고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기울였다.

쩝쩝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갑자기 테라스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미엘라가 커튼을 활짝 젖히고 있었다.

“본성은 창문이 작았어서 주임님도 이런 눈부신 아침은 오랜만이시죠? 바닥도 따끈따끈하고, 여기 되게 좋은 것 같아요!”

미엘라가 요 며칠 유난히 들떠있다 싶었는데, 밤낮으로 장작불을 피우지 않아도 되니 할 일이 확 줄어든 게 신난 모양이었다.

한 주임은 대낮처럼 환한 방 안을 둘러보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늦잠 자느라 새벽 운동도 못 했네…….”

어제 사미 크랩턴과 말도 안 되는 대련을 한 데다가 그 뒤로 블라산코에게 호되게 혼이 났더랬다.

스승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대련이라니, 펄쩍 뛰는 그에게 어떻게 움직였고 어떻게 이겼는지 한참을 설명하느라 진이 다 빠진 하루였다.

“아, 맞다! 주임님 일어나시면 잠깐 시간 좀 내 달라고 하셨어요.”

“누가요?”

“현자… 아니, 한율 님이요!”

한 주임은 갑작스레 머리가 지끈거렸다. 온종일 붙어 있는 걸로도 모자라 굳이 따로 보자는 요구가 몹시도 부담스러웠던 이유였다.

루이자가 먼저 부탁을 했다고 하니 거절하기도 그렇고, 야닉이 올 때까지는 별수 없이 계속 부딪쳐야 한다는 사실이 암담했다.

그녀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욕실로 향했다. 기분이 우울하니 몸도 같이 처지는 것 같았다.

아래층에 있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한율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눈은 좀 괜찮으세요? 어제 보니까 계속 빨갛던데.”

“금방 물로 씻어 내서 괜찮아.”

애써 웃으며 자리에 앉는데 이한율이 어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문득 그가 앉은 자리 옆에 놓인 커다란 나무상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무슨 일 있어? 어차피 오늘 사원에서 역사 수업받을 텐데 그때 이야기하면 안 되나?”

“……수업은 취소됐어요. 주임님.”

조심스럽게 말하는 음성에 한 주임이 상자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사미 크랩턴 그 사람, 어제 병동을 탈출했대요. 침대 위에 쪽지만 남기고서요.”

“그자가 갑자기 왜? 어제 다친 게 아니었어?”

갑작스러운 소식에 그녀가 불안한 눈으로 이한율을 응시했다.

게다가 쪽지라니. 무슨 말이냐 묻기도 전에 그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주교님한테 회복마법을 받은 모양이에요. 도망치면서 쪽지에다가 자기한테 모욕을 준 이방인 여자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반드시 복수할 거라고 써 놨대요.”

한 주임은 순간 루가 찾아와서 들려준 사미의 일화를 떠올렸다.

[그럼 어떡해. 착하게 굴지 않으면 네 아버질 죽일 거다, 다른 사람한테 말해도 죽일 거다, 내가 죽게 돼도 네 아버지는 죽이고 죽을 거다.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는데.]

사미 크랩턴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한 주임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괜찮아. 회복마법을 받았어도 통증은 남아 있을 거야. 그럼 싸워도 내가… 내가 이길 수 있어. 어제 봤잖아. 내가 이길 거야.”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겠죠. 그런데 주임님도 보셨잖아요. 이상한 약을 들고 다니질 않나, 흙을 뿌리질 않나. 온갖 더러운 짓은 다 할 사람이에요. 정면이 아니라 뒤에서 기습할 게 뻔해요. 어떤 권모술수를 쓰든 간에 주임님한테 해코지하려 들 거고요.”

그가 차분하지만 심각한 어조로 반박했다. 한 주임은 자꾸만 감기는 눈을 힘겹게 뜨며 항변했다.

“나도… 알아. 그치만… 야닉이 돌아올 때까지만 기다리면…….”

“기다려 봤자 아무 소용없어요. 주임님.”

이상했다. 머리가 무겁고 가까이에 있는 이한율의 얼굴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녀는 머리를 한번 세차게 흔들고는 흐릿해지는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손을 들어서 네모난 나무 상자를 가리키고 싶었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근데… 한율 씨 옆에, 그… 상자는 뭐…….”

차마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시야가 명멸하더니 이윽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한율은 맥없이 허물어지는 그녀를 재빨리 부축했다.

“아, 이거요. 주임님이 잠시 계셔야 하는 곳인데…. 산소도 통하고 담요도 깔아 놔서 불편하진 않으실 거예요.”

“놔…….”

이한율이 기분 좋게 웃더니 끝내 의식을 잃은 그녀를 안아 들고 상자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한 번에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역시 운이 좋았다.

“한율 님! 이제 가세요? 주임님은요?”

응접실에서 나오는 이한율을 보고 미엘라가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오늘 사원에서 역사 수업 있는 날이잖아요. 먼저 출발하셨어요.”

그러자 미엘라가 입을 벌리고 아, 맞다! 하고는 계단을 오르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천천히 돌아보는 그녀의 시선이 매끈한 궤짝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이한율은 조용히 등 뒤로 물웅덩이 하나를 만들어 냈다.

미엘라는 커다란 상자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 많은 포도주병을 직접 옮기시려고요? 무거울 텐데.”

후. 긴장감을 누그러뜨린 이한율이 평소와 같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마법사들은 기초체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대서 운동할 겸요. 저는 그럼 다위 님한테 마저 가 볼게요.”

“주임님도 그렇고, 사자님들은 정말 부지런하시네요!”

감탄인지 진절머리가 나는 건지 모를 얼굴이었다. 가볍게 조소한 그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것을 물었다.

“아 참. 주임님이 새 포도주를 좀 드셨나요? 깜빡하고 그걸 안 물어봤네요. 사원에서 주임님 감상평을 꼭 좀 들려 달라고 했는데.”

미엘라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술은 주임님도 잘 모르신대요. 그래도 한 잔 정도는 드신 것 같아요.”

“아아. 그래요. 한 잔이면 네 시간 정도였나…….”

들릴 듯 말 듯 뒷말을 흘린 그가 포도주 상자를 들어 수레 위에 조심스럽게 올리고는 밖으로 밀고 나갔다.

오늘따라 유난히 맑은 하늘에 콧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졌다. 그가 미리 매어 놓은 말에 수레를 연결했다.

“이제 우리 어디로 갈까요? 주임님은 추위를 많이 타니까, 아무래도 따뜻한 곳이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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