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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은 며칠 전부터 싸 놨고 먹을거리는 어젯밤에 얼추 마련했다. 취발론 산은 한 번밖에 지나온 적 없지만, 사람들이 오가며 낸 길을 따라 이동하면 될 테니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한율은 설레는 마음으로 말에 올라 성채를 빠져나왔다.
“현자님 아니십니까? 어디 여행이라도 가세요? 짐이 꽤 많으시네요.”
내성 관문을 지키는 병사 중에 안면이 익은 자가 반갑게 말을 걸었다.
“여행이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요새 밖에서 마법 훈련을 좀 하려고요. 아무래도 연무장을 혼자 쓰기도 그렇고, 다른 분들한테 피해가 될 것 같아서.”
“하하하. 현자님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일행 없이 혼자 나가십니까?”
“아. 네. 문제가 됩니까? 단장님한테 허락은 받았습니다만.”
묘하게 차가운 음성에 병사가 움찔하더니 금방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이한율은 대답도 없이 열린 철문 사이로 말을 몰았다. 외방벽 성문에서도 비슷한 거짓말을 늘어놓고 도개교를 건널 때쯤엔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드디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어.’
등 뒤로 아크만 요새의 거대한 회색 방벽이 작아질수록 그의 얼굴에 비친 희열은 반대로 점점 커져만 갔다.
그는 취발론 산을 향해 힘차게 말을 몰았다.
* * *
덜컹!
바닥이 한 번 크게 들썩거렸다. 반동에 튀어 오른 몸이 단단한 판자에 부딪히는 충격에 한 주임이 번쩍 눈을 떴다.
“흐으……!”
어둠, 거친 숨소리, 바퀴가 구르는 소리, 진동에 잘게 흔들리는 몸.
웅크리고 옆으로 누워 있는 상태로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고, 입에는 돌돌 말린 천이 재갈처럼 물려 있었다.
구부린 몸을 뻗어 봤지만 사방이 막혀 있어 꿈틀거리는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그녀는 심장박동만큼이나 빠르고 짧게 터지는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눈을 굴렸다.
‘……이게 뭐지? 분명히 조금 전까지 응접실에서….’
혼란스러운 기억을 더듬어가던 그녀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한율의 얼굴을 떠올리고 곧장 빳빳하게 몸을 굳혔다.
[근데… 한율 씨 옆에, 그… 상자는 뭐…….]
[아, 이거요. 주임님이 잠시 계셔야 하는 곳인데…. 산소도 통하고 담요도 깔아 놔서 불편하진 않으실 거예요.]
쓰러지기 직전 봤던 커다란 상자에 자신이 누워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침착해. 침착해야 해.’
한 주임은 오로지 그 말만을 뇌까리며 파들파들 떨리는 몸과 마음을 붙잡았다.
이성을 되찾은 머리와는 반대로 덜덜 떨리는 턱과 손은 한참이나 말을 듣지 않았다.
눈을 감고 얼마간 숨을 고른 후에야 겨우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양쪽 손목이 묶인 상태로 그녀는 단단히 물린 재갈을 턱 아래로 끌어내렸다.
몇 번이고 손이 미끄러진 탓에 입술이 거친 천에 쓸렸다. 그러나 얼얼함을 느낄 겨를은 없었다.
이번에는 이로 손목에 묶인 밧줄을 끌렀다. 크고 작은 덜컹거림이 몇 차례 지난 후 헐거워진 두 손이 자유로워졌다. 상자가 비좁아 다리까진 손이 닿지 못했다.
한 주임은 머리 바로 위에서 가느다랗게 새어 들어오는 빛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홀린 듯이 틈새를 찾아 손가락을 밀어 넣다가 열리지 않자 손톱으로 까득까득 나뭇결을 긁었다.
조금 전부터 울퉁불퉁한 길로 들어섰는지 말발굽과 바퀴 소리가 커져서 그녀가 내는 소음은 자연스레 묻혔다.
“……!”
손톱이 깨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갉아 대던 와중 달리던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재갈을 다시 입에 물고 양손을 가슴에 모았다.
처음 눈을 떴던 자세로 한껏 몸을 움츠리고 있을 때 흔들거림이 완전히 멈췄다.
극도로 예민해진 귀에 누군가 말에서 내려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소리가 포착됐다.
발소리만 들어도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한율.
그가 천천히 가까워지더니, 상자에 감아 놓은 줄을 다시 한번 단단히 동여매고 있었다.
“이제부턴 산길이라 많이 흔들릴 거예요. 조금만 참으세요, 주임님.”
그는 허리를 굽혀 상자 위에 가만히 귀를 댔다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에 안심한 듯 멀어져 갔다.
수레가 다시 출발하자 한 주임은 고요히 눈을 떴다. 그녀는 열심히 긁어 놓은 나무 거스러미 사이로 조금 넓어진 틈에 머리를 최대한 가까이 붙였다.
작은 틈새로 보이는 것은 그저 어두침침하게 눈 쌓인 길과 새까만 고목들이었다. 산으로 들어서자마자 어둡고 축축해지는 것은 전에도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다.
희미하게 풍기는 물안개 냄새까지 더해지자 이곳이 취발론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뚜껑을 줄로 묶어 놓은 것 같은데, 어떡하지…….’
한 주임은 밧줄을 오른손에 단단히 감고 숨죽여 때를 기다렸다. 웅크린 몸이 겨우 들어갈 만큼 좁은 상자라 자력으로 부수고 나갈 수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얼마나 더 지났을까, 희미하던 빛마저 사라지고 완연한 어둠이 좁은 공간에 한가득 들어찼다.
앞이 보이질 않으니 시간이 얼마만큼 흘렀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산길을 오르는 동안 이따금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한율은 취발론을 안전하게 건너는 주의사항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잊지 않고 지켜 나가는 중이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도 무시해라, 음식은 바깥에서 챙겨 온 것만 먹어라, 아름다운 것을 따라가지 마라, 환상에 빠지면 최대한 빨리 깨달아라.
가끔 이한율이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긴 했어도 그는 곧잘 위기를 넘기며 나아가곤 했다.
차라리 그가 산이 놓은 덫에 걸리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기엔 이한율은 너무나 침착했고 이성적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자에 꼼짝없이 갇힌 그녀에게는 환청도, 환각도, 전혀 찾아오지 않았다.
수레가 다시 멈추었을 땐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풀벌레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한밤중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이한율이 말에서 내리더니 혼잣말을 하며 다가왔다. 한 주임은 긴장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너무 오래 주무시는 것 같은데 일어나서 뭐라도 좀 드셔야….”
메어놓은 줄이 풀리고 궤짝이 열리는 순간, 한 주임은 있는 힘을 다해서 주먹을 내질렀다.
“윽!”
방심한 사이 얼굴에 정통으로 린치를 당한 이한율이 코를 잡고 비틀거렸다. 한 주임은 그대로 수레 아래로 넘어져 흙바닥을 굴렀다.
여전히 다리가 묶인 데다 종일 한 자세로 누워 있어 하반신 전체에 쥐가 나 제대로 설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픈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다리를 묶은 줄을 풀고 엉금엉금 기었다.
굳은 팔다리를 마구 저으며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정도 지나자 발목에 힘이 돌아왔다.
허공을 기어오르는 사람처럼 몸을 일으킨 한 주임은 본능적으로 수풀 사이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얼마 가지도 못하고 힘이 풀린 다리가 앞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시커먼 땅이 코앞까지 들이닥치려던 찰나, 갑자기 지면이 멀어지더니 몸이 공중에 붕 떠올랐다.
“이거 놔! 놓으라고!”
한 주임이 목 아래서부터 물에 잠긴 몸을 허우적거리면서 공중에서 극렬하게 발버둥 쳤다.
손등으로 코피를 대강 훔쳐 낸 이한율이 다른 손으로 마법을 조종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주먹질은 진짜 생각도 못 했어요. 와.”
얼얼한 제 코가 신기하기라도 한 듯 황당한 웃음을 머금은 그가 허리춤에 피를 쓱쓱 문질러 닦았다.
“갑자기 뛰시면 어떡해요, 주임님.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잖아요. 저는 아직 치료마법은 못 쓴단 말이에요.”
단장님도 데려올 걸 그랬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지척까지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이한율의 까만 눈동자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사람 같았다. 눈빛과는 대조적으로 묘하게 일상적인 말투가 그를 더욱 미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한 주임은 급격하게 올라오는 구토감을 눌러 앉히고 밭은 숨을 갈무리했다.
“한율 씨.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던 걸로 할게. 맹세도 할 수 있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차분함을 가장했으나 이한율은 별 시답잖은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로 고개를 잘게 털었다.
“제가 그렇게 바보로 보이세요? 하긴…. 평소에 제가 좀 덜떨어진 이미지긴 했죠? 어리바리하고, 느리고, 답답하고.”
그가 남 일인 양 웃으며 한 주임을 얌전히 바닥에 내려놓고는 한 번의 손짓으로 물을 전부 날려 버렸다.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그녀의 피부에 젖은 옷이 무겁게 달라붙었다.
팔로 몸을 감싸는 그녀를 안쓰럽게 보던 이한율이 그녀가 누웠던 궤짝에서 모포를 꺼내와 어깨에 빙 둘러 주었다. 그 노골적인 위선에 소름이 끼쳐 한 주임은 눈을 부릅떴다.
제가 보고 있는 한은 도망칠 수 없다는 걸 몸소 보여 준 그가 다시 수레를 향해 몸을 돌렸다.
“덮고 잘 건 그거 하나 남았으니까 남은 거마저 적시기 싫으시면 이쪽으로 오세요. 주임님 오늘 하루 종일 포도주 말곤 아무것도 못 드셨어요.”
“……뜨거운 바람 만들 수 있잖아.”
노려보며 던진 말에 그가 뻔뻔하게 어깨를 추켜올렸다.
“글쎄요? 전 물 속성이라서요.”
한 주임은 길게 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걸었다.
질척한 옷이 발목을 붙잡는 것 같은 참담한 심경이었다. 어쩌다 갑자기 이렇게 된 걸까.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었고, 모든 일이 느닷없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180도 변할 수가 있는 일인가?
갑자기 왜? 뭐 때문에? 하필 나를?
“포도주에 뭘 탄 거야…?”
다른 것은 전부 차치하고, 그녀는 일단 상황 파악이 먼저라 판단했다.
도망가지 않는다. 무서워하지 않는다. 공격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만 그에게 인식시킨다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이다.
이한율의 태도로 봐서는 자신을 해코지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니 얌전히 따르는 척, 성에서 사람들이 구하러 와줄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사미 크랩턴이 가지고 있던 약을 썼어요. 어디 불편하진 않으시죠? 중독만 아니면 별다른 증상은 없을 거라 그랬거든요.”
가방에서 호밀빵과 말린 아로니아 꾸러미를 꺼낸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그녀를 이리저리 살폈다.
걱정하는 척하는 시선이 역겨워 한 주임은 몸을 돌려 가까운 나무 밑동 아래 털썩 주저앉았다.
모포를 턱까지 끌어올리고 보호막처럼 두르고 있는 그녀에게 이한율이 음식을 가지고 다가왔다.
“좀 드세요. 다 드시면 옷 말려 드릴게요.”
“사미 크랩턴,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병동을 탈출한 게 맞긴 해?”
달갑지 않게 빵을 받아 들고 묻는 말에 이한율의 얼굴에서 온기가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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