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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알아서 뭐 하시게요. 더는 주임님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
“……알겠어.”
한 주임은 빵을 손으로 작게 뜯어 우물거리는 척하다가 가루를 내어 바닥에 뿌렸다. 그러면서 이한율이 볼까 싶어서 얼른 다른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럼 날 납치… 데리고 나온 이유가 뭐야.”
“말씀드렸잖아요. 사미 크랩턴이 해코지할지도 모른다고요. 그리고 저도 집사장님한테 들었어요. 조만간 아크만에 군대가 들이닥칠 거라면서요?”
집사장님이 그것까지 이야기했다니…….
한 주임은 절망감에 뒤통수를 나무 기둥에 쿵쿵 찧었다. 곧바로 말리려는 듯이 다가오는 손바닥을 반사적으로 뿌리치자 이한율이 안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크만은 당분간 위험하니까 피신해 있는 게 좋겠어요. 그 과정에서 부득이한 방법을 쓰게 된 점은 저도 안타깝게 생각해요.”
그는 말하면서도 불쑥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주임님도 요즘 절 계속 피해 다니셨잖아요. 이건 전부 주임님이 자초한 일이에요.”
그를 자극하면 안 된다. 한 주임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 속에서도 그것만은 잊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 오늘은 일찍 주무세요. 빵도 버리지 말고 드시고요. 약은 안 넣었어요.”
감정을 추스른 이한율이 순순히 몸을 물리며 수레 쪽으로 멀어졌다.
그녀는 손에 잡히는 뾰족한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어 주머니 안에 넣고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일반적으로 취발론을 넘는 데는 사흘, 길면 나흘은 걸린다고 했다.
요새에서 산 입구까지 말을 타고 곧장 달리면 두 시간 남짓한 거리. 지금쯤이면 본인이 사라진 걸 요새에서 알아챘을 것이다.
어영부영 오늘을 흘려보내고 내일 아침 수색대가 출발한다고 치면, 수색대와 자신의 거리는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넘는다.
최대한 산에서 시간을 끌어야 했다.
취발론을 벗어나면 제국을 넘어 어느 곳이라도 이동할 수 있다.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어지기 전에 이한율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한 주임은 멀지 않은 곳에 텐트를 설치하는 이한율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억지로 빵을 씹어 삼켰다.
이한율은 두 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텐트를 친 뒤 한 주임에게 고갯짓했다. 젖은 옷을 입은 채로 들어가자 그가 따라 들어오더니 뜨거운 바람을 일으켰다.
문득 야닉이 폭포에서 옷을 말려 주던 것이 떠올라 울컥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주먹을 쥐고 힘겹게 눈물을 삼키며 버텼다.
이한율은 아무 말 없이 옷을 말려 주고는 다행히도 밖으로 나가 버렸다.
추위와 공포, 달빛마저 차단된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한 주임은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하는 절실한 마음으로 한껏 몸을 웅크렸다.
“야닉…….”
그날 밤은 한 주임도, 밖에서 텐트만 주시하던 이한율도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 * *
“주임님, 일어나셨어요? 이제 출발할 거예요. 나오세요.”
여명도 밝기 전에 이한율이 텐트 입구를 두드렸다.
그가 갑자기 들이닥칠까 봐 밤새도록 입구만 노려보던 한 주임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밖으로 기어 나갔다. 무거운 모포를 둘렀어도 어깨가 잘게 떨려 왔다.
이제는 날씨 때문인지 마력 때문인지 구별이 가능했다. 코끝이 시리면 추위, 손끝이 떨리면 마력 고갈이다.
그녀는 들키고 싶지 않아 부러 주먹을 말아 쥐고 이한율을 지나쳐 수레에 올랐다.
날랜 동작으로 서둘러 텐트를 접은 그가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마력 받으셔야죠.”
“……아직 괜찮아.”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다소 냉랭하게 거절하는데 커다란 손이 갑작스레 뺨에 닿았다.
“뭐 하는…!”
피할 겨를도 없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이한율이 위협적으로 을러댔다.
“익숙해지세요. 앞으로는 계속 저한테 받으셔야 하니까요.”
“하, 하지 마!”
다급하게 팔을 잡아끌었지만 억센 손아귀는 꿈쩍도 하지 않고 볼을 짓누르며 그녀를 꽉 옭아매고 있었다.
“아. 이런 거였군요. 이런 기분이었어.”
그가 눈을 감고 희열에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한율에게서 흘러들어 오는 마력이 붙잡힌 곳부터 시작해 전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항상 녹아내릴 듯 황홀했던 따스함이 아닌 스멀거리는 음습한 기운이 온몸을 뒤덮는다.
욕망에 찬 열기가 해일처럼 그녀를 덮치자 남아 있던 야닉의 기운이 서서히 잠식되어 갔다.
“싫…어, 제발…….”
사라지지 마. 남은 거라곤 그 사람 하나뿐인데, 그의 마력 한 줌뿐이었는데. 제발 뺏어 가지 말아 줘.
입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말 대신 눈물 한줄기가 이한율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흐느끼는 여자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안타까움 대신 희열과 정복감, 그리고 성취감을 느꼈다.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한 마리의 짐승과도 같았다.
“우리는 운명인 게 틀림없어요. 그게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어요. 현자님이니 뭐니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게 전부 역겨웠는데,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한 거였어요.”
“…….”
한 주임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붙잡고 있던 팔에서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고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가만히 괴물을 응시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불쾌한 기분은 곧바로 육체에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웁…! 우욱!”
그녀는 급속도로 올라오는 구역질에 허겁지겁 그를 밀치고 바닥에 엎드렸다. 고양감에 휩싸여 있던 이한율이 놀라 서둘러 그녀의 등을 두들겼다.
저녁에 조금 먹었던 음식물과 신물이 함께 올라와 한 주임은 고통스럽게 몸을 들썩였다.
감정적인지 생리적인지 모를 눈물로 시야가 흐려지고 속이 뒤집혔다. 와중에도 그녀는 시간을 벌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참을 그 상태로 있었다.
불규칙한 숨이 점점 안정을 되찾자 이한율이 품에 차고 있던 수통을 건넸다.
“갑자기 놀라셔서 그래요. 물 좀 드세요.”
크게 동요하지 않는 담담한 말투였다. 그사이 몸을 추스른 한 주임이 가죽 주머니를 받아 입을 헹구고 목을 축였다.
“…마나가 섞여서 그래. 야닉의… 다른 사람과 섞이면 멀미감이 들어.”
소매로 대충 입을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얼른 부축했다. 한 주임은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손을 올려 팔을 붙들었다.
“조금만. 조금만 쉬었다가 가. 곧바로 움직이면 속이 더 안 좋아.”
순종적으로 말하고 몸을 기대자 작게 움찔한 그가 고민 끝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5분만 쉬어요, 그럼.”
이한율은 수레 위에 모포를 깔고 그녀를 앉힌 뒤 다시 짐꾸러미를 뒤적거렸다.
“급하게 나오느라 식당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가져와서 음식이 좀 부실해요. 그래도 빈속보단 나을 테니 뭐라도 좀 드세요.”
묘하게 들뜬 음성으로 먹을거리를 꺼내는 그를 힐끗 보던 한 주임은 조용히 주머니에서 빵 조각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제발 누군가 발견해 주기를. 제발.
“……한율 씨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
“저요? 아니요. 제가 왜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돌아오는 답변에 그녀는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니, 의미심장한 답변이었다.
“불편하잖아. 부모님이나 친구들도 보고 싶을 거고….”
“부모님 안 계세요. 친구도 그닥.”
빳빳한 모직에 감싼 커다란 치즈 덩어리를 꺼내며 그가 여상히 대꾸했다.
부모님이 안 계셨구나. 그녀는 별 감흥 없이 빵 부스러기를 조금 더 흘렸다.
“왜 안 계시는데?”
“처음부터 없었어요. 저 보육원 출신이거든요.”
그의 말에 손이 멈칫했다.
이한율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치즈를 자르고는 조심스럽게 빵 위에 올렸다.
“주임님 모르셨구나. 제 이력서 보신 적 없으신가 봐요. 자소서에 써 놨고 부모님 칸도 공란이었는데. 자, 좀 드세요.”
“……안 봤어.”
망설이다가 빵을 건네받고 중얼거리자 그가 가볍게 웃었다. 어쩐지 위화감이 드는 미소였다.
“저 군대도 안 갔어요. 사회복무였는데, 그건 공 대리님 때문에 알고 계셨죠? 툭하면 공익 어쩌고 떠들어 댔으니까.”
“아. 어…….”
이한율이 제 몫의 빵을 크게 한입 베어 물더니 단검을 든 손으로 왼쪽 가슴을 툭툭 건드렸다.
“어릴 때 수술을 받았거든요. 여기, 심장 쪽에.”
“그건… 들어서 알고 있었어.”
무안해서 고갤 돌리는데도 그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선천적으로 안 좋아서 주변에서는 제가 성인이 되기도 전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수녀님도, 보육원 선생님들도 다들 저만 보면 불쌍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는데… 당사자인 저는 어땠겠어요.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지옥이었죠. 나는 언제쯤 죽을까, 고통스럽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만 하던 우울한 청소년이었어요.”
산뜻한 말투와는 달리 무거운 눈빛이었다.
“수술만 받으면 살 수 있다고 했는데, 보육원에서 모금한 돈을 말단직원이 들고 날랐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느꼈죠. 아. 세상은 정말 X 같은 곳이구나.”
이한율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빵을 우그러뜨렸다. 후드득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처럼 그의 감정 한구석도 어딘가 무너져 내린 듯했다.
공허했던 눈빛에 생기가 돈 것은 그때였다.
“전부 포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제 인생에 구세주가 등장했어요. 누가 제가 있던 보육원에 기부를 했다는 거예요. 덕분에 기적적으로 수술을 받을 수 있었고요.”
어딘가 낯설지 않은 이야기에 한 주임은 그대로 몸을 굳혔다.
맥박이 불안하게 빨라지고 있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입이 의미 없이 뻐끔거릴 때쯤.
“기부자들은 보통 익명이 많은데, 그분은 기사를 내는 게 목적이었던 유명 인사여서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어요.”
“저기, 한율 씨.”
“고맙단 말을 꼭 하고 싶었는데… 그분이 갑자기 은퇴하더니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계속 인사를 못 드렸네요.”
손에 들린 빵이 속절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그녀의 표정 위로 예기치 못한 혼란이 피어났다.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한율의 표정이 기이할 정도로 밝아졌다.
“……제가 주임님을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이제야 겨우 말할 수 있게 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들은 것처럼 그녀는 중얼거렸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송이 누나.”
어스름한 새벽빛이 두 사람 주위를 재앙처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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