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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06화 (106/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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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오해가, 네가 이상한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한 주임은 황망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아니야. 저 애가 왜. 어째서.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을 가져다 대는데 시야가 떨리는 건지 손이 떨리는 건지 모를 현기증이 일었다.

바닥을 짚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 상체가 흔들리자 이한율이 잽싸게 그녀를 붙잡았다.

“한재인 주임님. 정신 차리세요.”

단호한 음성으로 눈을 맞춘 그가 옷 위로도 느껴지는 가느다란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플 정도로 양팔을 꽉 잡은 탓에 한 주임이 작게 신음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빠르게 제정신을 찾은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밀어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날 누구와 착각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망상은 정도껏 해.”

“…….”

차가운 반응에 다소 얼떨떨한 얼굴을 하던 이한율이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고 걸터앉은 그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주임님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전부 이해해요. 많이 힘드셨겠죠. 누구라도 그랬을 거예요.”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 닮은 얼굴, 비슷한 이름, 같은 나이 정도는 흔한 일이야. 충분히 헷갈릴 수 있어.”

한 주임은 표정에 서린 당혹감을 지우려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이한율에게는 그조차도 서투른 변명처럼 들린 걸까, 그는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는 듯이 말을 잘랐다.

“수술받고 건강이 회복된 다음에 제가 가장 먼저 뭘 했는지 아세요? 새 생명을 준 사람에 대해 미친 듯이 찾아봤어요. 한송이 선수가 출전한 대회, 기사, 인터뷰, 방송…….”

즐거웠던 과거를 회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뜬 목소리였다. 그러나 상기된 얼굴과는 달리 목소리는 점차 스산해졌다.

“한송이 선수가 자란 보육원, 명예 훼손으로 고소한 사람들, 법정대리인을 자처했던 코치, 들러붙은 사기꾼. 그 개XX들…….”

“그만해!”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내자 문득 이성이 돌아왔는지 그가 멋쩍게 웃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가 활을 쏘는 그 강렬한 눈빛에 빠져서 스토커처럼 파헤쳤어요. 은퇴한 사정을 알게 된 후엔 제 가슴이 다 찢어질 것처럼 아팠고요.”

말하면서도 감정이 올라오는 듯 이한율은 숨을 크게 한번 고른 후 말을 이었다.

“좀 더 일찍 찾았더라면 좋았을 걸, 정말 감쪽같이 행적을 감추셨더라고요. 무려 10년이나 못 찾고 헤맸거든요. 그만 포기할까도 생각했는데 갑자기 기적 같은 일이 또 한 번 일어났어요.”

한 주임은 이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수그렸다.

턱이 덜덜 떨리고 목덜미가 축축해졌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내리는 감각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거짓말이야. 전부 지어낸 말이야.

이한율은 무심코 들어갔던 카페에서 ‘한재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직원을 보고는 그때 처음으로 운명을 느꼈다고 했다.

기관으로 출퇴근을 하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유리창 너머 그녀를 지켜봤고, 한재인이라는 여자가 한송이라는 데 점차 확신을 가졌다고도 했다.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주임님이 보이지 않길래 다른 직원한테 물어보니까 본사로 옮기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복무기간이 끝나자마자 채용공고가 올라오길 기다렸다가 얼른 입사했어요.”

말을 마친 그는 새 빵을 꺼내 똑같이 치즈를 얹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거기다 말도 안 되는 세상에 떨어진 것까지. 이 정도면 하늘이 제 편인 게 확실하죠?”

환희에 찬 눈빛에 광증이 함께 희번덕거렸다.

“거짓말이지……?”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낯선 얼굴을 향해 비참하게 물었다.

그렇게 도망쳤는데, 모두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한송이는 제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발목을 잡고 있던 족쇄 같던 손은 끈적거리며 다리를 타고 올라와 가슴을 뒤덮고 턱 끝까지 옥죄여 왔다.

한 뼘 가까이 이한율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있던 그녀는 초점 잃은 눈을 멍하니 깜빡거렸다. 모든 것을 포기한 눈에서 툭툭, 굵은 물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이한율이 창백한 뺨을 감싸더니 엄지로 눈물을 훔치며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송이 누나는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쭉 내 거였어요. 그러니까 아무한테도 안 줄 거예요.”

* * *

「일어나, 이방인.」

「이번에는 꼭 우리를 찾아와.」

수레에 기대앉아 선잠이 들었던 한 주임은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에 스르륵 눈을 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더라.

그녀는 이틀 전 이한율에게 자신이 한송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부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덜그럭거리며 산길을 가로지르는 수레바퀴처럼 그녀는 아무런 의욕 없이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기곤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그가 주는 대로 먹고, 마시고, 자면서 머릿속을 텅 비워 내자 차라리 마음이 고요해졌다.

‘그냥 이대로 사라졌으면.’

한 주임은 머릿속에서 연신 떠들어 대는 페어리들의 음성을 무시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우리는 위대한 숲의 정령.」

「우리는 고귀한 마나의 주인.」

「우리는 고대의 유산이자 생명의 시초.」

‘시끄러워.’

성가신 소리라도 되는 것처럼 짜증 섞인 속마음이었다. 마음속으로 말해도 어차피 다 들을 테니 그녀는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곧 세피로트의 영역이야.」

「너는 환상에 걸리지 않으니까 그때 도망치면 돼.」

「그리고 우리에게 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전부 다 귀찮아졌어. 날 내버려 둬.’

「우리가 도와줄게.」

‘도와? 날? 내가 도움이 필요했나…. 이젠 잘 모르겠어.’

「널 찾고 있는 인간들이 근처에 있어.」

그 말에 반사적으로 눈이 번쩍 뜨였다. 한 주임은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켰다가 앞에서 말을 몰고 있는 이한율의 등을 보고 황급히 주저앉았다.

‘누가? 누가 날 찾아? 그 사람들 지금 어딨어?’

급격히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겨우 추스르고 그녀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쿵쾅거리는 심장과 가빠오는 숨을 틀어막고 새소리 하나 없는 적적한 숲길을 둘러보는데, 사람들의 기척이 아닌 희미한 양 울음소리만 대신 들렸다.

「세피로트의 영역에서 벗어나면 곧장 우리에게 와야 해.」

「양치기가 돌아다니고 있어. 조심하는 게 좋아.」

「명심해. 누구와도 말을 섞지 말고 곧바로 우리를 찾아와.」

‘너희는 어디 있는데? 난 길을 못 찾아. 너희가 어디 있는지 몰라!’

입술을 꽉 깨물고 물어봤지만 전에도 느껴 본 적 있는 스파크가 또다시 머릿속에서 터졌다. 페어리들과의 신호가 끊긴 것이다.

그녀는 지끈대는 머리를 붙잡고 매서운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앞에서 무언갈 발견한 이한율이 서서히 속도를 늦추더니 이내 멈추고 말에서 내려왔다.

“주임님, 그 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했어요. 환각을 일으키는 나무요.”

그는 궤짝을 묶어 두었던 밧줄을 풀어 자신과 한 주임의 손목에 단단히 묶기 시작했다.

“안 그러실 거라고 믿지만, 주임님은 전에 왔을 때 환상에 빠지지 않았으니까.”

“…….”

한 주임은 말없이 손을 내주고는 바싹 마른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얌전히 자신을 따르는 모습에 방심한 나머지 이한율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제 소지품을 뒤지지 않은 것.

그녀는 일전에 주머니 속에 챙긴 뾰족한 돌의 존재감을 상기하며 억지로 입매를 끌어올렸다.

“다른 사람들도 어쩌면 내가 한송이라는 걸 알지도 몰라. 그러니까 너랑 같이 떠날 거야. 걱정하지 마.”

“저 버리고 가면 안 돼요.”

이한율은 짐짓 장난스럽게 웃으며 매듭을 꽉 조였다. 그도 자못 긴장되는지 가슴을 부풀리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수갑처럼 밧줄에 연결된 상태로 푸른 잔디밭에 동시에 발을 내디뎠다.

한 주임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씩씩하게 걸었다.

이한율이 환각 속에서 허우적거리면 곧장 바닥에 앉혀서 돌로 밧줄을 끊고 도망치면 되는 아주 간단한 계획이다.

혹시라도 줄이 질겨 안 끊어졌을 땐 세피로트에게 부탁하면 어떻게든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지난번 세피로트는 자신에게 무척 관대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다음에 또 오면 길을 안내해 준다고도 했으니, 그의 도움을 받아 페어리를 찾아가면 된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어.’

한 가닥 남은 기회에 그녀는 모든 희망을 걸었다.

몇 걸음 더 나아가자 초원의 고목들이 하나둘 뿌리를 딛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본 적 있는 짙푸른 초록색의 잎사귀가 천천히 바닥에서 위로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환각을 일으키는 나뭇잎이었다.

- 깨닫지 못한 자는 영원히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반가운 세피로트의 목소리였다.

‘됐어!’

경이로운 존재인 숲의 파수꾼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눈앞이 어지럽게 팽팽 돌았다. 이한율에게 몰려들어야 할 잎사귀들이 돌연 그녀의 코앞에서 회오리치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녀는 벗어날 틈도 없이 환상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잠시 후 굵고 거대한 뿌리를 다리처럼 일으켜 세운 세피로트가 천천히 걸어오더니 한 주임의 앞에 서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세피로트는 본 적이 있는 방문객을 허리를 굽혀 유심히 보다가 기억이 난 듯 나무 기둥을 꼿꼿하게 세웠다.

- 오, 이제야 알겠어. 누군가 했더니 욕망이 없던 이방인이었군.

그는 메마른 잔가지를 연신 떨어뜨리며 손가락처럼 한 주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닿을 듯 말듯 길게 훑어내렸다.

- 흐음… 음. 그래. 잠깐 사이에 원하는 것이 생겼구나…. 안타까운 일이야, 안타깝고말고. 인간이란 하나같이 비슷하단 말이지.

취발론의 파수꾼은 뒷걸음질로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며 흙더미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 나는 내 역할에 충실할 뿐… 꿈에서 깨어나는 것은 너의 몫이다. 먼 곳에서 온 자여.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피로트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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