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07화 (107/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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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한 주임은 발밑이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무(無)의 공간은 신기하리만치 평온했다.

이곳은 춥지도 않고 시끄러운 사람들도 없고, 골치 아플 일도, 속상할 일도 없다.

고요히 걷기만 하면 모든 상념이 사라지는 안온한 세계를 그녀는 쉼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저 멀리서 노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빛은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커져서 나중에는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그녀는 그 안에서 한 남자를 보았다.

등을 돌리고 있던 남자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돌아보더니 심장이 아릴 만큼 근사하게 웃었다.

한 주임은 그리웠던 찬란한 금색 눈동자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갔다. 야닉이 기꺼이 맞이하며 녹을 듯 감미로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많이 기다렸어? 늦어서 미안해.’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졌어.’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던 두 사람은 이제 다른 연인들처럼 다정하게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그 길은 고즈넉한 숲이었다가, 한갓진 해변이었다가, 늦은 밤 가로등 켜진 골목길이 되기도 했다.

어디든 좋았다. 이 손을 놓지만 않는다면 어둠 속을 걸어도 영원히 눈부실 것이다.

한 주임은 간신히 찾아온 행복에 온몸을 내던졌다.

‘아, 참. 세레나는 제대로 정리가 된 거야?’

불현듯 떠오른 존재에 퍼뜩 물었더니 야닉이 아리송한 얼굴로 되물었다.

‘세레나? 그게 누구지? 처음 들어 보는데. 이름이 뭐라고?’

‘네 부인이었잖아. 그러니까 이름이…….’

이름이… 뭐더라.

분명히 방금 말했던 것 같은데, 머릿속이 갑자기 새하얀 백지가 되어 버렸다.

‘내 아내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대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랬나? 얼떨떨한 얼굴로 야닉을 바라보자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들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당신은 너무 고민이 많아. 모처럼 오붓한 시간이니까 복잡한 생각은 접어 둬.’

가만히 그의 온기를 느끼던 한 주임은 이번엔 맞잡고 있던 손을 향해 홀연히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마력이 왜 안 들어오지?’

‘우리 부인께서는 고민도 많고 욕심도 많군. 신궁, 검사, 현자로도 모자라서 내 마력까지 갖고 싶어?’

‘이건…… 뭔가 이상해.’

어딘가 먼 곳에서 어렴풋이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 주임은 기묘한 감상을 느끼며 야닉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말대로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이 순간이 영원할 수만 있다면.

“…임님! 주임님!”

“…….”

환상은 그걸로 끝이었다.

어깨를 붙잡아 격렬하게 흔드는 통에 그녀의 의식이 강제로 돌아와 버렸다.

흐렸던 초점이 점차 선명해지더니 정신을 차린 순간 보이는 건 야닉이 아닌 이한율의 하얀 얼굴이었다. 그다음엔 성마른 외침이 날카롭게 귀에 꽂혔다.

“일어나세요. 시간이 너무 지체됐어요. 이제 그만 산을 벗어나야겠어요.”

“……이한율?”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녀를 이한율이 다급하게 잡아끌었다.

“여기서부터는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많아서 금방 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그는 단검으로 밧줄 가운데를 대강 잘라 낸 뒤 멀거니 서 있는 그녀에게 수통을 내밀었다.

“저번과 똑같은 환상이라 다행히 금방 벗어날 수 있었어요. 전부 마셔 두세요. 주임님 식은땀을 많이 흘리셨어요.”

흐지부지한 정신으로 두어 모금 물을 마시고 나니 머릿속이 한층 맑아졌다. 환상에 걸리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던 순간이 떠올라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떨궜다.

‘유일하게 도망칠 수 있었던 기회였는데.’

절망감에 휩싸여 좌절하는 사이 이한율은 서둘러 말과 연결된 수레를 해체했다.

여기서부터 용병 마을인 그랑드콜 방향으로 나 있는 길은 하나였다. 이번에는 반대로 가는 중이라 내리막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좁은 길에 거추장스러운 수레는 그대로 버려두고 두 사람은 짐을 매단 말의 줄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이대로 내려가면 출구가 나올 테고, 협곡을 건너 사방으로 뻗은 광야로 진입하는 순간 아크만과는 영영 멀어질 것이다.

날씨와 상관없이 이마에 땀이 맺히고 고삐를 쥔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엄습하는 위기감이 걷잡을 수 없이 전신을 덮칠 때쯤, 페어리들의 목소리가 다시금 머릿속에 울렸다.

「저 남자를 죽여!」

「바위로 머리를 내려쳐!」

「이대로 산을 빠져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

요정들의 목소리 역시 조급했다. 한 주임은 마지막 동아줄인 것처럼 즉각 매달렸다.

‘나보고 살인을 하라는 말이야?’

「그를 죽이고 야닉에게 돌아가!」

저 남자는 네 정체를 알고 있어.

‘이한율만 없으면 네 과거는 영원히 묻힐 거야.’

성난 요정들의 목소리가, 아니……. 요정이 말하는 것이 맞나?

어쩐지 심연 속에 웅크리고 있던 한송이가 고갤 들어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취발론에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페어리들의 장난에 속아 길을 잃고 만다.

급박한 심경에 기본적인 주의사항은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요정들은 그 작은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의 내면을 파고들어 정신을 마구 헤집고, 필요하다면 조종도 서슴지 않았다.

「못 하겠으면 우리가 해 줄게.」

「가만히 모든 걸 맡겨. 눈을 뜨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거야.」

「눈을 못 뜨면 어쩔 수 없지만!」

곧이어 자아를 잃어버린 얼굴에서 초조했던 표정이 말끔히 사라졌다. 탁해진 눈동자는 더 이상 한 주임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홀연히 고개를 돌리고는 이한율을 향해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한율 씨. 잠깐만.”

발소리만 울리던 고요한 숲에 잠잠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 이한율은 이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한 주임이 먼저 다가오더니 스스럼없이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안은 것이다.

“실은 아까 환각을 봤을 때, 거기서 한율 씨를 봤어.”

“주, 주임님?”

당황한 음성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녀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고저 없이 느른하게 읊조렸다.

“어쩌면 나는 지금껏 날 알아봐 줄 사람을 기다렸는지도 몰라. 그래서 한율 씨가 날 송이 누나라고 불러 줬을 때… 사실은 기뻤어.”

감동적인 말과는 대조적으로 지독하게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이한율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저 꿈같은 현실에 취해 멍하니 손을 들어 그녀를 마주 안을 뿐.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그녀가 실은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니, 그는 아직도 환상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순간 멍해졌다.

“그게 정말이에요? 내가 알아봐 줘서…… 기뻤어요?”

“처음엔 혼란스러웠는데 환상을 본 후로 확신이 들었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은 황자가 아니야. 처음부터 너였어. 널 좋아….”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가 다급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거칠게 입술을 맞대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얻어 낸 결실에 이한율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짓이기듯 문지르는 탓에 여린 살이 마구 쓸리고 뭉개졌다. 강압적이고 난폭한 동작에 몸까지 휘청였다.

한 주임은 더욱더 그를 부둥켜안고 그걸로도 모자라 허리를 감은 손에 깍지를 끼고 상체를 단단히 밀착시켰다.

“…….”

처음부터 감지 않았던 그녀의 눈이 가파른 내리막길로 향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그를 받아들이며 뒷걸음질 쳤다. 이한율은 이지를 잃은 듯 끌려왔다. 오히려 적극적인 몸짓으로 본능을 불태웠다.

그녀를 탐하느라 이성이 날아간 채로 가녀린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 순간, 한 주임은 이를 악물고 그를 옭아맨 채로 경사로를 향해 몸을 넘어뜨렸다.

“……!”

유난히 비탈진 곳으로 쓰러진 두 사람은 속절없이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를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가고 온 힘을 다해 던졌던 몸이 산길을 마구잡이로 굴렀다.

날카로운 가지 끝에 피부가 긁혀 나가고 돌부리에 이리저리 치였다. 쉴 새 없이 여기저기 부딪쳐도 아픔은커녕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한참을 휩쓸려 구르던 몸이 그러다가 어느 순간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우뚝 멈췄다.

중간에 솟아난 구불구불한 나무줄기에 가차 없이 부딪힌 그녀가 급격하게 격통이 이는 배를 부여잡았다.

“아흑! 쿨럭, 쿨럭!”

순간적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찬물세례를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체에 가해진 강한 충격에 페어리의 현혹에서 깨어난 것이다.

폐부가 옥죄여 오는 고통에 거친 숨을 쥐어짜던 한 주임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헉, 허억…….”

온통 시커먼 잎사귀와 크고 작은 바위가 즐비한 아래로 멀지 않은 곳에 이한율이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아픔도 잊고 절뚝거리며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적막이 이는 숲속에 바스락거리는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하, 한율 씨?”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손을 조심스럽게 뻗던 그녀가 단박에 창백해졌다.

울퉁불퉁한 바위 옆에 똑바로 누워 있던 이한율의 머리에서 한줄기 피가 이마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아… 안 돼…….”

벌벌 떨리는 손으로 어깨를 흔들었지만, 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성공이야!」

또다시 페어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내가,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나는…….”

한 주임이 횡설수설하는 중에 페어리가 유쾌한 목소리로 키득거렸다.

「우리가 도와줬지! 안 죽었어. 걱정하지 마. 그는 기절한 것뿐이야!」

“하아…….”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갑자기 숨통이 트여 그녀는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그와 함께 걷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난데없이 엉망으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제야 야닉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목숨을 잃거나 행방불명이 되는 일이 잦은 위험한 산. 약해진 틈을 타 페어리가 머리를 지배하고 몸을 조종했다.

그녀는 오싹한 공포감에 파드득 몸서리를 쳤다.

「방해꾼이 사라졌으니 이제 이쪽으로 와.」

「네 문제를 해결해 줄게!」

한 주임은 귀를 막고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만해! 내 머릿속에서 나가. 날 좀 내버려 둬!’

“읏!”

휘청거리던 몸은 얼마 뛰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고꾸라졌다.

갑자기 온 세상이 저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아침에 납치된 걸로도 모자라 철두철미하게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마저 들켰다.

‘멍청한 한재인. 넌 네가 똑똑한 줄 알았지. 네 꼴을 좀 봐.’

‘겁쟁이, 도와줄 사람만 찾는 비겁자, 자존심만 남은 무능력자!’

열일곱 살의 한송이가 서른 살의 한재인을 비웃었다.

“……하하.”

그녀는 온통 까지고 더러운 두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엉망진창일 게 분명한 몰골이 순간 우스워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도망치는 것도 이젠 지겨워.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스스로 다짐하듯 중얼거린 그녀는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페어리들의 웃음소리를 따라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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