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09화 (109/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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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은 돌아보지 않고 손만 흔드는 야닉의 뒷모습을 잠시간 보다가 끌고 왔던 말에 훌쩍 올라탔다.

“아크만 기사단과 동행하는 검은 머리에 노란색 눈동자라. 안 봐도 뻔하군. 3황자야.”

그의 말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부대장이 제 턱을 쓰다듬으며 모호한 얼굴을 했다.

“제국이 정말 소문대로 브리아나 황비의 모국을 치려는 걸까요? 아이노스는 남대륙에서 제일 큰 왕국이라 우리 같은 용병들을 동원해도 쉽지 않을 텐데요.”

“아들이 북방으로 쫓겨난 지도 벌써 10년이나 됐으니 황비가 이를 갈고 있겠지. 그래서 아이노스 군을 이끌고 쳐들어올까 봐 먼저 선수 치려는 걸 수도 있고. 이미 한 번 황비의 난을 겪었는데 늙은 황제가 뭔들 못 하겠냐. 저 죽기 전에 황태자한테 힘을 실어 줄 참인가 보지.”

자밀이 나름 그럴싸한 추리를 늘어놓자 부대장이 수긍한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요양 차 고국으로 돌아갔다는 핑계치곤 10년이나 틀어박혀 있었으니 브리아나 황비가 계략을 꾸미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테죠. 뭐, 우리야 금화만 넉넉히 받으면 그만 아닙니까.”

킬킬거리며 제 자리를 찾아가는 부대장을 보던 자밀이 이번엔 달구지를 정리하던 부하에게 눈길을 돌렸다.

“어이, 그 이방인은 아직도 자빠져 자는 거냐? 치료는 벌써 끝났다며?”

커다란 목소리에 부하가 식량과 여분의 무기를 실은 달구지 천막을 걷어 냈다. 그러자 좁은 공간에 팔다리가 묶인 채 누워 있는 이한율의 모습이 확 드러났다.

그는 쏟아지는 빛에 부신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얕은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어! 깼는데요!”

소리치는 음성에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두건을 두른 마법사가 얼른 다가왔다.

“이봐, 이제야 정신이 좀 드나? 머리부터 이마까지 찢어져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우리가 발견했을 땐 피는 멎어 있었는데,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저체온증으로 죽었을 거야.”

마법사는 그의 상처를 살피며 진중히 말했다.

이방인이 깨어났다는 소리에 자말이 다시 말에서 내려왔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눈을 찌푸리는 이한율을 향해 시원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운 좋은 녀석! 네가 이방인이 아니었다면 목숨 걸고 내려가서 구하지도 않았을 거다. 회복마법까지 쓸 줄 아는 마법사를 보유한 용병단은 델피온에서 우리 검은 발톱이 유일하거든.”

이한율은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시커먼 남자들을 향해 몇 번 더 눈을 깜빡이다가 이윽고 명료해진 정신으로 입을 열었다.

“수도로… 가는 겁니까?”

“그래. 검은 발톱의 대륙 진출을 향한 위대한 발걸음이지!”

깨어난 후 이들의 대화를 내내 엿듣고 있었던 이한율이 야트막한 미소를 흘렸다.

“아아. 정말 다행이네요. 하늘은 제 편인 게 확실한가 봐요.”

* * *

그랑드콜에 도착한 검은 발톱 용병단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다른 여행객들이 그러하듯 당연하게도 술집이었다.

여기저기 에일과 벌꿀주가 널브러진 테이블 위로 탕! 커다란 오크 잔 하나가 큰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뭐라고?”

자밀이 삐죽삐죽 돋아난 짙은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소리를 낮추세요.”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이한율이 짐짓 엄중하게 주의를 주자 자밀은 금세 고개를 숙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취발론에서 주운 이방인이 꺼낸 이야기에 호기심과 의구심으로 점철된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네 말은 그러니까, 황제가 치려는 게 다른 나라도 아니고 고작 아크만이라고?”

한껏 수그러든 목소리에 이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3황자가 반역을 꾀한다는 정보가 황제 귀에 들어간 모양이에요. 그래서 저도 아크만을 나온 거고요.”

자밀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가게의 가장 구석진 자리로 옮기고는 성마르게 손짓했다. 사실이라면 엄청난 정보였기에 듣는 귀가 많은 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따라 일어난 이한율의 얼굴에 오른쪽 이마부터 눈썹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상흔이 드러났다. 그는 의식적으로 고개를 수그려 조용히 이동했다.

자밀은 이한율이 맞은편에 앉는 것을 보고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불쑥 물었다.

“유배나 다름없이 살던 3황자가 반역을 일으킨다니, 너무 무모하지 않나? 병력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차이가 날 텐데.”

“아이노스에 있는 황비가 돕겠죠. 불시에 위아래에서 친다면 가능성이 없는 도박은 아닐 테고요.”

이한율은 매끄럽게 답변했다.

“아이노스를 등에 업는다면… 그래, 노려 볼 법도 하겠지. 얼마 전엔가 대대적으로 인원 보충도 한 모양이고.”

곰곰이 생각하던 자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히 황실이 먼저 정보를 입수했으니 3황자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아크만을 칠 겁니다. 황자를 생포하면 황비도 꼬리를 내릴 거고, 반역은 성공하지 못할 거예요.”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이한율은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는 은근한 어조로 자밀의 관심을 이끌었다.

“그렇게 되면… 역도를 처단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어마어마한 보상이 내려지겠죠.”

그의 말에 자밀이 저도 모르게 혀로 아랫입술을 훑었다.

“그게 우리 검은 발톱 용병단이 될 수도 있겠군.”

적나라한 욕망에 이한율은 속으로 조소를 삼켰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한껏 진지한 얼굴로 그를 부추겼다.

“어차피 제국군은 후방에서 따라올 거고 앞에는 총알받이들을 내세울 거예요. 그게 용병들이 될 테고요. 그러니 여러분이 가장 선봉에 서야 합니다.”

“총알받이?”

“아, 방패막이 같은 거요.”

흐음. 이해가 간다는 얼굴로 자밀이 팔짱을 꼈다.

“한마디로 역적무리 소탕에 앞장선 영웅이 될 기회란 말이지. 그런데….”

음산하게 중얼거리던 자밀이 번뜩 매서운 눈으로 이한율을 응시했다.

“우리가 네 말을 어떻게 믿지? 괜히 앞에서 날뛰다가 개죽음이나 당하는 거 아니냔 말이야. 아크만에 있었으면 트라야누스의 유명세를 모를 리도 없었을 텐데. 그놈들은 대다수가 거인족에다가 드워프의 무기까지 가지고 있다고.”

제법 머리 굴리는 흉내를 내는 꼴에 이한율이 피식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당연히 알죠. 제가 바로 트라야누스 단원이었으니까.”

“…우리 마법사가 네놈 허리춤에 있던 지팡이를 보곤, 최상급 재료에다가 구하기 어려운 정령석까지 박혀 있었다고 하긴 하더군.”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아크만에서 그런 무기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면 이한율의 말이 거짓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자밀은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굴리다가 마지막으로 떠보듯 운을 띄웠다.

“네놈 목적이 뭐냐. 단순히 역적이 되기 싫어 도망쳐 나온 걸로는 안 보이고, 살려 준 보답으로 주는 정보치고는 눈깔에 투지가 가득하고 말이야.”

뭐겠어요. 당연히 내 여자를 되찾으려는 거지.

이한율은 속으로 말을 삼키곤 비뚜름히 웃었다.

“저도 영웅이 한번 돼 보고 싶어서요. 부와 명예. 싫어할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그러니까 저도 용병단에 끼워 달라는 겁니다.”

“그럴 줄 알았어!”

자밀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탕탕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방인까지 제 발로 들어와 준다면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우리도 조만간 트라야누스 못지않은 명성을 얻을 거야!”

“저기, 그거 말인데요. 아무래도 제가 도망친 형편이라… 이름을 드러내기가 조금 곤란해서요. 제 정체가 탄로 나면 아크만에서 추격이 붙을 수도 있으니까 출정하기 전까지는 비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 그렇겠군! 내가 생각이 짧았어. 좋아. 네 비밀은 당분간 우리 검은 발톱이 철저하게 지켜 주마. 대신 일이 끝나면 네 이름을 팔아서 홍보할 테니까 그건 알고 있으라고.”

은근한 압박을 담은 언사에도 이한율은 대수롭지 않게 고갤 끄덕였다.

아무렴 어떤가. 일이 끝나고 나면 더는 볼 일이 없는 자들이니 나중에 귀찮게 굴면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그에게는 전혀 고민할 여지가 없는 대답이었다.

한껏 상기된 얼굴의 자밀이 돌연 벌떡 일어나더니 가게가 떠나가라 목청껏 외쳤다.

“오늘은 우리 검은 발톱 용병단이 전부 살 테니 다들 실컷 마셔라!”

외지인의 통 큰 배포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튀어 올랐다.

한층 더 떠들썩해진 술집에서 이한율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용병들과 제국군이 몇만 명씩 몰려간다 해도 요새를 에두른 거대한 방벽을 뚫지 못하면 일이 어려워진다.

3황자의 무력은 또 어떻고. 강철같은 고르곤의 피부도 녹여 내는 야닉의 화염이면 수천의 군사도 무용지물로 불타오를 것이다.

그 한 명의 전력이 가장 큰 문제였다.

‘무조건 성문을 열어야 해.’

무턱대고 성문 앞에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야닉의 힘을 모르는 멍청한 제국군은 주저 없이 불지옥으로 달려들 게 분명했고, 그렇게 된다면 잔여 병력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트라야누스가 뛰쳐나와 무능한 황실 기사들을 휩쓸겠지.

그가 마음 놓고 마법을 쓸 수 없게 하려면 아군과 적군이 마구 뒤섞여야 한다.

아크만의 성문을 열 방법이라…….

이한율은 난동이 오가는 소란한 가운데서 고요히 골몰했다.

“맞다니까! 아크만에 있는 우리 큰형이 그랬다고! 황자가 손 한번 휘두르니까 날아오던 와이번 떼들이 한꺼번에 그냥 잿더미가….”

“그게 다 3황자가 일부러 내는 헛소문이라던데, 그걸 믿냐? 쯧쯧. 순진한 녀석! 이방인도 아닌데 그런 마력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어딨다고.”

“이놈이 사람 말을 못 믿네? 우리 형이 직접 두 눈으로 봤다고 했다니까?”

멀지 않은 곳에서 툭탁거리는 소음이 불쾌하게 날아들었다.

집중력이 흐려져 눈살을 찌푸리던 이한율이 아우성치는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가 순간적으로 눈동자를 굳혔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섬광이 내리꽂혔다.

‘가족!’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의 입매가 소리 없이 호선을 그렸다.

깨달은 동시에 이한율은 벌떡 일어나 부대장과 떠들고 있는 자밀에게 빠르게 걸었다.

“어, 이방인.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네가 당분간 쓸 이름 말인데….”

“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 대장님.”

자밀의 말을 자르며 이한율이 성급하게 끼어들었다.

“사람들을 좀 모아야겠어요. 최대한 많이요.”

그는 아직도 꽥꽥거리는 남자를 돌아보고는 치아가 다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었다.

“그래요. 저기, 저 남자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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