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10화 (11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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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은 손에 입김을 불어 가며 수레를 끌던 한 주임은 몇 걸음 더 나아가다가 이윽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다리가 풀리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마구 떨렸다. 바닥을 짚은 손으로 아연히 시선을 내린 그녀는 진주알만 한 크기의 붉은 열매를 보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개미… 개미가 있어.’

벌레가 파먹은 흔적이 남아 있는 열매를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뜯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맛 따위를 느낄 형편은 아니었다. 눈물이 솟을 정도로 시큼했지만 억지로 씹어 삼킨 후 재차 몸을 일으켰다.

밤인지 낮인지도, 동서남북도 알 수 없는 우거진 숲을 건너다 보니 발아래 그렘린들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무기를 고쳐 줄까?》

“난 무기가 없어.”

나뭇가지를 든 그렘린을 향해 한 주임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발치에서 떠드는 작은 괴물들을 보자니 아득했던 정신이 조금이나마 맑아졌다.

《에이. 정말 무기가 없잖아.》

그렘린은 넝마를 두른 한 주임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더니 김이 샌 듯 투덜거리면서도 졸래졸래 따라붙었다.

《파수꾼의 안내도 없이 인간이 어떻게 이쪽으로 들어왔지?》

《보나 마나 길을 잃었겠지.》

《그런 것치곤 제대로 가고 있는데?》

《멍청아! 그걸 말해 주면 어떡하냐!》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의 머리를 솔방울로 꽁! 내려치자 난데없이 얻어맞은 그렘린이 얼굴의 절반이나 되는 커다란 눈망울을 글썽거렸다.

“난 길을 알아. 돌아가는 길을… 알아.”

한 주임은 내리깔았던 고개를 들고 중얼거리며 무거운 발을 옮겼다.

[여행자에게 필요한 건 길을 잃지 않는 것. 헤매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해. 이제부턴 어떤 어둠 속에서도 금방 빠져나올 수 있을 거야.]

노인의 목소리로 그녀에게 가호를 내렸던 브라우니의 말을 떠올리니 걷고 있는 방향에 더욱 확신이 들었다.

수레에 올라탔던 그렘린이 갑자기 펄쩍 뛰며 호들갑을 떤 것은 그때였다.

《양치기다! 양치기가 나타났다!》

자그만 손으로 가리킨 방향에서 스산한 안개가 바닥부터 피어올랐다.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로브 자락을 질질 끌고 양치기가 이곳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소름 끼치는 감각이 부지불식간에 그녀를 휩쓸었다.

저벅… 저벅….

끝이 구부러진 기다란 손톱으로 지팡이를 들고 서늘하게 미소 짓는 새파란 얼굴에 척추가 저릿해지고 발이 얼어붙었다.

낡은 잿빛 로브가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허리를 굽혀 그녀의 얼굴에 서릿발 같은 입김을 뿜어냈다.

- 한…송이…….

귓가에 퍼지는 목소리는 마치 동굴 속에서 메아리치듯 깊었고, 어쩌면 찌릿찌릿한 비명 같기도 했다.

“…….”

한 주임은 송곳처럼 찔러 오는 두려움을 떨치려 두 눈을 꽉 감았다가 아프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대답하면 안 돼. 말을 섞으면 안 돼.’

고개 돌린 그녀의 시선을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양치기가 또다시 말을 걸었다.

- 야닉 리버스가… 산에… 있다…….

“…!”

- 지금… 돌아가면… 만날 수 있다…. 이쪽으로 가면… 야닉 리버스를 만날 수 없다…….

《양치기는 거짓말을 못 해.》

한 주임 앞으로 쪼르르 달려온 그렘린이 잽싸게 덧붙였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양치기가 아닌 그렘린에게 물었다.

“야닉이… 어디로 가고 있는데?”

단순한 그렘린은 양치기에게 다가가서는 고개를 한껏 쳐올렸다.

《야닉이 어디로 가냐고 묻는데?》

-……델피온.

양치기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와 말을 섞은 인간을 양으로 만들 수 있어도, 하급 요정인 그렘린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겐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규율이 있었다.

‘양치기는 모든 질문에 진실한 대답을 해야 한다.’

취발론은 건널 수 없는 산이 아니었다.

환각에서 빠져나오면 세피로트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고, 페어리의 목소리를 외면하면 현혹되지 않는다.

그렘린에게 무기를 주지 않으면 공격당할 일도 없고, 양치기와 말을 섞지 않으면 양이 되지 않는다.

마주친 모든 신비한 존재들은 반드시 어떤 법칙을 가지고 있었다.

자로가 말했던 건 ‘죽음’의 산이 아닌, ‘신’의 산.

한 주임은 본능적으로 산의 규칙을 깨달았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무엇을 마주치든 간에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렘린의 질문에 대답하는 양치기를 보고 나니 더욱 확신이 생겼다. 한 주임은 다시 한번 그렘린에게 또박또박 전달했다.

“날 찾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냐고 물어봐 줘.”

그러자 그렘린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양치기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이 인간을 찾고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

양치기는 주춤거리며 한발 물러섰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던 것도 잠시, 그는 어쩔 도리 없이 규율을 따라야 했다.

- 여기서 동쪽으로… 300보 앞에 있다….

동쪽. 그녀는 다시금 혼란에 빠졌다.

혹자는 별을 보고 방향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은 별을 볼 줄 모른다. 알아도 하늘을 어지러이 뒤덮은 마른 가지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버석한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한 주임이 양치기를 한 번 봤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마터면 동쪽이 어디냐고 덜컥 물어볼 뻔했다.

“얘들아, 동쪽이 어느 방향인지 물어봐 줄래?”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렘린에게 전하자 괴물들이 이번엔 심드렁하게 보라색 혀를 길게 내밀었다.

《싫어. 이제 재미없어.》

《양치기도 벌써 떠났어.》

“뭐?”

그들의 말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양치기가 서 있던 곳은 어느새 희뿌연 안개만 남은 채로 텅 비어 있었다.

《무기도 없고 재미없다.》

《우리도 그만 가자!》

나뭇가지를 허공에 휙휙 휘두르던 그렘린들이 폴짝거리면서 숲속으로 자취를 하나둘 감추기 시작했다.

당황한 한 주임이 다급하게 손을 휘둘렀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그녀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서둘러 그렘린들을 불러 세웠다.

‘생각해. 생각해야 해.’

참을성이 없는 괴물들을 붙잡는 목소리에 간절함이 실렸다.

숲을 나간다 해도 혼자서 요새까지 수레를 끌고 갈 힘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서 쓰러지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다.

춥고, 아프고, 무서움에 앞서 서러움이 울컥 밀려들었다. 그녀는 꽉 죄는 목소리로 힘겹게 그렘린들을 향해 호소했다.

“양치기가 그랬잖아. 근처에 사람들이 있다고…….”

《……그런데?》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한 마리가 기적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 사람들, 무기를 가지고 있어. 그것도 아주 많이…….”

쥐어짜 내듯 뱉은 말에 엉킨 수풀 속으로 존재를 감췄던 그렘린들이 재차 튀어나왔다.

《그쪽으로 가자!》

《무기다! 무기!》

그렘린은 일정한 방향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한 주임은 숨을 한계까지 들이마신 뒤 안간힘을 써서 그들을 뒤쫓았다. 종아리까지 오는 작은 생물들은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 순간 그렘린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어금니를 콱 물고 사라진 곳을 향해 수레를 이끌었다.

발을 내디딜수록 호흡이 엉망으로 변하고 머리가 무거워졌다. 그런데도 주저앉을 수 없던 이유는 멀지 않은 곳에서 컹컹거리는 동물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선 귀환석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내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힘겹게 삼키며 소리가 가까워지는 곳으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갔다.

* * *

수색을 위해 동원한 개들이 돌연 한 방향으로 몸을 한껏 낮추더니 이를 드러내고 매섭게 짖어 댔다.

용병들이 그곳을 향해 무기를 뽑아 들고 천천히 다가가려다가 펄쩍 뛰어올랐다.

《무기를 고쳐 줄까?》

《그렘린에게 다 맡겨 봐!》

“이것들은 다 뭐야?”

브레고가 어느새 발치까지 와서 뛰어다니는 연보라색 괴물들을 보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렘린이네요. 무기를 주면 갑자기 커져서 그걸로 공격한다니까 다들 주의하세요.”

바닥을 유심히 살피던 포라킨이 욱신거리는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리저리 땅을 수색하는 용병들을 둘러보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짐수레의 흔적이 산의 초입으로 향했을 때 포라킨은 절망했다.

웃다가도 뒤돌아서 금방 표정을 지우곤 했던 이한율이 이따금 불안하긴 했어도, 이런 식으로 하루아침에 한 주임을 납치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에게 쏟은 노력과 나름의 애정이 갈기갈기 찢겨 처참하게 되돌아온 순간이었다.

포라킨은 모든 것이 자기 탓인 것처럼 얼굴을 연신 쓸어내리다가 이윽고 참담해져서 고개를 떨구었다.

망연자실한 그녀를 착잡하게 지켜보던 브레고가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으나 큰 위로가 되진 못했다.

그렘린을 이미 본 적이 있는 미르는 대수롭지 않게 그들을 무시하고는 브레고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여기서부터 흔적이 끊겼어요. 그 뒤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덮어썼는지 바닥도 엉망이고.”

미엘라가 한 주임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보고를 한 것은 늦은 저녁이었고 사원 수업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요새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루이자가 혼비백산해서 한 주임을 찾는 동안 이한율의 거짓말이 순차적으로 드러났다. 결국 두 사람이 요새를 빠져나갔다는 사실까지 알아냈을 땐 그녀는 충격으로 그만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자취를 감췄던 사미 크랩턴의 안위는 오로지 세레나만 궁금해하고 있었다.

스캄은 이한율이 그를 데리고 나갔다는 병원 사제들의 진술을 듣고 사미 크랩턴이 이미 죽었을 거라 판단했다.

세레나가 사미 크랩턴을 찾으라 고성을 지르든 말든 한 주임이 납치당한 지금 그녀의 명령을 들을 사람은 없었다.

스캄은 주어진 임시 권한으로 세레나를 본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성의 모든 출입문을 막아선 병사들은 이를 충실히 이행했다.

본성에 감금당한 세레나의 악쓰는 소리가 밤낮으로 울려 퍼졌다.

스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브레고에게 반드시 한 주임을 찾아오라는 엄중한 임무를 내렸다.

사라진 한 주임을 찾기 위해 꾸려진 수색대는 브레고와 포라킨, 그리고 취발론을 넘어 본 경험이 있는 신입 용병들로 구성된 참이었다.

그들은 한 주임이 떨어뜨린 빵조각을 발견한 다음부터 활발하게 수색을 이어 갔으나, 산의 위험성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이동 중이었다.

그 와중에 무기를 얻지 못하고 허탕을 친 그렘린들이 투덜거리며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재미없어! 다시 가서 그 여자를 혼내 주자!》

《수레도 뒤집어엎어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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