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11화 (11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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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그 여자라고?”

폰의 예민한 귀가 쫑긋거리며 그렘린들의 대화를 포착했다. 그가 재빠른 발놀림으로 그렘린들의 앞을 막아서고는 본능적으로 크르릉거렸다.

《짐승족!》

그렘린이 위협적으로 나뭇가지를 휘둘렀으나 폰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후각에 온 신경을 집중한 그가 기민하게 킁킁거리더니 이윽고 일행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쪽이다!”

여우 수인족의 외침에 미르를 포함한 거인족 몇 명이 앞장서서 달려들어 가시덤불을 헤집기 시작했다.

브레고는 뛰쳐나가려던 포라킨을 겨우 붙잡고 침착하게 용병들의 보고를 기다렸다.

“찾았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수색대가 일제히 달려가 바닥에 쓰러져있던 한 주임을 덩굴 밖으로 서둘러 끄집어냈다.

“주임님!”

포라킨이 기어이 브레고의 손을 억세게 뿌리치고는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녀의 상태를 하나하나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온통 긁히고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보자마자 온 힘을 다해 신성력을 끌어올려 회복마법을 가동했다.

눈시울이 붉어져 앞이 흐릿해진 상태로 마법을 퍼부어 대길 한참, 작게 움찔하는 손가락을 본 포라킨이 퍼뜩 이성을 되찾았다.

“주임님, 일어나 보세요!”

“추워…….”

혼미한 정신으로 한 주임이 중얼거렸다. 포라킨이 발작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구속구들을 전부 가져오세요! 당장!”

* * *

한 주임이 다시 눈을 뜬 건 오래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렘린들이 자취를 감춘 곳을 따라 정신없이 걷다가 개들이 컹컹대는 소리에 마음이 급해져 앞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성급하게 발을 뻗었다.

돌부리에 걸린 건지, 발끼리 어긋났던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 넘어져 턱이 바닥에 쓸리는 고통 뒤엔 온통 암흑이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 포라킨의 얼굴이 보였다.

정확히는 포라킨의 눈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뺨에 닿은 느낌에 정신이 들었다.

“……단장…님.”

입 안에서 겨우 달싹이는 목소리에 포라킨이 눈을 커다랗게 뜨자 동글동글한 방울이 또다시 뚝 떨어졌다.

“주임님! 정신이 드세요?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진짜… 단장님이세요…?”

어이없는 질문이었지만 한 주임은 진심이었다.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으며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세계에 뚝 떨어져 아무도 없는 차가운 곳에서 눈을 감겠구나. 이걸로 허망하게 내 인생은 끝이 나는구나.

‘그래도 귀환석은 누군가 발견하겠지. 그나마 다행이다.’

그저 그렇게 받아들이고 까무룩 눈을 감았는데 다시 앞이 보인다. 전부 포기했던 그녀로서는 지금이 현실인지, 아니면 죽어서 사후세계로 온 건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저… 살았어요…?”

“살았습니다! 살아 계신다고요!”

포라킨이 한 주임의 어깨를 붙잡고 울먹거리며 소리쳤다.

늘 담담하고 차분했던, 누군가에겐 냉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던 포라킨의 낯선 모습에 지켜보던 용병들은 하나같이 숨을 죽이고 침묵했다.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그 말이 포라킨을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이 어딨어요.”

“미네. 잠깐만.”

감정이 북받친 포라킨을 일으켜 세운 이는 브레고였다. 그는 장신구를 여럿 깨뜨리느라 마력 고갈 증세를 보이는 포라킨의 어깨를 잡아 미르에게 넘기고는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외상은 모두 치료했고 마력도 보충했으니, 이제 괜찮으실 겁니다.”

브레고가 진지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하고는 잠깐의 뜸을 들였다가 물었다.

“근처에 대장님이… 아니, 황자님께서 산에 계신 것 같습니다. 아마 델피온으로 가시는 길인 것 같아요.”

야닉이 이곳에 있다고. 양치기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가서 모셔 올까요?”

그는 스스로 판단하는 대신 한 주임에게 허락을 구했다. 긍정이 떨어지면 곧바로 대원들을 보낼 작정이었다.

“수색대원 중 하나가 세피로트의 영역에 들어선 아크만 기사단을 발견했습니다. 지금이라면 합류할 수 있습니다.”

‘네. 지금 당장 불러 주세요. 그 사람 좀 나한테 보내 주세요.’

그녀는 치미는 말을 가라앉히곤 미세하게 고갤 저었다.

“……부르지 마세요. 그냥 우리끼리 돌아가요.”

야닉이 보고 싶었다. 환상이 아닌 그 사람을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고 싶었다.

그를 붙잡고 울고, 때리고,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그저 원망하고 싶었다.

그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되는 떼를 쓰더라도 다 받아 주고 가만히 등을 토닥여 줄 것 같았다.

‘아직은 안 돼.’

세레나와의 관계를 정리한 다음에. 아무것도 껄끄러울 게 없을 때. 그때야 비로소 가능한 것들이었다.

어느 때보다 야닉이 필요한 순간이었지만, 한 주임은 한순간의 안락함보다는 긴 안정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가 제대로 헤어지고 와야만 불안한 마음을 온전히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야닉을 불러들여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감았던 눈을 뜨자 치솟았던 뜨거운 것이 울컥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한 주임은 소란스러운 마음을 눌러 앉히고 흔들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냥 아크만으로 돌아가요. 최대한 빨리요.”

* * *

“근처에 다른 사람들이 있나 보군요. 개가 짖는 소리 덕분에 환상에서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덧붙이며 로하겔 경이 말에게 씌운 덮개를 걷었다.

“후우…….”

강행에 가까운 여정에 야닉은 조금 굳은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러곤 몇몇 부하들이 주저앉아 앓는 소리를 들었다.

타고난 강골인 그가 이 정도니 다른 기사들의 형편이야 보지 않아도 뻔했다.

식사는 간단히, 잠은 최소한으로, 지친 말은 모조리 교체해 가며 수도에서 취발론까지 돌파했다.

막사 밖으로도 젊은 기사들이 끙끙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으나 그는 말이라도 쉬었다 가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쩐지 빨리 아크만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안 좋은 쪽으로는 유달리 감이 좋은 편인지라, 괜한 찝찝함이 그를 서두르게 만들었다.

야닉은 지체하지 않고 기사단을 이끌었다. 익숙한 회색 방벽을 등지고 델피온으로 이동할 차례였다.

사전에 아무런 연통도 없이 들이닥친 레비탄 제국 3황자에 델피온 왕실에서는 원로들을 소집할 겨를조차 없었다.

아피오수스 왕은 황자가 왕성에 진입했다는 보고를 듣고 곧장 핏대를 세웠다.

“그 건방진 놈이!”

그의 발길질에 커다란 옥좌가 덜컹거렸다.

황옥을 박아 넣은 왕관을 머리에 씌워 주던 시종장이 서둘러 망토까지 어깨에 걸쳐 주었다.

혈통을 중요시하는 나라의 관습대로 늘 친인척과의 혼인으로 대를 이어 온 델피온의 왕은,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다.

대대로 장신이 없었으니 그 역시 다르지 않았다. 대신 계단 열 칸은 높은 곳에 있는 왕좌가 다른 이들을 위에서 내려다보게 해 주었다.

복장을 갖춘 아피오수스 12세는 사치와는 거리가 먼 듯한,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그레이트 홀에 좌우로 근위대를 가득 채우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3황자가 무슨 일로 왔을 거 같으냐.”

“글쎄요…….”

관자놀이를 짚으며 묻는 말에 젊은 시종장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하는 조카사위를 보고 왕이 눈을 부라렸다. 따끔한 눈총에 뜨끔한 그가 고민하는 시늉을 하더니 곧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세레나를 찾을 테니 수색 비용을 달라고 했던 것 때문이 아닐까요? 그게 좀 억지긴 했잖아요. 누가 봐도 마지막에 한탕 크게 뜯어먹으려는….”

“쓰읍.”

왕이 쓰잘머리 없는 소리 말라는 듯 위협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입을 다문 시종장은 왕이 앉은 옥좌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는 은밀히 속삭였다.

“따지러 온 게 아니면… 이제 5년이 다 되었으니 다른 왕녀를 달라고 하는 게 아닐까요? 그나마 유서 깊은 우리나라와 국혼 관계라도 유지해야 황자도 위신이 설 거 아니에요?”

조카사위의 추리가 그럴싸하게 들렸는지 왕의 푸른 눈동자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른 왕녀라… 헤일리가 올해 몇 살이었지?”

“열다섯이요.”

시종장이 냉큼 대답했다.

“…시집갈 나이가 되긴 했지. 그렇지만 헤일리는 로엘 왕국으로 보낼 참이었는데 말이야. 거기 왕비가 몇 년째 후사가 없다던데, 아무래도 황자비보다는 왕비가 낫지 않겠느냐?”

“아무래도 그렇지요? 그럼 헤일리는 남겨 두고… 이참에 레이라를 부르면 어떨까요?”

한껏 몸을 수그려 왕의 귓가에 속삭이자 그가 곧바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왕은 레이라라는 이름과 동시에 그녀의 모친인 아름다웠던 하녀를 떠올렸다.

끄응…. 아무리 그래도 사생아를 궁으로 데려오면 왕비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인데. 그의 고뇌가 깊어졌다.

시종장은 왕의 속내를 간파한 듯 연달아 입김을 불어넣었다.

“왕비 전하께서도 친딸보다는 차라리 사생아를 제 딸이라고 내놓는 게 낫다고 하실걸요? 셋째가 실종된 자리에 막내딸까지 보내기가 어디 쉽겠습니까?”

“으흠.”

공연히 찔린 왕이 체면을 차리느라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도 고려할 만한 내용이라는 듯 그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국이 바보도 아니고, 사생아인 걸 뻔히 알 텐데…….”

“레이라가 어미를 닮아 반반하잖습니까. 사실, 말이야 말이지만 세레나는 솔직히 얼굴이…….”

“어허, 이놈이! 짐의 딸을!”

유난히도 자신을 쏙 빼닮은 세레나의 외모가 평가절하당할 때마다 왕은 자기가 욕보인 것처럼 예민하게 굴곤 했다.

썩 잘나지 않은 제 외모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왕으로서는 그런 세레나가 마냥 예쁜 딸은 아니었다.

애정이 없다 보니 3황자가 보내 주는 배상금에 눈이 멀어 제 딸을 찾지도 않았겠지. 시종장은 남몰래 슬쩍 눈을 흘겼다.

왕비가 또다시 자리를 보전하고 드러누우면 이번에는 정신병에 걸렸다고 하고 폐위시킨 뒤, 젊은 왕비를 들여 자식을 또 낳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것이 일부일처제인 델피온 왕가가 일정 수의 자손을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선대들이 그러했고 아피오수스 12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과 시종장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계단 아래 멀찍이 있는 출입구에서 근위병이 소리쳤다.

“레비탄의 3황자 야닉 리버스 님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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