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연한 척했지만 아피오수스 왕의 두툼한 손가락이 팔걸이에서 쉼 없이 까딱거렸다.
분명 융단을 밟고 걸어 들어오는데도 3황자가 내딛는 걸음마다 강렬한 존재감이 쿵쿵 땅을 울리는 듯했다.
왕을 알현할 때는 무장을 할 수 없다.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바스타드 소드를 순순히 넘긴 야닉은 좌우로 빽빽이 늘어선 왕의 병사들을 보고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돈 없다고 징징거릴 때는 언제고, 저를 지키는 근위대들은 값비싼 전신 갑옷으로 꽁꽁 무장시킨 것을 보니 절로 우스워진 탓이었다.
판금이라 안은 잘 익겠네. 짤막한 감상을 마친 그가 적당한 위치에서 멈추고는 왕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5년 만이군. 어서 오시게.”
왕은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로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미리 전령을 보냈으면 내 성대하게 맞이했을 터인데.”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르는 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미리 말했으면 얕은 수작이나 부렸을 테니.’
예의를 가장한 대화 뒤엔 전혀 다른 속내들이 넘실거렸다.
왕은 으흠! 하고 홀이 울리도록 목을 가다듬고는 입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이쯤에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때였다.
“금쪽같은 짐의 딸을 데려가서는 남편으로서 잘 보살피지 못할망정 실종이라니. 무슨 뻔뻔한 낯으로 온 건지, 쯧.”
그 말에 야닉이 작게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더니 여상히 대꾸했다.
“그래서 잘못을 고해바치고 5년간 꾸준히 변상하지 않았습니까. 왕께서 요구하기도 전에 알아서 말입니다.”
“뭣이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왕을 무시한 채 야닉은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신을 모시는 회당이자 귀족들을 맞이하는 그레이트 홀치고는 매우 검박한 풍경이었다. 5년 전 처음으로 봤을 때와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는.
“그간 보낸 액수면 성 몇 채는 새로 지었을 법도 한데.”
혼잣말이었으나 충분히 들릴 법한 크기였던지라 왕이 눈썹을 움찔거렸다.
야닉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왕을 마주 보았다. 껄렁한 태도와는 별개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눈빛에 델피온의 국왕은 호통치려던 것도 잊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뒷말은 굳이 잇지 않았다. 어차피 적선하듯 버린 돈, 왕이 어디다 쓰든 그의 알 바가 아니었다.
전령을 보내지 않고 직접 방문한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가장 확실하고 신속한 처리를 위하여.
“안부는 이쯤하고, 용건을 말씀드리자면 이혼 합의서를 받으러 왔습니다.”
이혼? 시종장과 별 소득 없는 시선을 교환한 왕이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고 돌아보았다.
“당사자가 없으니 제국법에 따라 부친의 서명이 필요합니다. 국새면 더 좋고.”
왕은 의중을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떴으나 야닉의 호박색 눈동자에서는 어떠한 의도도 읽을 수 없었다.
체통도 잊고 일으켰던 비대한 몸을 다시 옥좌에 깊이 묻으며 왕이 물었다.
“…실종 5년 후에는 절로 죽은 사람 취급하는 것이 자네 나라의 법 아니었나? 조금만 더 기다리면 새장가를 갈 수 있는데 굳이 이혼을 선택한 이유가 뭔지 궁금하군.”
왕의 질문에는 그렇게 여자가 고픈가? 하는 비아냥이 담겨 있었다.
“이유는 개인적인 사정이라 여겨 주시고… 제가 시간이 그리 많지가 않아서, 지금 바로 합의서에 서명을 해 주신다면 위자료를 지급하겠습니다.”
“……짐이 거절한다면?”
위자료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시종장이 대놓고 왕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잔말 말고 그냥 받으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시종장을 한심하게 보던 왕이 크게 혀를 찼다. 뇌물만 아니었으면 이런 모자란 놈을 자리에 앉히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왕은 다리를 넓게 벌려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국혼에 개인사가 어찌 있을 수 있겠나. 필시 다른 의도가 있을 터.”
“글쎄요. 왕께서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라 약조 정도는 드릴 수 있겠군요. 금액은 섭섭하지 않게 신경을 써 드리죠.”
모르겠다. 저놈의 의중을 모르겠어. 왕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구태여 돈까지 쥐여 주며 이혼을 하려는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정말로 요부에게 홀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들려 오는 소문엔 이방인에게 홀딱 빠져서 정신없이 구애하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설마하니 황자가 이방인과 결혼이라도 할 심산인가 싶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아내를 두고 외도했다고 길길이 날뛸 작정이었기에 시기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한데 이방인은 콧방귀를 뀌는데 저 혼자만 좋다고 매달린다 들었다.
아무래도 따지고 들기에는 어정쩡한 소문인지라 왕은 고심 중이었다. 사실이 아니라면 본인은 물론 나라의 체면까지 깎일 일이었으니.
다른 나라가 아니래도 최소한 지방의 제후와 관계를 맺는 것이 이득일진대, 아무런 배경도 없는 이방인과 결혼을 한다니 왕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아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야.
그 희박한 추측이 맞는 줄도 모르고 왕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재차 물었다.
“그래도 짐이 거절한다면?”
“그때는.”
야닉은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고요히 입매를 끌어올렸다.
“이혼장이 아니라 항복 문서에 서명하시게 될 겁니다.”
“무엄하다!”
시종장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좌우에 선 근위대가 일제히 검을 뽑는 쇳소리가 육중한 문 바깥, 대기하고 있던 로하겔 경의 귀에까지 들렸다.
로하겔 경은 고개를 털면서도 씹고 있던 육포를 계속 뜯었다. 밥도 안 먹이고 궁으로 직행한 주군 덕에 귀족 체면은 잠시 묻어 둔 참이었다.
호위기사가 문밖에서 육포를 질겅질겅 씹는 동안 야닉은 자신을 향해 있는 수백 개의 칼날을 보고도 그저 남의 일인 양 팔짱을 꼈다.
“제국이 델피온을 견제하느라 국혼을 맺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유감인데.”
왕이 있는 곳으로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야닉을 둘러싼 검들 역시 천천히 이동하며 따라붙었다.
야닉은 새삼 궁금해졌다. 저들이 달려들어 제 몸에 검을 찔러 넣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철갑옷마저 녹이는 자신의 화염이 더 빠를까.
손가락만 까딱하면 이루어질 후자는 별로 아름다운 광경은 아닐 것이다. 좋은 날에 험한 광경을 보긴 싫었다.
“황제 폐하는 그저 귀찮아서 델피온을 내버려 둔 겁니다. 아크만을 방치했던 것처럼 델피온도 그저 방치해 둔 거죠. 가져 봤자 골치만 아플 땅이니.”
야닉이 계단 앞까지 당도했을 땐 병사들과 그의 거리는 고작 서너 걸음 정도였다.
무기도 없는데 뭘 이리 겁을 내시나.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다.
“그래도 거저 주겠다면 덥석 받을 제후들은 꽤 될 겁니다. 아니면 내가 가져도 되고.”
차라리 그럴까. 야닉은 제법 진지하게 고민했다.
부패로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인 왕실과 척박한 땅, 배부름은 곧 죄악이라는 종교의 세뇌에 생기를 잃어버린 사람들.
‘차라리 내가 가지면 이보단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을 텐데.’
불현듯 치솟은 욕망이 색채를 가지고 눈동자를 가득 채울 듯이 번뜩였다.
“귀한 손님에게 이 무슨 실례란 말이냐. 무기를 거두거라.”
때마침 왕이 물러가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야닉은 가까이 있던 병사 가운데 투구에 난 십자 모양 틈새로 앳된 소년의 얼굴을 보았다.
끽해야 이든의 또래인가. 저 정도의 어린애까지 왕가를 위해 바쳐진단 말인가.
홀연히 사라진 미소 뒤에 싸늘하게 식은 불쾌함이 훅 끼쳐 들었다. 간단히 감정을 거둔 얼굴로 야닉이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이혼 합의서. 제가 친히 들고 왔는데, 관심이 있으신지.”
돌계단 위에 앉아 있는 왕을 보느라 그의 고개가 올라갔으나 왕은 꼭 자신이 저만치 아래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처 감추지 못한 부들부들 떨리던 손을 꽉 그러쥐고 왕이 시종장을 불렀다.
“……책상과 깃펜을 가져오너라.”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와중에 눈치까지 말아먹은 국왕의 조카사위는 경쾌한 발놀림으로 사라졌다.
* * *
쨍그랑!
이번에 박살 난 죄 없는 물건은 크리스털 잔이었다. 융단이 깔린 바닥에 던지면 큰 소리가 나지 않을 테니 세레나는 부러 벽에다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그 마녀가 사미 크랩턴을 죽인 게 틀림없다고! 그년은 이방인이 아니야, 마녀가 사람탈을 쓰고 내 남편도 꼬시고 내 기사까지 죽게 만든 거야!”
밖에서 고성방가를 들은 병사들은 며칠이 지난 뒤부턴 그러려니 하고 귀만 후비적거렸다.
“율리안! 내 아들을 데려와! 마녀가 내 아들까지 잡아먹기 전에 당장 내 앞에 데려오란 말이야!”
단단히 걸어 잠근 문을 쾅쾅 두드리며 세레나가 울부짖었다.
발로 걷어차고 있는지 제법 덜컹거리는 문을 보던 병사가 짧게 고개를 내저었다.
“지치지도 않나. 가만 보면 체력도 대단해.”
“끼니마다 들이는 식사는 또 다 드신다지 않나. 잘 때는 조용하기도 하고. 잘 먹고 잘 자면서 왜 저러시는지.”
힐끔 뒤돌아보며 다른 병사가 맞장구를 쳤다.
문 앞에서 병사들이 잡담을 나누는 것을 틈새로 엿듣고 있던 세레나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몇 끼 정도는 굶어야겠어.’
사실 사미 크랩턴이 죽든 말든 세레나는 큰 상관이 없었다. 제 손으로 목을 조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다는 짤막한 감상 정도가 전부였다.
남편도 없이 타지 생활을 하는 미혼모에 부유한 여성은 범죄의 대상이 된다. 사미 크랩턴은 그걸 막기 위해 데리고 있었을 뿐이다.
일은 고사하고, 천성이 게으르고 고약해서 노름으로 돈을 모두 잃고 저까지 허드렛일을 하게 만든 쓰레기.
5년 전 야닉이 쥐여 준 재산을 탕진할 때 본인이 즐겼던 사치는 까맣게 잊은 채 세레나는 사미 크랩턴에게 모든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더는 버티지 못할 만큼 빈털터리가 되자 사미 크랩턴은 포주 노릇을 하며 자신에게까지 사악한 마수를 뻗치려 들었다.
정어리를 손질하고 삯바느질을 하는 것까지는 참아 왔으나, 사미가 제안한 일은 왕녀를 떠나 여자로서도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름길이었다.
율리안은 고작 다섯 살.
얼굴은 저를 닮았어도 머리카락은 야닉과 같은 흑발이다.
그때는 어리고 뭘 몰라서 착각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당신의 아이가 맞았다고 둘러대면 어찌어찌 야닉이 받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세레나가 기억하는 야닉 리버스는 너그러운 남자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