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13화 (11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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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밤에 순결하지 않았던 것을 들키고 죽을 각오로 배 속에 아이가 있다고 고백했을 때,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증거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불쾌해하지 않고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았겠다면서 위로의 말까지 해 주지 않았던가.

로엘에 와서 목을 매고 싶어질 때마다 비참한 삶을 지탱하게 해 준 것이나 다름없는 친절함이었다.

그때 지레 겁먹고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아크만에 남아 그의 아내로서, 공주로서 계속 살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날이 갈수록 무겁게 세레나를 짓눌렀다.

야닉이라면 나중에 율리안이 혼외자식인 걸 들키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감싸 주었을 것이다.

밑도 끝도 없었던 추측은 로엘에 와서 비열하고 저급한 남자들을 만난 후 더욱 확고해졌다.

고작 열여덟이었다. 철없고 모든 게 두려웠던 나이. 한순간의 실수로 진창까지 떨어진 삶이 그녀는 늘 고통스러웠다.

당시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야닉이 곧바로 델피온으로 저를 보내 버릴까 봐 두려워 일부러 패악을 떨고 사치를 부렸다. 흥청망청 돈을 쓰면서 몰래 재산을 챙겨 도망갈 심산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야닉의 곁을 떠나지 않을 텐데.

그가 얕은수를 눈치채고 로엘에 보내 주었던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니, 어쩌면 늦지 않았는지도 몰라.’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그는 아직도 새 장가를 들지 않았다고 했다. 거기다 모국인 델피온에서도 어쩐지 조용했다.

자신이 돌아가기만 한다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혼인 관계가 유지될 터.

세레나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자상한 남자니 돌아가면 받아 줄 거야. 실수였다고 말하면 용서해 줄 게 틀림없어.’

어쩌면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몰라.

단단한 착각이 기정사실처럼 굳어져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렇게 세레나는 아크만으로 돌아왔다.

고작 몇 년 사이에 더욱 크게 부흥한 도시와 성은 그녀를 단숨에 들뜨게 했다.

‘전부 내 거야. 이 세레나 아피오수스의 것이야!’

만에 하나라도 야닉이 저를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정신병을 가장하고서라도 눌러앉을 셈이다.

어린 나이에 참혹한 일을 겪은 마음이 아픈 아내를 야닉이 내칠리가 없다. 일반인도 아니고 제국의 황자께서 그런 매정한 짓을 해서 추문을 일으킬 리가.

왜 진작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말고는 다른 생각은 일절 들지 않았다.

세레나는 회한의 미소를 머금고 넘어져 있던 의자를 다시 한번 힘껏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이번에는 와지끈 하고 의자 다리가 부러졌다. 이 정도면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못 봐 주겠지.

“율리안…….”

그녀는 문득 아들을 떠올리고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율리안을 보게 해 줘! 무사한지만 보면 된다! 마녀가 내 아들에게 해코지했으면 그땐 너희도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야!”

쿵쿵! 소음을 내며 발악하던 세레나는 엉엉 울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황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너희는 다 죽은 목숨이다! 그냥 확인만 할 테니 제발 율리안을 보게 해 다오…….”

이윽고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레나는 콧물을 훌쩍이면서도 얼른 귀를 가져다 댔다.

“……명령은 방이 아니라 본성에서 내보내지 말라는 거 아니었나?”

“집사장님이 앓아누우셨는데 그럼 누구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지?”

문을 지키고 선 병사들이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아무래도 책임 운운하는 소리에 슬그머니 걱정이 든 모양이었다.

“시에나! 시에나를 불러 다오!”

세레나는 목청껏 외쳤다. 그러자 두 사람 중 한 명이 어디론가 바삐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길 한참, 밖에서 하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님, 시에나입니다.”

“시에나! 율리안은 지금 어디 있지? 그 아이를 불러 주렴! 제발 부탁이야.”

잔뜩 쉰 목소리로 애처롭게 말하자 보지 않아도 마음 약한 시에나의 난처한 기색이 느껴졌다.

“율리안 님은 잘 지내고 계십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도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그러니 그만 진정을…….”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 아무도 믿을 수 없어! 정말 미치기 직전이란 말이야!”

날카롭게 쏴붙이는 고성에 문밖으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저… 그러면 1층 응접실까지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공주님이 계신 침실은 그… 정리가 필요할 테니…….”

세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러겠다, 얌전히 보고만 오겠다 연거푸 사정했다.

이제 하나뿐인 아들을 끌어안고 서럽게 목놓아 우는 장면을 사용인들에게 내보여 그들의 동정을 살 차례였다.

* * *

이방인의 저택에서 눈을 뜬 한 주임은 고갤 돌려 얇은 바늘이 꽂혀 있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양승원의 요청에 다위가 만들어 준 주삿바늘로 일정한 속도와 양의 액체가 주입되고 있었다.

그녀는 잠들기 전 양승원이 건넨 말을 되새기며 비로소 요새로 돌아왔다는 실감을 했다.

[가뜩이나 저체중인데 못 본 새 더 마르셨네요. 오늘은 수액 맞으시고 내일부터 부드러운 식사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바늘이 연결된 줄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기다란 봉에 걸쳐진 가죽 주머니가 보였다.

내용물이 거의 다 들어갔는지 쪼글쪼글해진 주머니를 보던 한 주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 머리맡에 엎드려 선잠이 들었던 미엘라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주임님? 주임님!”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미엘라가 문득 안쓰러워 그녀는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방에 가서 편하게 자요.”

“저, 저, 저 때문이에요! 주임님이 그렇게 되신 건 다 저 때문이에요…….”

또다시 울먹거리며 미엘라는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죄책감과 두려움이 파동이 되어 침대를 타고 고스란히 한 주임에게 전달되었다. 그녀는 가만히 미엘라의 등을 토닥였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미엘라도 몰랐는데 그게 왜 미엘라 탓이에요. 아니에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다. 다 괜찮다. 스스로에 다짐하듯 그녀는 몇 번이고 입 밖으로 힘주어 말했다.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정말 다 괜찮아요.”

용서받을 걸 알고 있었음에도 미엘라는 펑펑 울었다. 예정된 용서였음에 더 서럽게 울었다.

보통 때 같으면 벌써 성밖에 목이 걸렸을 중죄였다. 죄의 유무를 따져 심판받는 것은 귀족만의 특권이다.

한낱 사용인에 불과한 자신은 그저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땅에 머리를 처박고 감사해야 하건만, 막상 자신에게 죄를 묻지 않으리라는 예상이 맞아떨어지니 죄책감이 더더욱 밀려들었다.

하여 나중에 야닉이 돌아와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묻는데도 미엘라는 감사히 죽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 주임이 전부 괜찮다고 말한 순간 그녀는 제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이 전혀 아깝지 않게 되었다.

“죄송, 죄송해요. 흐윽…. 죄송해요. 주임님.”

짓무른 눈으로 올려다보니 한 주임 역시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한참을 오열하고 나니 수액이 다 떨어진 것이 보여 미엘라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정신 좀 봐! 제때 교체하지 않으면 피가 역류한다고 했는데!”

여분의 가죽 주머니를 가지러 가는데 한 주임이 갑자기 팔에서 바늘을 쑥 뽑아 버렸다.

“어, 어… 저는 저거 다시 꼽을 줄 모르는데….”

“그만 맞아도 될 것 같아요. 이거 달고 있으면 왠지 더 아픈 기분이라.”

이해는 안 가지만 어쨌든 더 아픈 것 같다니 미엘라는 이도 저도 못 하고 제자리에서 서성였다.

한 주임은 설핏 웃으며 이불을 걷었다.

“저 본성에 있는 도서관에 가고 싶어요. 나 좀 부축해 줄래요?”

“도서관이요? 갑자기 거긴 왜요?”

얼른 달려와 부축하며 묻는 미엘라에게 한 주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거기가 마음이 편해서요. 하룻밤만 거기서 자고 돌아올게요.”

작은 침상과 단출한 가구가 있는 벽 한 면이 통째로 유리로 된 공간.

서울의 제 원룸과 비슷한 기분이 드는 아득했던 곳이 그리웠다. 어쩌면 공간보다는 그날의 분위기가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세차게 눈이 휘날리는 바깥 풍경과 작은 등불이 어른어른 비추던 방, 세상에서 가장 따스하게 저를 바라보던 황금색 눈동자와 뜨거운 손길, 간질간질했던 마음.

[당신…. 웃을 때 소리도 나?]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너무 옛날 일처럼 아득했다.

[다음에 또 와도 되나?]

[언제든지. 그대가 오고 싶은 만큼.]

그 사람을 온전히 떠올릴 수 있는 공간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애달픈 심정이 쑥스러워서 마음이 편해서라고 둘러댔지만, 미엘라는 기꺼이 고갤 끄덕이며 외투며 신발이며 하나씩 꼼꼼히 챙겨 주었다.

“공주님은 어차피 방에 갇혀 있으니까 문제없을 거예요. 말도 마세요, 정말! 광견병에 걸린 개도 그보단 얌전할걸요.”

한 주임은 본성으로 걷는 내내 기운을 차린 미엘라가 세레나의 흉을 보는 걸 담담히 들었다.

죽다 살아난 처지가 되어 보니 이제 웬만한 일에는 동요도 되지 않는 걸까, 세레나가 성을 무너뜨릴 기세로 난동을 피워 댔다는 이야기에도 망가진 물건들이 아깝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다지 화도 나지 않는다. 어쩌면 세레나도 많이 아팠던 게 아닐까.

지난 시간 내내 괴로워서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고장 난 것이 아닐까 안쓰럽기까지 했다.

열여덟 살에 겪은 임신과 정략결혼, 그리고 처음 봤을 때의 그 초췌한 몰골.

나이를 떠나 괴로움의 무게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낀다. 자신만 해도 열여덟 살 때는 텅 비어 있지 않았던가.

곪을 대로 곪은 이에게 네가 뭐가 힘드냐며 타박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기가 버렸던 남자한테까지 되돌아왔겠는가.

그래.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지.

사람들이 돌을 던진다고 해서 이유도 모른 채 거들지는 말아야지.

* * *

그런 생각 따위를 하며 성으로 들어선 순간, 한 주임의 결심은 산산이 으깨져 버렸다.

“이 마녀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발을 들여?”

정신을 차리니 세레나의 손에 머리채가 붙들려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사람들이 달려들어 세레나를 떼어 내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우악스럽게 움켜쥔 머리카락이 죄 뽑혀 나갈 듯이 세레나는 손을 휘둘러 댔다.

“공주님! 놓으세요! 제발 좀 놓으라고요!”

시에나와 미엘라가 동시에 세레나를 붙잡고 끙끙거리는 사이 병사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로 엉거주춤 난색만 표했다.

평민에다 남자인 자신들이 함부로 공주의 몸에 손을 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른 여자 하인들이 세 명이나 거들고 나선 뒤에야 한 주임은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거 안 놔? 다들 경을 치고 싶은 거야? 저건 사람이 아니라 마녀라고! 사미를 죽이고 이제 나까지 죽이러 온 마녀란 말이야! 내가 죽으면 율리안도 죽이겠지! 붙잡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저 계집이란 말이야! 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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