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14화 (114/155)

)

한밤중에 본성 홀 안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악을 써 대는 탓에 사용인들이 금세 달려 나와 북적거렸다.

아직도 얼얼한 두피를 감싸고 있던 한 주임은 조금 전까지 세레나를 동정했던 것을 곧장 철회했다.

“…….”

아무리 마음이 아픈 사람이래도 머리털이 한 움큼 빠지면서까지 이해할 여유는 죽다 살아난 지금은 일절 없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할 틈도 없이 한 주임이 저벅저벅 세레나를 향해 걸었다.

“정신 좀 차려요!”

세레나의 양팔을 붙들고 있던 시에나와 미엘라가 놀라 동시에 고갤 돌렸다.

“……어?”

세레나가 그 누구보다 얼빠진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멍하니 눈만 끔뻑이는 그녀를 향해 한 주임이 매섭게 다그쳐 왔다.

“무서워서 도망쳤으면 잘 살든가, 힘들어서 돌아온 주제에 뭐가 그렇게 당당해요?”

“뭐, 뭐라….”

“스무 살이 넘었으면 성인이지, 왜 다섯 살 아이처럼 구는 거예요. 그러고도 엄마야? 책임감이라는 게 전혀 없어요? 당신이 뭔데 피해자처럼 굴어. 왜 호의를 고마워할 줄 몰라, 뭐가 그렇게 뻔뻔해? 용서를 구하고 제자리로 돌아왔으면 내가 알아서 떨어져 나갔을 거 아니야. 어차피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흥분해서 무어라 말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한 주임이 토해 내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당신처럼 형편없는 사람 때문에 나는. 나는…….”

알지도 못하는 당신한테 얼마나 죄스러웠는데.

아내가 있는 남자를 신경 쓰는 자신이 얼마나 끔찍했는데. 그래서 사랑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부정했는데.

기어이 폭발하고 나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야닉을 향한 마음은 줄곧 사랑이었다. 아마도 별궁에서 맨 처음 손을 잡혔던 순간부터.

죄책감으로 검을 들었다. 염치도 없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괘씸해서 아침마다 달리고 또 달렸다.

쓸모 있고 싶어서 노력했던 모든 것들은 그저 회피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야닉이 저를 보고 웃어 줄 때마다 설레면서도, 한편으론 모래알을 씹는 것 같은 기분이 동시에 들곤 했다.

뱃속에 시커먼 기름 덩어리가 꿀렁거리면서 몸집을 부풀릴 때마다 그녀는 혹독하게 몸을 굴리는 것으로 벌을 주었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역겨워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사실은 그가 안 보이면 보고 싶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고, 제가 어떻게 비칠까 전전긍긍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떨리고, 닿으면 설레고, 웃으면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깨닫고 나니 안개가 걷힌 것처럼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나는 야닉을 사랑해.’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는 말을 삼키며 한 주임은 참담한 심경으로 세레나를 바라보았다.

돌이켜 보면 어느 것 하나도 내 것이었던 게 없었다.

부모가 있었으나 보육원에 버려진 순간 없어졌고, 노력해서 쌓아 올린 트로피들은 불명예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코딱지만 한 월세방도 내 것이 아니었으며 용병 자리도 결국엔 내 힘으로 이뤄 내지 못했다.

본성에 있던 방에서 쫓기듯이 저택으로 옮겨졌다가 그나마도 나중에는 이한율에게 납치당해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됐다.

탈출하지 못했다면 영영 돌아오지 못했을 이곳. 여전히 내 것이 아닌 세레나의 자리.

본처에게 머리채를 잡힌 심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구차했다.

‘그냥 숲에서 죽을걸.’

차라리 그때 죽었더라면 밑바닥까지 감정을 드러낼 일도 없었을 거다.

내가 죽었다는 소식이면 세레나도 잠잠해졌을 테고, 세레나와 나를 두고 사람들이 눈치를 보는 일도 없었을 텐데.

왜 나는 끈질기게 살아서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걸까.

처음 소환되었을 때 갈록에게 들었던 ‘쓰레기가 섞였다’라는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냥 이한율을 따라가는 게 나은 선택이었을지도.

자조 섞인 허탈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뺨에 흐르는 뜨끈한 것을 손등으로 대강 훔치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변한 세레나가 보였다.

한 주임은 제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손바닥을 보는 찰나의 순간에도 생각했다.

‘안 되는데. 맨손으로 때리면 마력을 빼앗길 텐데.’

그래도 잠깐이면 괜찮겠지, 이 정도는 맞아 주자.

제 사정이야 어떻건 간에 세레나가 본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차라리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세게 맞으면 냉정해질 수 있을 것도 같다. 한 주임이 기꺼이 뺨을 내주고 각오를 다진 순간이었다.

그들을 둘러싼 공기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세레나.”

늦은 시간이라 부러 경비 초소를 침묵케 한 본성의 주인이 소리 없이 돌아왔다.

쥐 죽은 듯 고요해진 성에서 그의 목소리만 선명하게 울렸다.

야닉은 다시 한번 이름을 불렀다.

“세레나 아피오수스.”

그다지 높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은 단조로운 톤으로 무미건조한 음성이 날아와 심장에 박혔다.

‘울지 마. 무너지지 마. 침착해.’

한 주임은 한계까지 팽팽해진 활시위에 올라선 기분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미엘라, 우린 그만 돌아가요.”

낼 수 있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곤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을 옮겼다.

굳은 얼굴로 세레나를 보던 야닉의 시선이 한 주임에게 옮겨 가고, 좀 더 가까워졌을 땐 뜨거운 시선만으로 활활 타올라 잿더미가 될 것 같았다.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얼굴에 갈라진 입술, 원래도 마르긴 했지만 한층 더 살이 내려 형태가 도드라진 목 관절과 빗장뼈.

야닉의 눈썹이 꿈틀, 비틀렸다.

“제인.”

“공주님이랑 말씀 나누세요. 저는 좀 쉬러…….”

의식적으로 바닥에 시선을 둔 한 주임이 짧게 말하고 지나가려는 순간. 야닉이 홀린 듯이 팔을 붙잡았다.

붙잡았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가벼이 건드린 수준이건만 한 주임은 내면의 뿌리까지 뒤흔들리는 심정이었다.

“쉬러, 어디로?”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엔 불편한 심기가 짙게 깔려 있었다. 본성에 있는 멀쩡한 방을 놔두고 왜 문으로 가느냐는 물음이었다.

한 주임의 목구멍이 곧바로 뜨거워졌다.

“잠깐 저택에서 지내고 있어요. 나중에 이야기해요.”

힘을 주어 말하면 떨리는 목소리를 들킬까 봐 속삭이듯 빠르게 말하고 잡힌 팔을 스르륵 빼내었다.

그대로 야닉을 지나쳐 걷자 당황한 미엘라가 야닉과 한 주임을 번갈아 보다가 허둥지둥 뒤를 쫓아왔다.

한 주임은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묵묵히 걸었다.

문 앞에서 마주친 로하겔 경에게 작게 눈인사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렸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로브를 입고 있어 다행이었다.

곁에 서 있는 미엘라만이 눈치채곤 문지기를 향해 어서 닫으라 손짓했다.

황금으로 만든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동시에 한 주임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주임님!”

“쉬…….”

놀란 미엘라를 조용히 시킨 후 그녀는 부축을 받아 겨우겨우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는 길엔 미엘라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한 주임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미엘라는 말을 걸 분위기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소리도 없이 후드득 눈물만 떨구는 제 주인을 보며 미엘라는 그저 함께 울 수밖에 없었다.

* * *

5년 만이었다. 이제는 과거형이 된 아내 세레나를 보는 것은.

아내라. 새삼 그 단어가 낯설어 야닉은 조소를 흘렸다. 5년 전에도, 지금도 세레나는 그의 아내였던 적이 없었으니.

안주인 노릇을 한 적도 없었고 마음을 준 적도, 받은 적도 없는 그저 서류뿐인 아내가 아니었던가.

그가 기억하는 아내는 남편에게 내쳐져 델피온으로 끌려갈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던 어린 여자아이였다.

아이를 가졌다는 고백을 들었던 첫날밤 이후 야닉은 한 번도 그녀의 규방을 찾지 않았다. 자신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위협으로 느낄까 나름대로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부부관계를 강요하지도 않았고 생활에 간섭하려 들지도 않았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사라고도 했다.

잠깐이었지만 다른 남자의 아이라도 가엾이 여겨 그냥 받아 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눈 색이 어찌 됐든 황실은 관심도 없을 테고, 아크만에서 자신의 말은 곧 법이나 다름없었으니 그다지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실은 파혼하고 다시 결혼하는 것도 성가셨고 또 다른 귀한 신분의 여식을 험난한 북부에서 살게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 그대로 놔두고 있던 이유도 있었다.

원하면 이대로 쭉 지내도 된다고 했던 제안을 거절한 건 오히려 세레나 쪽이었다.

“조용한 곳에서 아이와 단둘이 살고 싶다더니.”

야닉이 비뚜름히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려움이 사라진 어린 아내는 마음 놓고 제멋대로 굴기 시작했다.

호의를 시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끼니마다 먹지도 못할 양의 음식을 차리게 하고 쉴 새 없이 물건을 사들였으며, 강박증처럼 끊임없이 외도를 의심했다.

그걸로 의심이 가신다면 그래, 못 봐줄 것도 아니었다.

임신의 영향인지 불안정한 심리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듯했다. 실컷 사치하고 깔깔거리다가도 한밤중에 발작 같은 몸부림을 치고 죄 없는 하인들을 마구 매질했다.

날뛰는 주기가 점차 짧아지고 강도가 세질 때쯤 참다 참다 제동을 걸었더니 세레나는 자신에게 촛대를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말했지. 자신을 놔 달라고. 먼 곳에서 아이와 조용히 살고 싶다고.

흉터도 남지 않은 눈가가 세레나를 다시 보자마자 여전히 피를 흘리는 듯 뜨끈해졌다.

야닉은 화려한 드레스에 어울리지 않는 희멀건 머리 가리개를 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과거 풍성한 곱슬머리엔 늘 보석 장신구가 반짝거렸고 그녀는 과시하듯 자신을 치장했었다.

목과 머리를 전부 가리는 윔플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아 놓고는 이제 와 고상한 귀부인 흉내라도 내려는 참인가 싶어 좀 우습기까지 했다.

뻔뻔하게 돌아와 감히 내 여자에게 손찌검하려던 전 부인을 어찌하면 좋을까.

당장 세레나를 눈앞에 앉혀 놓고도 야닉은 성치 않았던 창백한 얼굴을 떠올렸다.

아팠었나. 어디가 아픈 건가. 왜 아팠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당장에라도 쫓아가 묻고 싶은 것을 가라앉히고 일단은 응접실로 세레나를 부른 참이다.

먼저 이야기하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별수 있나. 착하게 말을 들어야지.

당돌하게 본성으로 기어들어 온 여자와는 길게 말을 섞고 싶지 않은지라 그가 가라앉은 눈으로 대답을 촉구했다.

“용건을 말해. 왕녀.”

왕녀. 결혼 전으로 돌아간 호칭에 세레나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당신한테 여자가 생긴 건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하는 얼굴로 야닉이 물끄러미 세레나를 응시했다.

“이걸로 우리 관계는 동등해졌다고 생각해요. 당신과 내가 실수를 하나씩 주고받은 셈이죠.”

세레나는 당당히 어깨를 펴고 허리를 바르게 세워 앉았다.

“전부 없었던 일로 하고 다시 시작해요, 우리.”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