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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15화 (11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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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다시 만난 남편의 모습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렇게 잘난 남자를 두고 왜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했었는지, 세레나는 고생만 가득했던 지난 5년이 문득 사무치게 억울해졌다.

미형에 가까웠던 얼굴은 좀 더 선이 강해지고 날카로워져서 보기만 해도 황홀해질 지경이었다. 탄탄하게 다부진 체격과 검대를 두른 늘씬한 허리, 길고 단단해 보이는 팔다리는 여심을 짜릿하게 자극하기 충분했다.

앙상한 허벅지에 배만 올챙이처럼 볼록 튀어나온 사미 크랩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완벽한 남성미를 왜 그때는 몰랐는지!

어느새 발그스름해진 얼굴로 세레나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당신도 알겠지만… 예전의 나는 어리고 미숙했어요. 당신과 떨어져 지냈던 시간 동안 후회도 많이 했고 반성까지 했죠.”

그녀는 고상한 동작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응접실의 낮은 기온에 벌써 식어 버린 사기는 미적지근했다.

“내가 정신을 차렸으니 이젠 당신 차례예요.”

후루룩 소리를 내며 식은 차를 마시고 내려놓은 뒤로 야닉의 미소 띤 얼굴이 드러났다.

‘왕녀인 내가 반성까지 했는데 다정한 당신이 외면할 리 없지.’

기묘할 정도로 적막한 분위기를 깨고 마침내 야닉이 입을 열었다.

“1년…? 아니, 하다못해 반년 전이었다면 받아 주었을지도.”

그가 품에서 두루마기 하나를 꺼내더니 테이블 위로 손수 펼쳐 보였다.

자연히 내려가는 시선으로 감정 없이 나지막한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안타깝지만 왕녀와 나는 이제 부부가 아니야. 그대의 아비가 친히 서명을 해 주었거든.”

야닉이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린 곳에는 델피온 국왕의 필체가 정갈히 놓여 있었다.

천천히 올라가자 ‘이혼’이라는 글자가 세레나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잡아채려는 동작은 야닉이 곧바로 거두어 가는 것으로 미수에 그쳤다.

세레나는 곧장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거짓말! 그건 가짜야!”

“못 믿겠으면 직접 델피온으로 가 보지그래.”

담담히 야닉이 따라 일어섰다. 바들바들 떠는 세레나를 보며 그는 느긋한 동작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서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고해. 실종이 아니라 제 발로 나간 거라고, 실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져 무서워서 도망쳤노라고.”

진득한 목소리가 스산하게 세레나의 귓가에 스쳤다.

“……그럼 당신은 죽게 될 테지.”

신경이 얼어붙을 듯 냉랭한 목소리에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야닉은 제법 자상한 손길로 세레나를 문가로 이끌었다. 하얗게 휘발된 머릿속에 무기력하게 그를 따르던 세레나가 우뚝 멈춰서서 고개를 들었다.

눈부신 태양 같았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맹수처럼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왕녀, 바로 그대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버지가… 전하께서 날 죽일 리가…….”

거기까지 말하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절 용서할 위인이었다면 5년 전 로엘이 아니라 고국으로 돌아갔을 터였다. 누구보다도 부왕의 성정을 잘 알았기에 타국을 선택한 건 그녀 자신이 아니었던가.

아피오수스 12세는 자신의 명예를 더럽힌 자라면 친딸이래도 망설임 없이 죽일 것이다. 설령 감싸 주더라도 늙은 원로들이 들고 일어서면 그때는 정말 방법이 없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자명한 사실에 낙담한 얼굴이 제법 볼만하다고 야닉은 짤막한 감상을 내렸다.

“가만 보니 부녀가 참 닮았더군. 내 돈을 가져다가 무엇 하나 건실히 쓴 게 없다는 점이.”

가진 것 하나 없는 이방인조차 나에게 무얼 사 주고 싶어 했던 것과는 달리.

작은 함지에 있던 금화 몇 푼에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웃으며 옷을 사 주겠다 하던 말간 얼굴이 떠올라 씁쓸했다. 그러니 더더욱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문까지 직접 열어 주어야 얌전히 나가려나 생각하던 찰나, 세레나가 다급하게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당신은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아. 전략을 바꿨군.

비틀린 미소로 내려다본 얼굴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물이 내비쳤다.

“결혼 전에 몹쓸 짓을 당하고 결혼 후엔 지독한 무관심 속에서 하루하루 피가 말랐어요.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당신이 나를 혐오하고 있을까 봐! 언제라도 더러워진 날 내칠까 봐! 그래서 차라리 죽자는 심정으로 위악을 떨었던 거라고요! 나라고 좋아서 당신을 떠난 줄 알아요?”

“……세레나.”

“한 번도 날 세심하게 들여다본 적 없어. 초야 후로 안아 준 적도 없고 매일 바빴다는 핑계로 어렸던 날 내팽개쳤잖아!”

원망을 담아 세레나가 울부짖었다.

목을 긁어내리는 쇳소리와 함께 주먹을 마구 휘두르는 탓에 야닉의 미간이 급격히 좁아졌다.

가슴, 어깨 할 거 없이 닿는 모든 곳에 퍽퍽 소리가 나도록 때리는 것 따위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그저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왕녀에 대한 불쾌한 심기만이 밀려들 뿐이다.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겠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사람들을 괴롭혔던 사실은 변하지 않아, 세레나.”

야닉이 세레나의 양팔을 꽉 잡고 화를 누르듯 낮게 을러댔다.

“돌아와서 그들에게 사과는 제대로 했나? 당연히 안 했겠지. 지금처럼 콧대 높게 오만하게 굴었겠지. 그게 바로 당신이라는 사람이야.”

“이방인들과 어울리다 보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지지 않고 세레나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난 왕녀고 그들은 내 아랫사람일 뿐이에요. 타고난 핏줄 자체가 다르다고요! 사과라니,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모욕? 당신이 했던 짓에 실추된 내 명예는 그럼 모욕이 아니었나? 조금이라도 날 생각했다면 그런 짓은 못 했겠지!”

“…말했잖아요. 난 너무 어렸고 미숙했다고요.”

“어리고 미숙한 모든 이가 당신처럼 행동하진 않아. 그걸 면죄부로 삼지 마.”

말문이 막힐 정도로 단호한 음성에 세레나가 이번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붉은 새틴 드레스 자락이 꽃봉오리처럼 둥글게 그녀를 감싼 모습은 꼭 생기를 잃은 조화 같았다.

야닉이 그대로 자리를 뜰까 봐 세레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로 머리에 씌웠던 천을 잡아 뒤로 넘겼다.

본성에 돌아온 후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 없었던 끔찍한 머리였다.

왕족이, 그걸로도 모자라 여인이 머리카락을 잘라 내다 팔 정도라면 비참했던 형편을 전부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때. 남자처럼 짧아진 머리를 보고도 내가 가엾지가 않아? 이래도 모진 말이 나와?

노골적인 의중을 담은 행동과 함께 세레나는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내 꼴을 좀 봐요…. 죄라면 이미 충분히 받았어요. 당신이 준 돈은 사미 크랩턴이라는 자가 날 속여 전부 날려 먹고 그걸로도 모자라 나까지 팔아넘기려고 했단 말이에요. 험한 일을 하느라 손도 엉망진창이 돼 버려서 이젠 아무리 예쁜 반지를 껴도 아름답지 않게 됐죠….”

“남편의 무관심이 서러워서 하인들을 매질했던 당신이 무려 5년이나 그걸 참아 왔고.”

기대와 달리 돌아온 것은 동정이 아닌 비아냥이었다.

드레스 색에 맞춘 붉은 루비 반지는 분명 한 주임에게 프러포즈용으로 주려던 것이었다.

요새를 비운 사이 가지고 온 상단에 기어이 빼앗은 모양이지. 어이없음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야닉은 더 화가 나기 전에 차라리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세레나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질척한 피로감에 온몸이 푹푹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이혼장도 확인시켰겠다, 골치 아픈 짓에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 시간에도 미련한 여자는 잠 못 이루고 혼자 끙끙 앓고 있을 것이 분명했으니.

찾아가기 전에 목욕부터 해서 몸과 기분을 씻어 내야겠다 싶었다. 결심 후 주저 없이 돌아서는데 뒤에서 세레나가 거칠게 소리쳤다.

“율리안은 어쩌고요!”

율리안? 그가 돌아보자 기다렸다는 듯 세레나가 달려들었다.

“우리 아들 율리안이요. 그 애는 당신의 아이란 말이에요!”

“……하.”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이봐.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결혼 전에 델피온에 가서 당신을 덮치기라도 했다는 거야?”

이제 목소리는 눈에 띄게 살벌해져 있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나쁜 일을 당했던 건 맞지만… 그 일로 아이가 생기진 않았어요. 단순히 착각한 거죠. 나는 어렸기 때문에 잠자리를 가지면 무조건 임신이 되는 줄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간절하게 올려다보며 세레나는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나도 당신의 아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산달이 지나도 해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너무 늦게 태어난 아이는….”

손까지 떨어가며 그녀는 힘겹게 고백했다.

“당신과 같은 까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어요.”

지미 크랩턴의 머리카락이 야닉과 같은 흑발이었던 건 분명히 이 순간을 위한 것이 틀림없다고 세레나는 확신했다.

지금 델피온으로 쫓겨나서 죽나, 몇 년 뒤에 율리안의 눈이 변하지 않아 걸려서 죽나,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큰 쪽으로 패를 거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닌가.

세레나의 예상대로 야닉은 몸을 굳혔다. 대쪽 같았던 태도에 ‘어쩌면’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게 분명했다.

“그자가 까만 머리가 아니었다는 걸 내가 어떻게 믿을까.”

한결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러나 여전히 경계하는 눈으로 야닉이 물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에 세레나는 망설이지 않고 얼른 답했다.

“날 농락했던 사람은 사미 크랩턴이에요. 그 사람은 갈색 머리고요. 지금은 행방불명이지만 얼마 전까지 그를 본 요새 사람들이 있으니 이들이 증명해 줄 거예요.”

사미 크랩턴은 아마 죽었을 것이다. 죽은 자가 무슨 증언을 할 수 있겠어.

죽어 버린 것이 천만다행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일이 복잡해질 염려를 덜어 준 이방인 여자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제게 해를 입혔던 자를 다시 본성으로 데려왔다…….”

야닉이 지적하자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변명거리를 떠올리고 있을 때 그가 매몰차게 돌아서서 문으로 향했다.

감정이 실린 몸짓에 커다란 문짝이 거침없이 열렸다. 야닉은 밖에서 대기하던 로하겔 경에게 즉각 명령을 내렸다.

“스캄에게 당장 사미 크랩턴을 찾으라고 해. 그리고 자네는 가서 율리안이라는 아이를 데려와. 지금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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