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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들겠습니다.”
그간 봐 왔던 자애로운 주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기에 로하겔 경 또한 깍듯하게 고갤 숙이며 물러났다.
“유, 율리안 님은 제가 모셔 오겠습니다!”
근처에서 불안하게 서성이던 시에나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달려가자 야닉은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올라왔던 감정을 추슬렀다.
“후…….”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레 묻는 말에 야닉이 잠시 문가에 몸을 기댔다.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지. 괜찮아.”
“…….”
냉정함을 되찾은 걸 확인한 후 로하겔 경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잠시 후 잠이 덜 깬 율리안이 눈을 비비며 하녀장의 손을 잡고 응접실로 들어섰다.
세레나에게 아이를 데려다주고 나가려는데 소파에 앉아 있던 야닉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문은 전부 열어 두고 그대는 가서 주교님을 모셔 오도록 해. 침소에 드셨더라도 위중한 사안이라 말씀드리고.”
“예. 알겠습니다.”
머리를 조아린 시에나가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 밖으로 모습을 감췄다.
명령대로 문은 활짝 열린 상태였다. 밖으로 아무도 모습을 보이진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수많은 귀가 이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한밤중에 돌아온 야닉과 세레나의 조우였기에 사용인들은 물론 소란을 듣고 몰려든 운영팀 역시 틈바구니에 끼어든 참이었다.
“웬일이니. 완전 대박 사건!”
박 차장이 공 대리의 팔을 찰싹찰싹 치자 김유정이 날 선 눈으로 그녀의 손을 치웠다. 기분 좋아진 공 대리만 싱글벙글이었다.
“염 부장님 가서 깨울까?”
“놔둬요. 또 눈치 없이 시끄럽게 떠들 텐데 뭘 깨워.”
김유정이 짧게 고개를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미친 이한율이 주임님 납치한 것만 해도 환장할 일인데, 이게 뭔 난리야. 진짜.”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에 박 차장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니고? 한율 씨가 진짜 그랬을까? 그냥 둘이 나간 거 아니야?”
“그냥 나갔으면 주임님이 미쳤다고 상자에 들어갔겠냐고요. 누가 봐도 범죄잖아요. 차장님은 아직도 그렇게 이한율 편을 들고 싶으세요?”
“무죄 추정의 원칙 몰라?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데 벌써부터 범죄자 취급은 좀 아니지, 유정 씨.”
“네. 네. 솔로몬 나셨고요.”
비죽거리는 김유정을 향해 박 차장이 발끈해서 입을 여는 순간 공 대리가 쉿! 하고 말을 막았다.
응접실 안에서 말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빠드득 이를 갈던 박 차장은 겨우 분노를 삼키고 응접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까부터 문밖에서 나는 소란스러움이 응접실 내부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세레나가 눈살을 구겼다.
“나를 대놓고 모욕할 셈인가요?”
부러 들으라는 듯 양 문을 모두 개방한 것이 못마땅해서 신경질적으로 꺼낸 말에 야닉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왕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질타와 모욕은 전부 내게 향하겠지. 왜, 걱정돼?”
“그, 그럴 리가요.”
눈을 피하며 얼버무린 세레나는 이번엔 품에 안은 자식을 어영부영 일으켜 세웠다.
“율리안. 일어나서 아버지께 인사를 드려야지.”
“……아버지?”
“그래. 네 아버지란다. 전부터 말해 줬잖니.”
눈곱도 못 떼고 불려 나온 율리안이 허리를 쿡 찌르는 손길에 못 이겨 쭈뼛쭈뼛 앞으로 걸었다.
“아, 안녕하세요. 율리안… 리버스입니다.”
로엘에서 오는 내내 줄기차게 외웠던 이름을 말하는 아이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자그만 입에서 나온 리버스란 이름에 야닉이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이름이 율리안 리버스? 그럼 예전에는 뭐였지?”
“율리안 크랩턴이요.”
일말의 고민도 없이 튀어나온 순수한 답변에 그가 피식 웃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건 세레나 한 사람뿐이었다.
“아버지가 없다고 손가락질당할까 봐 적당히 둘러댄 것뿐이에요.”
“누가 뭐라 했나? 아주 똑똑한 아들을 두었군.”
야닉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조소를 흘렸다.
“나이는?”
지극히 무던한 말투로 던진 질문에도 세레나는 강박적으로 반응했다.
“차라리 끌고 가서 심문이라도 하지 그래요?”
“그럴까?”
살풍경을 알 리 없는 율리안이 천진한 얼굴로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쳐 들었다.
“눈이 오기 전에 생일이 지났어서 이제 네 살… 아니, 다섯 살이에요.”
“오. 대단한걸. 글도 읽을 줄 아니?”
자상하게 바라보며 추켜세우는 말에 율리안은 기분이 좋아져서 방실방실 웃었다.
“아니요! 어머니가 바쁘다고 나중에 알려 준다고 했어요!”
“어머니가 바쁘셨구나.”
선생을 붙일 형편이 안 되더라도 직접 붙잡고 가르칠 성의조차 없었던 건가.
냉랭한 시선으로 돌아본 세레나는 대놓고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래. 생일에는 어떻게 지냈지? 맛있는 것도 먹고 물론 선물도 받았겠지?”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깍지를 낀 채 물었다. 작은 호기심이었다. 과연 내 아들이라 주장하는 여자는 황가의 자손을 어떻게 키웠을까 하는.
호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율리안이 대답하기도 전에 세레나가 언성을 높인 것으로 충분히 예상이 갔으니.
“내가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꼭 들어야겠어요? 누군들 하나뿐인 자식에게 온갖 좋은 것을 갖다 바치고 싶지 않았겠냐고요!”
율리안을 확 끌어당긴 세레나가 억울하다는 듯이 성토했다.
“날 비난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요! 그래 봤자 이 애가 당신의 자식이라는 건 변하지 않을 테니까!”
“피해자처럼 굴지 마. 율리안이 내 아이라면 당연히 책임질 테니.”
“……그게 정말이에요?”
“물론이지. 확인만 되면 제대로 입적해서 내 아이로 키울 거야. 당신에겐 로엘에 저택과 하인들을 내려 주지. 생활에 어려움이 없게 매달 돈도 보내 주고 가끔 아이를 보러 오는 것까지도 허용하겠어.”
희미하게 어렸던 세레나의 미소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로엘에 저택이라니. 생활비라니. 그녀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더러 지금, 애만 놓고 나가라고요…?”
“분명히 말하지만 날 떠난 건 당신이야. 이제 와 아이를 핑계로 눌러앉을 생각이라면 포기해. 받아 주는 건 아이뿐이야.”
야닉은 지독하게 건조한 눈빛으로 세레나를 응시했다.
“진짜 내 아들이라면 말이야.”
“황자님을 뵙습니다.”
야닉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들리는 노인의 음성에 세레나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결혼식에서, 그리고 광장의 장례식에서 본 적이 있는 노신관이었다.
“주교님.”
야닉이 재깍 일어나 알리온을 맞이했다.
“야밤에 늙은이를 불러내는 고약한 버릇은 언제쯤 고쳐지실는지.”
“송구합니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알리온이 익살스럽게 눈을 찡그렸다가 세레나와 율리안을 보고는 느릿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아드님은 처음 뵙는군요. 몇 살이시지요?”
허리를 굽혀 율리안을 살피는 신관이 불편해 세레나는 아이의 손을 거칠게 잡아챘다.
억센 손길에 율리안이 어깨를 옹송그리면서 눈만 또르르 굴렸다. 잔뜩 주눅 든 어린아이는 이런 취급이 몹시도 익숙해 보였다.
“오, 이런…….”
탄식 같은 한숨을 흘린 알리온이 지팡이를 짚고 몸을 바로 세웠다.
“왕녀 말로는 그 아이가 내 친아들이라더군요. 그러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오는 길에 마주친 바글바글한 군중과 양쪽으로 활짝 열린 응접실 문.
대놓고 판을 깐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야닉의 속내를 눈치챈 알리온이 슬쩍 눈을 흘겼다.
확증을 위해 자신을 부른 것이 못내 야살스러웠지만, 그는 기꺼이 동참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알리온은 고개를 돌려 세레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공주님께서는 세례를 받은 신자시니, 이 늙은이 앞에서는 거짓말을 하시면 안 됩니다.”
확인차 묻는 말에 세레나는 되레 발끈했다.
“내가 지금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건가? 사실이면 자네는 목숨으로 책임질 텐가? 아니면 나와 내기라도 하고 싶은 거야?”
“입이 험해졌군, 왕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야닉을 손을 들어 말린 알리온이 인자하게 웃었다.
“내기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다만 분명히 하고자 할 뿐입니다.”
선하게 접히는 알리온의 눈매와는 달리 다갈색 눈동자엔 은근한 압박이 실려 있었다.
“지금이라도 모든 잘못을 고하고 뉘우치면 신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답니다. 그분께선 아주 자비로우시니까요. 그러니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알리온은 세레나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었다.
“이분이 정녕 황자님의 아들이 맞습니까?”
“몇 년이 지나면 율리안의 눈이 황금색으로 바뀔 테니, 그때 다시 물어보지그래? 왜? 그 대단하신 신께서 지상에 내려와 판결이라도 내려 주지 않는 이상은 내가 하는 말을 못 믿겠나?”
세레나가 한 말은 신성모독에 가까웠다.
바깥에서도 기함해서 웅성거리는 게 느껴질 만큼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발언이었다.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진 분위기를 깨고 알리온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는 이제 웃고 있지 않았다.
“신께서 직접 개입하지 않고도 확인할 방법이 있지요.”
알리온은 세레나의 떨리는 눈을 무시하고 다시 율리안을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글을 읽을 줄 아십니까?”
율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잔뜩 겁을 먹은 율리안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그가 몸을 돌려 응접실의 먼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벽 모서리까지 이동한 그가 고갯짓하자 이번엔 야닉이 세레나에게서 율리안을 떼어 내고 알리온과 사선 반대편으로, 문 앞까지 아이를 데려갔다.
“지금, 지금 뭣들 하는 거야?”
중간에 홀로 선 세레나가 황망한 눈으로 야닉과 알리온을 번갈아 보며 소리쳤다.
“친자 확인.”
야닉의 답을 듣고서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에 당혹감이 가감 없이 내비쳤다.
구석에 선 알리온이 주머니를 뒤적이다 손에 잡히는 걸 스스럼없이 꺼내 들었다. 그것을 슬쩍 들어 올리더니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자, 이게 무엇이지요?”
주름진 손가락으로 든 것이 무어냐 묻고 있었다.
“율리안. 저게 무엇이지?”
야닉이 다정히 건넨 말에 세레나의 눈치만 보던 율리안은 목을 길게 빼고 초점을 맞추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고 눈을 깜빡이다가 게슴츠레 떠 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꼭 맞히고 싶은데. 그래서 어머니의 칭찬을 듣고 싶은데. 아이의 생각은 행동이 되어 고스란히 겉으로 드러났다.
머지않아 풀죽은 율리안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웅얼거렸다.
“너무 멀어서 안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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