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17화 (117/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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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럼 조금만 더 가까이 가 볼까.”

격려하듯 어깨를 토닥인 야닉이 세 걸음 앞으로 율리안을 이끌었다.

“자, 이 정도면 어때.”

“우움…….”

열의에 가득 찼던 얼굴이 금방 시무룩해졌다.

세레나는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에 어쩐지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쪼끔만 더 앞으로 가면 보일 것 같은데….”

슬쩍 눈치를 보는 율리안에게 야닉은 너그럽게 미소 지었다.

“그럴까.”

허락이 떨어지자 세레나의 앞까지 신나게 달려온 율리안이 상체를 한껏 내밀더니 이내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알겠다! 열쇠! 저건 열쇠예요!”

알리온이 흘흘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열쇠를 들고 다가왔다.

“바로 맞췄습니다. 이건 아주 작은 열쇠지요.”

“내 말이 맞죠? 내가 열쇠라고 했잖아요!”

좋아서 제자리에서 방방 뛰던 율리안이 칭찬을 바라며 세레나에게 달려가 폭 안겼다.

세레나는 멀거니 아이의 손가락 두 마디에 불과한 자개함 열쇠를 들여다보았다.

장난도 아니고 이게 무슨 친자 확인이란 말인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은 어떠한 추측도 내리지 못하고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아주 잘했어. 이제 그만 돌아가서 마저 자야지. 시에나.”

상냥하게 웃어 주던 야닉이 대기하고 있던 시에나를 불렀다.

뽀얀 얼굴에 홍조가 올라온 율리안이 연신 정답을 맞혔다고 재잘대면서 하녀장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야닉과 알리온이 자리에 앉고 응접실이 고요해질 때까지 세레나는 꼼짝없이 서서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앉아.”

정적을 깨는 야닉의 차가운 목소리에 엉거주춤, 세레나가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며 소파 끝에 걸터앉았다.

조금 전까지 아이를 향해 세상 누구보다 자애롭게 웃어 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알리온마저 싸늘하기 그지없는 메마른 눈길로 세레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손끝이 차츰 식어 가는 느낌에 그녀는 절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죠?”

불안한 마음은 자연히 공격적인 어투로 이어졌다.

“그딴 장난질로 친자 확인이라니, 나를 능멸하려는 건가요?”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향해 세레나가 따지듯 묻자 야닉이 차게 식은 찻잔을 들었다.

“말했잖아. 내 아들이 맞는지 확인했을 뿐이라고. 그리고 결과가 나왔지.”

소리 없이 차를 마시고 내려놓는 동작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황가의 후손이 아니군요.”

알리온이 명료하게 결론지었다. 동시에 세레나가 크게 웃었다. 과장된 웃음소리가 저 멀리 복도까지 왕왕 울려 댔다.

“비열하고 유치한 연극으로 기어이 날 우스갯거리로 만드시겠다?”

뚝 웃음을 그친 세레나가 제멋대로 결론짓더니 푸른 눈을 형형히 빛냈다.

“제국의 황자라는 분께서 신관까지 데려다가 앉혀 놓고 아내를 농락하는 한심한 놈팡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죄를 물을 수 있을 정도로 무엄한 폭언이 쏟아지는데도 야닉은 그저 계속해 보라는 듯 심드렁할 뿐이었다.

그녀를 말리는 건 오히려 알리온이었다.

“언동을 주의하시지요. 듣는 귀가 많습니다.”

“어차피 들으라고 죄다 불러 모은 거 아니야!”

체면은 일찌감치 갖다 버렸다. 분노에 휩싸인 세레나는 황자고 고위 신관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네까짓 게 감히 무어라고 황가의 후손을 들먹거려! 한낱 노친네가 무얼 안다고 감히!”

“제왕 기아스의 후손들은 본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알리온이 서릿발 같은 매서운 눈을 하고 말을 잘랐다.

일순간 기에 눌려 꼼짝없이 굳은 세레나를 향해 그가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황금색을 띠는 눈동자와 긴 생명력. 여기까지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고, 모르는 이들이 더 많은 사실이 하나 더 있지요.”

늦은 시간 알리온을 데려온 이유는 하나였다.

구교를 책임지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주교의 발언은 공신력이 있다. 그의 행동과 언사에는 민중을 귀 기울이게 하는 막대한 신뢰가 뒷받침되고, 그만한 책임감도 따른다.

알리온의 판결에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가정을 확신으로 만드는 확증이 필요했기에 야닉은 그를 불러 모두가 듣는 곳에서 율리안을 시험했다.

‘이런 식으로 할 생각은 없었지만.’

세레나가 돌아올 거란 예상을 하지 못한 건 아니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세상 물정도 모른 채 살아온 왕녀가 바깥에서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언제고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막연히 추측하기는 했었다.

정신을 차리고 바짝 엎드려 저자세로 나온대도 받아 줄까 말까 할 텐데, 세레나의 태도를 보니 알량하게 남아 있던 동정마저 싹 사라졌다.

정확히는 한 주임의 몰골을 본 순간 동정심이 머물렀던 자리에 분노가 대신 들어찼다.

안 되지, 세레나. 당신은 한 주임을 건드려서는 안 됐어. 그러게 도망친 곳에서 얌전히 있었어야지.

모든 것은 그녀가 자초한 일이었다.

“정녕 황자님의 핏줄이라면 응접실이 아니라 저 멀리 복도 끝에서도 이 작은 열쇠가 보였을 겝니다.”

알리온이 자그만 황색 쇠붙이를 들어 올렸다.

“후손들이 가지는 특별한 능력에 월등한 시력도 포함이 되는 까닭이지요. 그러니….”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괴괴한 적막을 깨고 그가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율리안 님은 황손이 아닙니다.”

제 역할을 톡톡히 마친 신관이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하고 자리를 뜰 때까지 세레나는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홀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망연하게 앉아 있는 그녀 주위로 분주한 발소리와 웅성거림이 아득히 멀어져갔다.

“왕녀를 사원으로 모시고 손님 접대에 소홀하지 않게 신경 쓰도록. 왕녀의 아들은 오늘만 본성에서 재우고 내일 보내지.”

먹먹한 귓가로 야닉의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날아와 꽂힌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돼.

이 말만을 되풀이하던 세레나는 곧 사용인들에 의해 바깥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 그야말로 완벽한 축객령이었다.

* * *

가능하면 안 자고 야닉을 기다리려 했는데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몸이 문제였다.

눈물까지 한바탕 쏟아 내니 가뜩이나 쇠약해진 육체가 이젠 한계라는 듯 곧장 납덩이같이 무거워졌다.

미엘라의 성화에 침대에 누운 한 주임은 덮쳐 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곤히 잠들었던 건 분명한데,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에서 귀만 열려 있었던 것 같다.

미엘라가 저를 부르는 소리,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양승원과 포라킨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한데 뒤섞여 분간 없이 정신을 흩트렸다.

혼미한 와중에도 야닉의 목소리만은 선명했다.

“다른 이상은 없는 건가?”

“피로가 많이 쌓이면……. 충분히 휴식을…….”

양승원이 무어라 조곤조곤 설명하는 소리는 군데군데 끊겨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윽고 다시 고요해졌다.

감고 있는 눈꺼풀 위로 빛과 어둠이 차례로 지나쳐가기를 수차례.

잠깐씩 정신이 들었을 때도 꼼짝하지 않았던 눈이 어느 순간 홀연히 떠졌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한 주임은 오른손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따라 스르륵 고갤 돌렸다. 아직 명료해지지 않은 정신에도 가슴 한구석이 짜르르해지는 광경이었다.

“…….”

그녀는 제 손과 단단히 얽혀 있는 남자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엄지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그러자 맞닿은 손이 놀란 듯이 움찔거린다.

“…야닉.”

들릴 듯 말 듯 작게 속삭인 말에 누워 있던 남자가 단숨에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제인…….”

잔뜩 가라앉아도 듣기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 작열하는 불꽃처럼 일렁이는 황금색 눈동자, 한껏 일그러뜨린 까만 눈썹.

어딘가 우는 것도, 웃는 것 같기도 한 쓰린 얼굴로 야닉이 아프게 저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어쩐지 뜨거운 무언가가 목에 울컥 걸렸다가 가슴으로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이리저리 치이고 짓밟혀 뭉개졌던 눈덩이 같은 몸과 마음이 봄바람에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깊게 팬 상처에 간질거리는 새살이 솟았다.

그러다가도 왜 이제 왔냐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당신이 아느냐고, 죽을 만큼 보고 싶었다는 묵혀 둔 말이 금방 혀끝까지 차오른다.

아니, 지금은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휘몰아치던 매캐한 감정들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야닉이 지금 곁에 있다는 충족감만이 그녀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한재인에겐 그거면 충분했다.

“어서 와.”

“…….”

느지막이 건네는 인사에 그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한 주임은 가만히 손을 들어 어깨에 닿은 그의 머리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보드라운 머리칼에서조차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얼굴을 묻은 채로 다녀왔다고 속삭이는 음성을 들으며 한 주임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때로는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정들이 있다.

손가락 같은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몸짓이라거나, 깨어난 나를 보는 당신의 눈빛 같은 거라든지.

아. 이 사람은 날 사랑하는구나.

내가 널 사랑하는 만큼은 아닐진 몰라도, 너도 날 사랑하고 있었구나.

언제부터 내 안을 너로 가득 채웠을까. 공허했던 삶이 언제 이렇게 빠듯하게 차올라 넘칠 만큼 뜨겁게 끓어오르기 시작했을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길 바라며 말없이 그를 쓰다듬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잘게 떨리던 어깨에 야닉이 고갤 들었다.

“울지 마. 그대가 울면 어찌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나는… 나도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눈꼬리를 타고 흐르던 것을 손가락으로 훔쳐 낸 야닉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늘 여유가 넘쳐흐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분주하게 얼굴을 쓸어 대는 그를 보고 있자니 우는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나 배고파.”

“하…….”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는지 야닉이 재차 얼굴을 묻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에 그녀는 이불 속에 있던 발가락을 꽉 오므렸다.

“당신은 정말 이상해.”

“내가 왜 이상해?”

코를 한번 훌쩍이고 묻자 그가 고갤 들더니 콧잔등을 약간 찌푸렸다.

“툭하면 쓰러지기나 하면서 무모하기란 야인들보다 더하지. 약한 것 같으면서도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고.”

그러면서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어쩌다가 이런 여자에게 반했는지.”

이번에는 뺨이었다. 끔뻑끔뻑하던 한 주임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혼자 둬서 미안해. 그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고. 다시는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게.”

아, 설마.

한 주임은 정확히 입술을 향해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꺾는 야닉을 온몸으로 밀어냈다.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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