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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18화 (118/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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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안간 밀쳐진 야닉이 조금 의외라는 듯 그녀를 보았다. 설마 입맞춤을 거부당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당황한 한 주임을 보던 그가 문득 깨달은 듯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레나와는 완벽하게 정리했어. 이혼장에 서명도 끝났고, 율리안도 내 아이가 아니야. 궁금하면….”

“그게 아니라… 저기, 나 먼저 씻고 싶은데…….”

한 주임은 울상을 지었다.

혼곤했던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납치된 날부터 지금까지 목욕을 못 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밤낮으로 산속을 걷고, 엎어지고, 구르기까지 했다. 요새에 돌아와서도 며칠이나 지났는지도 모를 만큼 기절하게 잤는데…….

‘가만, 지금 내 몰골이 어떻지?’

그녀는 파랗게 질려서 머리와 얼굴을 더듬거렸다. 다음엔 튀어 오르듯 침대에서 빠져나와 화장대로 걸었다.

갓 태어난 사슴처럼 다리가 후들거리는 줄도 모르고 거울 앞에 섰다가 이내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에 가까운 날숨이었다.

조금 야위었을 뿐, 염려했던 수준의 거지꼴은 어찌어찌 면한 것 같았다.

“그대가 잠들었을 때 미엘라가 몇 번 몸을 닦았어. 머리도 감겨 주고.”

거울 속에 비친 야닉은 얼핏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머리까지 감겨 줄 정도면 꽤 부산스러웠을 텐데,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자고 있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그댄 진흙 속에 파묻혀 있어도 아름다워. 이리 와.”

“그래도 씻을래. 나 얼마나 잤어…?”

민망한 어조로 물었더니 그가 잠시 헤아리는 듯하다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닷새 정도. 주교님 말로는 취발론의 영향인 거 같다더군. 그럼 씻고 나와서 식사 먼저 할까.”

야닉은 한 주임을 다시 침대로 이끌어 앉히고는 종을 흔들어 불침번을 서던 하인을 불렀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들어온 하인에게 식사 준비를 이른 그가 이번엔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물을 받는 소릴 듣고 있던 한 주임은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이한율의 일부터 귀환석을 가져온 일, 세레나를 정리했다는 그의 말까지. 그에게 할 말도, 들을 말도 너무나 많았다.

이한율은 어떻게 되었을까. 페어리들이 죽지는 않았다고 했는데, 깨어나서 도망쳤을까? 설마 다시 찾아오진 않겠지?

그러고 보니 챙겨온 귀환석들은 어디 있지? 생각보다 많이 가져오지 못했는데. 혹시 모자라진 않을까?

세레나 공주는 어떻게 되었지. 공주말로는 분명 사미 크랩턴이 죽었다고 그랬어. 왜? 어떻게? 설마 그것도 이한율이?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그녀는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한꺼번에 터진 일을 순차적으로 처리하는 건 회사에서 질리도록 겪었는데, 여기서까지 비슷한 두통을 느낄 줄이야.

“수첩. 내 수첩이 어디 있더라.”

기한과 중요도에 따라 해야 할 일을 수첩에 나열하던 습관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홀연히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던 한 주임은 곧바로 탄식을 흘렸다. 수첩 스프링에 달려 있어야 할 볼펜이 없다.

‘세레나 공주가 가져갔었지, 참.’

얼추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던 대화 순서가 한순간에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그녀는 세레나의 일을 먼저 묻기로 결심했다.

* * *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갔다가 느긋하게 씻고 나왔을 땐 방 안이 아까보다 한층 더 밝아져 있었다.

테라스 창으로 비치는 오전의 햇살이 방 안을 비추고 작은 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 옆에 놓인 식탁 위엔 둥근 커버로 덮인 접시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식욕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 주임은 테이블에 앉아 양피지를 들여다보고 있던 야닉을 보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간 그에게서 희미한 비누 냄새가 풍겼다.

“본성에 갔다 왔어?”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야닉을 보고 묻자 그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트라야누스 관사. 거기에도 내 숙소가 있거든. 본성은 지금 공사 중이야.”

빼곡한 글씨가 가득한 양피지를 미련 없이 내려놓은 그가 일어나더니 한 주임을 화장대로 이끌었다.

도톰한 방석이 깔린 의자에 그녀를 앉힌 다음엔 자연스러운 절차인 것처럼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한 주임은 얌전히 몸을 맡긴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사? 갑자기 왜?”

“왕녀가 내 방을 아주 초토화해 놨더군. 이번 기회에 전부 뜯어고치려고. 왕녀가 쓰던 방도 전부 들어내서 창고로 바꾸고.”

야닉이 바람을 쐬어 주며 여상히 대꾸했다.

왕녀. 그가 세레나 공주를 부르는 호칭이 어느샌가 이름에서 신분으로 바뀌었다.

그 작은 변화에도 참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공식적으로 이혼을 했다는 사실보다도 거리감이 생긴 호칭 하나가 이렇게 감동적일 수가 있을까.

한 주임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뺨에 가져다 대고 살포시 눈을 감았다.

“…….”

가만히 그녀를 보던 야닉의 눈이 오래지 않아 심각하게 바뀌었다.

“왜 또 울어. 어디가 아픈 거야?”

“그냥. 따뜻해서.”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말하는 목소리가 작게 떨려 왔다.

손이 너무 따뜻해서, 이게 나무가 보여 주는 환상이 아님을 알아서. 그게 감격스러워 눈물이 났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미간을 좁히고 저를 살피는 그가 갑자기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한 주임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야닉을 껴안았다. 까치발을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단단한 어깨 위에 고개를 묻었다.

이제 마음을 의심하고 외면하는 일은 더는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걸 포기하고 이한율에게 끌려갔더라면 두 번 다시 야닉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평생을 후회와 그리움 속에서 살 수도 있었다.

후회로 가득한 삶은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는 열여덟 살 때 이미 충분히 겪었다.

그녀는 지나간 모든 시간을 위로하듯 힘주어 그를 안았다.

“…….”

느닷없는 포옹에 놀라 몸을 수그렸던 야닉도 가만히 그녀의 등과 허리에 손을 두르고 마주 안아 주었다.

가볍게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반응한 가슴이 쿵쿵 울렸다. 제 심장 소리 못지않게 비슷하게 빠른 고동이 맞붙인 몸으로도 전해졌다. 그 역시 뜨겁게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뻤다.

한 주임은 참고 또 참아 왔던 말을 내뱉었다. 네가 보고 싶었다고. 그러자 그녀를 안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마저 들었다.

“이번엔 피하지 마.”

귀에 대고 달콤하게 을러댄 그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입술을 포개 왔다. 그녀는 목에 둘렀던 손에 깍지를 끼고 눈을 꼭 감았다.

입맞춤은 깊고 진득하게 이어졌다. 서른 살에 경험하는 첫 키스는 풋풋함보다는 애절함이 더 컸고, 눈물에 번진 짭조름한 맛이 났다.

마음 한구석에 세워져 있던 벽이 무너지자 한 주임은 이제 그를 온전히 갖고 싶어졌다.

그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싶었다. 몸과 마음에 온통 그를 새기고, 그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새기고 싶었다.

한참을 이어 가던 키스는 야닉이 먼저 손을 뗀 것으로 끝이 났다.

“이제 그만.”

“왜.”

고집스럽게 손을 놓지 않는 그녀에게 야닉은 몇 번 더 짧게 입을 맞춰 주고는 어느 순간 결심한 듯 팔을 잡아 내렸다.

“그대 몸을 더 추슬러야 해. 식사도 하고, 그리고 나도…….”

난감하게 뒷말을 삼킨 그가 서둘러 문을 향해 걸어갔다.

매정할 만큼 단호한 동작에 한 주임의 얼굴이 붉어졌으나 부끄러움보단 그에 대한 갈망이 더 컸다.

살짝 부어오른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다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녀는 큰 보폭으로 벌써 문 앞까지 간 그를 쫓아 거의 뛰는 모양새로 발을 놀렸다.

야닉을 지나쳐 앞을 가로막았을 땐 그가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빨갛게 물든 야닉의 귓바퀴를 보니 어떤 투지 같은 것이 끓어올랐다. 한 주임은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로 손만 뒤로 뻗어 달칵, 문을 잠갔다.

시간마저 멈춘 듯한 침묵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무슨 뜻이야?”

그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딘가 화가 나 보이는 것 같기도 한 낮은 음성에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네가 생각하는 거…….”

“내가 생각하는 게 뭔 줄 알고.”

당황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금안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시선만으로도 낱낱이 파헤쳐져 심연까지 낯 뜨거운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라서 무섭지 않다.

한 주임은 한 발자국 앞으로 야닉을 향해 내디뎠다.

“내가 왜…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해?”

다시 또 한 걸음. 자연히 고개가 올라가고 이제 그의 얼굴에선 그녀와 같은 종류의 열망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손을 뻗는 순간, 부지불식간에 다리가 공중에 확 떠올랐다. 누구의 심장 소리인지 알 길 없는 박동이 귀를 어지럽혔다.

한 주임은 높아진 위치에서 고개를 숙여 그의 머리를 감싸 안고 갈급하게 입술을 맞붙였다.

하체를 받쳐 들고 침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 야닉이 그녀를 눕힌 후 곧장 위로 올라왔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이젠 나도 어쩔 수 없어.”

그가 자신만큼 참아 왔다는 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으나 한 주임은 마음 놓고 기뻐하지도 못했다. 각오는 했지만 막상 닥쳐온 상황엔 긴장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모르게 밀어내듯 손을 들었는데, 간단히 잡아채 오히려 제 목에 두르게 하는 그였다.

“참고로.”

호흡이 닿을 거리만큼 얼굴을 바투 붙인 그가 마지막으로 통보했다.

“‘안 돼’는 안 돼.”

그러곤 무어라 항변할 겨를도 없이 입이 막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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