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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어도 괜찮다고 했는데 야닉은 고집스럽게 음식을 물리고 새로 가져오라 명했다.
한 주임이 요거트로 허기를 달래는 동안 차가워진 음식들이 전부 나가고 따끈한 새 접시가 테이블 위로 빼곡히 차려졌다.
귀리를 섞어 진득하게 끓인 닭고기 수프를 후후 불어 입 안에 넣자 뼛속까지 황홀하게 녹아내린다.
세 숟가락을 연달아 먹으니 얇게 저며 부드럽게 쪄낸 돼지고기가 코앞에 들이밀어졌다.
“내가 먹을게…….”
“많이 먹어야 해, 그대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가 내민 음식을 받아먹자 그제야 만족한 손이 거두어졌다.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어.”
열심히 오물거리는 한주임을 물끄러미 보던 야닉이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식사에 여념이 없던 한 주임이 응? 하고 되묻자 그가 아니, 하고는 다음 음식을 입에 넣어 주었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있었다.
배도 부르고 방도 따뜻하고, 씻겨 주겠다는 그를 한사코 밀어 냈다가 다리가 후들거려 결국 포기하고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겼다.
차라리 미엘라의 도움을 받을까도 생각했지만, 제 몸을 보고 빠르게 생각을 접었다.
뽀얀 김이 올라오는 욕조에 앉은 한 주임은 노곤해지는 느낌에 자연히 등을 기댔다.
뒤에 앉은 야닉이 그녀의 어깨에 따뜻한 물을 흘리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졸리면 자. 얌전히 침대에 데려다 놓을 테니.”
“…바쁜 거 아니야? 다녀와서 할 일도 많을 텐데.”
편안해서 녹아 버릴 것 같은 신체와는 별개로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다른 일들은 둘째치더라도 곧 들이닥칠 제국군을 대비하려면 분명 한가롭게 있을 때는 아닐 텐데.
요새로 돌아오자마자 제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그가 좋으면서 미안하기도 하고, 그만 나가서 일을 보라고 하려다가도 조금만 더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치열하게 경쟁을 펼쳤다.
야닉이 그런 그녀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제 어깨에 좀 더 기대게 했다.
“급한 건 서면으로 전부 처리했어. 로하겔 경도 있고. 내가 며칠 더 자리를 비운다고 큰일이 나진 않으니 그대는 그대만 생각해.”
“그래도 슬슬 나가 봐야…….”
말끝을 흐리자 이번엔 단호한 음성이 돌아왔다.
“당신 몸에 긁히고 부딪친 상처가 얼마나 많은 줄이나 알아? 회복마법도 안 듣는 걸 보면 다쳤던 게 며칠에 걸쳐서 아물고 있었다는 건데,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말하면서 감정이 올라왔는지 잠시 호흡을 고르는 듯한 숨결이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내가 없는 곳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할 지경이야. 그대가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으면 책임이 있는 자들은 전부 성밖에 거꾸로 매달리고도 남았어.”
“그러지 마!”
핏기가 싹 가셔서 돌아보자 자신보다 더 괴로운 얼굴을 한 야닉의 모습이 보였다.
분노와 후회, 자책이 뒤섞인 금빛 눈동자가 아프게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뜨거운 감정에 한 주임은 곧장 목이 멨다.
다급하게 돌아앉아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자 야닉이 그 위로 가만히 제 손을 얹었다.
“죽은 것처럼 미동도 없이 잠든 그대를 보는 내내 생각했어. 두 번 다시 그댈 혼자 두지 않을 거라고. 다시는 그런 일을 겪게 하지 않을 거야.”
아무리 마력을 쏟아부어도 밑 빠진 독처럼 채워지지 않던 한 주임이었다.
파도에 휩쓸리는 바닷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제 마력을 보며,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몸을 잠식할 때쯤에야 그녀는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기분이란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다. 한평생 경험하지 못할 줄 알았던 마력 고갈을 느낄 때까지 그는 온 힘을 끌어다 바치고 또 바쳤다.
한 주임이 손가락을 움직였을 땐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라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깨어나기 전 그녀는 자는 와중에도 이따금씩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당신도 나처럼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걸까.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하고 망망대해를 헤매고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외딴섬에 있을지라도 부디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곳이기를, 손을 잡고 데려올 수 있는 곳이기를. 그는 절박하게 기도했다.
그러니 온전히 깨어난 그녀를 눈에 담아야 했다. 그녀를 잃을까 두려워했던 마음을 안도로 채워 놓기엔 고작 며칠 가지곤 어림도 없을 일이다.
야닉은 억눌린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니… 웃는 얼굴을 보여 줘. 그거면 충분해.”
“……약속해.”
“맹세할게.”
그가 먼저 웃자 한 주임도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충분을 넘어서 차고 넘치는 웃음이었다.
야닉은 조금 식은 물을 느끼곤 지체하지 않고 화기를 내보내 온도를 올렸다. 그의 몸에서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걸 본 한 주임이 곧장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나가야지.”
“조금만 더.”
본능적으로 몸을 물리려는 그녀를 간단히 잡아 품에 안은 야닉이 귓속말로 무어라 속살거렸다.
한 주임은 귀까지 벌게져서 소용없는 몸부림을 쳤다.
* * *
침실로 다시 나왔을 땐 식탁도, 침대도 모두 말끔히 정리된 상태였다.
야닉은 벌써 반쯤은 잠들어서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한 주임을 얌전히 침대에 내려놓았다. 이불을 덮어 주고 일어나려는데, 가느다란 손가락이 옷자락 끄트머리를 잡아당긴다.
“있잖아. 내가 가져온 귀환석… 어디 있어?”
졸려서 혼미한 와중에도 그게 걱정이 됐었나. 그는 말끔하게 물기를 날린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잔잔히 대꾸했다.
“드레스룸에 잘 모셔 놨으니 걱정하지 말고 자. 그대가 산에서 가져온 그대로 보관 중이니.”
“혹시 물통도 챙겼어? 검은색 가죽 주머니인데…….”
야닉은 고갤 들어 기억을 더듬었다.
생각해 보니 옷가지를 정리하던 미엘라가 이건 어떻게 할까요? 하고 수통을 들어 묻기는 했었다.
[일단 짐들은 전부 그대로 놔둬.]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이 떠올라 그는 드레스룸으로 몸을 돌렸다.
예상대로 귀환석을 넣어 둔 금고 옆으로 그녀가 입었던 해진 옷과 양가죽으로 만든 까만 수통이 얌전히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들어 보니 제법 묵직하게 출렁거린다. 침대로 가져가 보여 주자 한 주임이 맞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거 버리면 안 돼…. 페어리들이 있는 곳에서 떠 온 물인데, 그 애들 말로는 ‘망각의 샘’이랬어.”
“망각의 샘?”
“조심해!”
입구를 막고 있는 상아 마개를 여는데 한 주임이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야닉은 즉각 원래대로 닫고는 그녀를 달랬다.
“안 열었어. 진정해.”
“아, 깜짝이야. 정말…….”
놀랐다가 안심했다가, 확확 바뀌는 표정이 귀여워서 그가 짧게 웃었다.
“독약이라도 돼?”
다시 눕히며 가볍게 물었는데 예상외로 진지한 반응이 돌아왔다.
“……쓰임에 따라선.”
“흠. 자세히 말해 봐.”
목까지 이불을 덮어 주며 야닉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손에는 여전히 수통이 들린 채였다.
한 주임은 단단히 잠긴 입구를 확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하여간 제 몸 아끼는 일 외에는 조심성 많은 여자였다.
“페어리들이 그랬는데… 망각의 샘을 한 모금 마시면 하루만큼의 기억을 앗아 간대. 샘을 마시고 하루가 지나서 다시 마시면 잃어버렸던 기억이 돌아온다고도 했고…….”
한 모금에 하루의 기억을 앗아 가는 물. 이상한 기시감에 야닉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열아홉 살.
그가 처음으로 취발론에서 길을 잃고 쓰러졌을 때 아크만의 사제들이 발견하고 요새로 데려왔다고 했다. 물론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리고 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이상한 돌멩이 하나.
알리온이 귀환석이라는 걸 알아냈지만, 어디서 난 것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린 후 갖게 된 엄청난 힘.
10년이 흐른 오늘까지도 끓어오르는 마력은 좀처럼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되레 몇 년 사이 더 강해졌을 뿐이다.
그에게 있어 이것들은 온통 미제로 남은 과거였다. 아무리 떠올려도 안개에 둘러싸인 기억이 돌아오는 법은 없었으니.
‘단순히 머리를 다쳤겠거니 싶었는데.’
한 주임이 말을 꺼낸 지금에서야 머릿속에서 엉킨 실타래의 시작점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잠이 오는지 한층 느려진 목소리로 그녀가 나긋나긋 설명을 마쳤다.
“…하루가 지난 다음 마시면 기억이 돌아온다고.”
“응….”
“10년이 지난 다음에 마시면?”
“그건 나도 모르겠어. 근데 나 좀 졸린 것 같아…….”
야닉은 즉각 상념을 끊어 내고 한 주임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서 자. 잘 땐 건드리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짐승.”
코끝까지 이불을 끌어당기며 자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그가 낮게 웃었다.
“잘 참고 있던 짐승을 먼저 건드린 건 그대야.”
“음. 그건 맞아.”
순순히 인정하며 금방 또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여자가 못내 사랑스러웠다.
이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인내하고 또 인내했는지 알기나 할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참고 있다는 말을 하면 그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불쑥 떠오른 짓궂은 장난은 한동안 접어 두기로 했다.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던 야윈 몸에 가슴이 죄여 든 탓이었다.
한 주임의 이마에 입을 맞춘 야닉은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잠들었을 때가 영지의 일을 처리할 유일한 시간이었다.
책상에 앉아 보고서를 넘기던 손이 특정 부분에서 멈추었다.
수색대가 사미 크랩턴을 발견했다는 대목이었다.
발견장소는 지하동 부근 서쪽 바위 숲. 검시 결과 변사체에 폭행의 흔적이 있고, 폐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는 내용이 첨부된 소견서에 적혀 있었다.
‘물도 없는 곳에서 ‘익사’라.’
야닉은 트라야누스 입단시험에서 참가자들의 머리에 물을 뒤집어씌웠던 이한율을 떠올렸다.
병동에서 사미 크랩턴을 이송했던 자 역시 이한율이었다는 증언이 나온지라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뻔히 범인으로 지목당할 걸 알면서도 부러 자신이 한 짓임을 알아 달라는 듯이 물을 사용한 것이 예상 밖이었다.
철두철미하게 범죄를 꾸몄다기엔 무자비한 폭력도 그렇고, 그는 감정이 섞인 흔적을 사체에 남기며 노골적인 분노를 내비쳤다.
사미 크랩턴은 죽기 전 한 주임과 검술 대련을 했고, 본인이 밀리자 감히 그녀에게 비겁한 짓을 저질렀다고 했다.
그것이 이한율을 자극한 원인이 되었다면…….
눈에 흙을 뿌렸다는 이유 하나로 사람을 해칠 정도면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나는 수준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한 주임을 대신해 과도하게 실행한 복수.
달빛에 비친 야닉의 눈이 예리하게 좁혀졌다.
‘이한율은 분명 돌아온다. 납치에 실패했다고 해서 포기할 수준의 집착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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