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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닉은 테이블 위에 보고서를 내려놓고 이번엔 황실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들어 올렸다.
붉은 늑대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세레나가 돌아온 후 수도로 떠났던 하랑을 복귀시키지 않고 그대로 황궁으로 보낸 참이었다.
그는 숯과 송진을 섞은 물에 깃펜을 적셔 고민 없이 답신을 적어 내려갔다.
장미가 보내는 비둘기 뒤를 따를 것.
눈치가 빠른 종자이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겠지.
제국군이 요새로 진격할 때 시즈가 보낼 회군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지시였다.
가능성은 두 가지.
시즈가 회군 명령을 내리지 않거나, 전령이 군에 도착하지 못하거나.
두 번째 가설에는 보고서를 읽은 지금 이한율이 막 포함된 참이었다.
사미 크랩턴의 보고서엔 델피온에 있는 가족에게 연락해 시신을 인도하게 하라는 메모를 달았다.
그 외에도 결정권자의 결재가 필요한 서류들을 훑다 보니 밤은 어느새 더욱 깊어져 있었다.
야닉은 조금 뻣뻣해진 뒷덜미를 문지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닌지라 몸이 아닌 정신적으로 피로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후…….”
그는 습관처럼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한 주임을 돌아보았다.
가녀린 외양과는 달리 무척이나 강인한 여자였다.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마력이 없어서 좌절하기는커녕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삶의 의지를 태우던 불꽃 같은 여인.
그 까다로운 브라우니에게서 축복을 받아 낸 놀라운 여인.
납치된 상황에서 빠져나온 거로도 모자라 귀환석까지 한 움큼 챙겨 온 지혜로운 여인.
이 모든 걸 포함해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내 연인.
그녀를 더는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오래오래 평탄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
야닉은 손을 뻗어 책상 한편에 놓아 둔 까만 수통을 집어 들었다.
이것으로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기억에서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게 된다면…….
무엇이 되었든 간에 한 주임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나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녀를 지킬 수만 있다면 사실 이런 것 따윈 별거 아니었다.
“당신이 용기를 내었으니…. 나도 한 번쯤은 모험을 해 봐야겠지.”
그는 짐짓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뚜껑을 열고 입구에서 찰랑대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며칠이나 지났음에도 맑고 투명한 액체가 그의 입으로, 목으로 천천히 흘러 들어간다.
평범한 물과 다를 바 없는 것을 한 모금을 느리게 삼킨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걸었다.
한 주임의 곁에 누워 잠든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니 머지않아 생경한 졸음이 밀려들었다.
‘이 느낌, 어딘가 익숙한데.’
그런 생각을 하며 야닉은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자님, 황자님!”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야닉은 번개같이 눈을 떴다.
분명 푹신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일어나 보니 작은 막사 내부였다.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이 불현듯 한기가 느껴졌다.
추위를 느끼다니 무슨 일이지, 잠깐 생각하는데 좀전의 목소리가 재차 정신을 일깨웠다.
“황자님, 그만 일어나셔야 합니다. 오늘 중엔 취발론을 넘어야 한대요.”
“마티? 네가 왜 여기에…….”
몽롱한 머리로 앞에 보이는 사내에게 묻자 남자가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한다는 얼굴로 빙글거렸다.
“아직 잠이 덜 깨셨습니까? 충직한 시종인 마티어스 호르헨이 주군의 막사를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죠.”
“…아아. 그래. 그렇지.”
왠지 모르게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일어나자 마티어스가 수선을 떨며 그를 살폈다.
“설마 어제 세피로트의 영역에서 환상을 보시고 아직 못 깨어나신 건 아니겠죠?”
그래, 맞아…. 마티어스는 궁에서부터 따라온 내 시종이었지.
야닉은 물을 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한 잔을 깨끗하게 비운 다음 마티어스의 시중을 받아 채비를 마치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해가 뜬 아침임에도 자욱한 물안개로 어둑어둑한 숲은 그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곳이었다.
초행길이 분명한데 어쩐지 여러 번 와 본 듯한 기시감이 싸늘하게 오감을 스친다.
이 기묘한 기분은 분명 산의 영향일 것이다. 그는 그렇게 단정 지으며 잡념을 떨쳐 냈다.
황자의 호위를 맡은 고위기사 로하겔 브리티지가 그를 발견하고 곧장 다가와 깍듯한 자세로 말을 걸었다. 누가 봐도 호감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이 정도 속도면 오늘 중으로 산을 벗어날 듯합니다. 그랑드콜에서 만난 용병들의 조언을 받아들이길 잘했습니다.”
“현지인의 참견만큼 유용한 것도 없지.”
야닉은 픽 웃으며 로하겔 경의 어깨를 두드리곤 그를 지나쳐 갔다.
고귀한 분께서 허물없이 야인 용병들과 말을 섞던 모습은 수도 귀족인 그에겐 무척이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로하겔 경이 재빨리 뒤를 따랐다.
“야인족들이 전부 호전적이고 멍청하다는 호사가들의 말은 믿을 게 못 되더군요. 스캄이라던 자는 좀 괴팍하긴 해도 멍청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자네와 제법 죽이 잘 맞아 보이던데.”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로하겔 경이 단호하게 부정하고는 여장을 마친 기사들 사이로 기분 좋게 걸어 들어갔다.
북쪽 변방 경계 지역인 아크만 요새를 향해 길을 떠난 지 일주일째.
열아홉 살의 3황자 야닉 리버스는 지금 취발론을 지나는 중이었다.
여행자들의 실종이 심심찮게 발생하는 악명높은 산인지라 신경에 날이 서 있었는지 전에 없던 두통이 다 느껴졌다.
대열을 정비한 호위 기사들과 야닉, 그리고 그의 시종 마티어스는 부지런히 산길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점심이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취발론이 위험하다고 하는 것도 다 옛말인가 보죠? 이렇게 간단히 넘을 수 있다니 이상하네요.”
아까부터 두리번거리면서 걷던 마티어스가 불쑥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매서운 추위 속에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와 코 아래를 훔치는 게 더 이상해 보여서 야닉은 시종의 얼굴을 살폈다.
“어디 아픈가, 마티? 이 날씨에 웬 땀을 그렇게 흘려.”
“아프긴요. 제가 원래 땀이 좀 많잖아요. 하하…….”
과장되게 손을 내젓는 모양새가 수상쩍었지만 야닉은 긴장해서 그렇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마티어스의 상태는 점점 더 이상해졌다.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기사들을 힐끔거리고, 괜히 뒤를 돌아보기도 하더니 결국엔 헛소리까지 늘어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 아니야! 그럴 순 없어! 어떻게 감히 내가…….”
“이봐, 마티! 마티어스!”
야닉이 걸음을 멈추고 그의 어깨를 강하게 흔들었다.
페어리들의 장난에 걸려든 것이 분명했다. 일행은 즉각 행군을 멈추고 마티어스 주위로 몰려들었다.
“분명 스캄이라는 자가 그랬죠. 페어리의 정신조종에서 벗어나려면 강한 물리적 충격이 필요하다고.”
로하겔 경이 결연한 얼굴로 야닉의 허락을 구하고는 건틀릿을 낀 주먹을 들어 그대로 마티어스의 안면에 꽂아 넣었다.
퍽 소리가 날 만큼 세게 얻어맞은 마티어스가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황자님?”
곧바로 정신을 차린 그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야닉이 손수건을 건네며 눈살을 찌푸렸다.
“정신 차려, 마티.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는 무시해야 한다고 했잖아.”
그제야 코피가 터진 것을 안 마티어스는 당황한 얼굴로 허겁지겁 머리를 조아렸다.
제 시종이 마음이 여리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도 금방 요정에게 홀려 버린 것이 야닉은 내심 못마땅했다.
“죄, 죄송합니다…….”
“코뼈가 부러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시게. 마티어스 경.”
로하겔 경이 나름대로 농담을 던지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고개를 푹 수그린 마티어스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드리워졌다.
잠시 멈추었던 행군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티어스의 상태가 다시 이상해졌다.
주의 깊게 그를 살피고 있던 야닉의 시야에 정확하게 포착된 순간이었다.
“이봐, 괜찮아?”
“예? 예. 괘, 괜찮습니다. 저는 단지…….”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야닉은 낮은 한숨을 흘렸다.
“수도에 계신 아버님을 생각해. 병석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건강히 돌아가서 뵈어야지.”
“……그렇죠.”
치매 증상이 심해진 호르헨 자작이 얼마 전부턴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증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안 그래도 야닉은 아크만에서 마티를 얼마간 데리고 있다가 은밀히 돌려보낼 심산이었다.
남들 귀에 들어가선 곤란한 일이니 입을 다물고 있었건만, 이토록 불안해하는 걸 보니 차라리 귀띔이라도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결국 야닉은 행군을 멈추어 세웠다.
“잠깐 마티어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올 테니 다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위험합니다. 황자님! 제가 동석을….”
“잠깐이면 돼. 설마 내가 마티를 해치기라도 할까.”
만류하는 로하겔 경에게 농담을 건넨 야닉이 마티어스의 어깨를 두르고 나무 사이로 그를 이끌어 나갔다.
주춤거리며 따라오던 마티어스는 뒤를 돌아보며 제자리에 서 있는 기사들을 눈으로 확인하는 중이었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자리에서 야닉은 걸음을 멈추었다.
사방이 침엽수와 가시덤불로 얽힌 고요한 공간이었다.
야닉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중에 말해 주려고 했는데, 실은 말이야.”
“저… 황자님.”
마티어스가 말을 잘랐다. 그의 눈빛이 아슬아슬할 만큼 뒤흔들렸다.
“사실은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허리춤에 있는 단검에 시선을 둔 마티어스가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돌연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마티.”
“나딘 황비의 군이 쳐들어왔을 때 황자님께서 제 목숨을 살려 주셨던 일 말입니다. 이 마티어스는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마티어스의 눈에서 굵은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그때 저는 주군을 위해 남은 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했죠. 그래서… 도저히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제안이라니. 무슨 소리야.”
황급히 따라 앉아 물었지만 마티어스는 요지부동이었다. 울먹이는 소리로 그가 알 수 없는 고백을 이어 나갔다.
“뤼시크…. 칼 뤼시크. 그자가 제게 황자님을 암살하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럼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는 약을 구해 주겠다고…….”
야닉이 마티어스의 어깨를 잡아 거칠게 흔들었다.
“마티어스. 그 병을 낫게 하는 약은 없어. 치유마법으로도 고칠 수 없다는 걸 알잖아!”
“저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마티어스가 울부짖듯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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