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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그자가 뤼시크 상단이 구하지 못하는 건 세상에 없다고 코웃음을 치더군요! 거절하면 제 가족을 죽이겠다고도 했고요! 그자는 이제 황태자 전하의 장인이 됐습니다. 폐하께서도 막을 수 없었지요. 뤼시크 가문은 머지않아 제국을 평정할 겁니다!”
“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야닉이 이번엔 달래는 어조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보내서 자작을 지키게 하면 돼. 내가 아무리 쫓겨나는 처지라도 그 정돈 할 수 있어. 우리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브리아나 황비님께선 아이노스에 계시지요. 이미 늦었습니다. 수도엔 칼 뤼시크가 거느리는 암살자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깔려 있으니까요. 황비님의 사병이 도착할 때쯤이면 저희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
소매로 눈물을 닦은 마티어스가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서 기사들이 야닉을 부르는 소리에 움찔한 그가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저는 황자님을 해칠 수 없고, 아버님의 목숨 또한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제가 죽는 것이 최선일 겁니다. 죄송합니다.”
말을 마친 마티어스가 뒤돌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망연자실해서 바라보던 야닉이 곧바로 뒤를 쫓았다. 무성하게 자라난 거친 수풀에 마티어스의 뒷모습이 가려지고 있었다.
그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해 달리던 야닉은 어느 순간 나타난 낡은 유적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네모난 입구 안으로 마티어스의 묵직한 발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홀연히 나타난 수상하기 짝이 없는 공간.
야닉은 잠시 멈칫했다가 이를 짓씹으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마티어스 호르헨!”
그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조급함이 실린 걸음으로 외길을 따라 계속 진입하던 중 어느 순간 말도 안 되게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입구와는 달리 천연 암반수가 가득한 기이한 동굴. 그는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스릉, 날붙이가 검집을 스치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무거운 적막이 어깨를 짓눌렀다.
예리하게 갈린 검날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다리 건너편에서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야닉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소리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정말 밖에 있는 물을 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고…?”
마티어스의 목소리였다.
「그래. 망각의 샘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치유의 샘이거든. 여기까지 온 자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생기니까 특별히 가져가게 해 줄게!」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아이의 목소리가 화답했다.
「치유의 샘을 마시면 네 아비도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물론 얼마간의 기억을 잃겠지만!」
까르륵거리며 웃는 아이의 몸은 희미한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저게 페어리인가.’
야닉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허리 아래에서 맨틀 자락을 잡아당겼다.
아이는 한 명이 아니었다. 안에서 말을 하던 아이 말고도 또 다른 꼬마가 손가락을 입에 물고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검을 들려던 그는 아이의 누더기 옷과 맨발을 보고 흠칫 몸을 굳혔다.
「기아스의 핏줄이 왔어.」
옷깃을 잡은 아이의 말에 마티어스와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가 동시에 고갤 돌렸다.
“황자님!”
묘하게 들뜬 얼굴의 마티어스가 황급히 달려왔다.
“그만 돌아가자, 마티.”
야닉은 본능적으로 그를 잡아끌었다. 이곳은 누가 봐도 페어리의 영역이었다. 날카로운 감이 어서 여길 벗어나라는 경종을 울려 대고 있었다.
“오는 길에 본 지하수요! 그걸 마시면 아버님의 병이 낫는대요!”
환희에 찬 목소리로 눈을 반짝이는 마티어스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해.”
억세게 잡아끄는 손길에도 마티어스는 허리춤에 찬 수통을 꺼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페어리들이 그 광경을 보며 키득키득 웃어 댔다.
「기아스의 핏줄! 너는 선물을 안 받아 가는 거야?」
뒤통수에 대고 날아드는 목소리에 야닉은 냉소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런 건 나약한 자들에게나 필요한 거겠지.”
「받아 가는 게 좋을 텐데? 우리는 기아스와 약속을 했단 말이야!」
멀어지던 목소리가 이번엔 귀가 아닌 머릿속에서 울려 댔다. 요정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면 소통방식이 자연히 바뀌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마저도 깨끗하게 무시하고는 마티어스의 팔을 붙잡고 왔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황, 황자님! 바닥에 보석들이 굴러다녀요!”
“줍지 마.”
“……네.”
여기저기 널브러진 보물들이 아쉬운 듯 입맛만 다시던 마티어스는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무기력하게 끌려가던 그가 야닉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 나간 곳은 페어리가 말했던 치유의 샘이었다.
아무런 난간도 없는 나무다리로 뛰어간 그가 허겁지겁 쪼그려 앉아 수통의 마개를 열었다.
“보석은 포기해도 이것만큼은 양보 못 해요. 무조건 아버님께 갖다 드릴 거라고요!”
단호하게 말하고는 물속에 수통을 담가 뽀글뽀글 안을 채워 나갔다. 다리와 샘의 표면이 닿을 듯 가까운 탓에 한껏 몸을 기울인 그가 위태로워 보였다.
야닉은 이마를 짚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물에 빠지지 않게 조심해서…….”
“그런데 황자님, 목 안 마르세요? 저는 이상하게 아까부터 목이 너무 말라서…. 물도 굉장히 깨끗해 보이는데 딱, 딱 한 모금만…….”
마티어스는 말릴 새도 없이 손으로 물을 떠서 입에 흘려 넣었다. 그것을 본 야닉이 번개처럼 달려와 뒷덜미를 잡아챘다.
“제길! 마티어스! 이게 망각의 샘이라고 했던 걸 잊었어?”
“이, 이거 놔…! 부족해. 한참 부족하다고!”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모를 만큼 드센 힘으로 야닉을 밀친 마티어스가 이번엔 얼굴을 수면 아래로 처박았다. 목울대가 출렁이며 꿀꺽꿀꺽 들이켜는 소리가 동굴을 가득 메웠다.
“마티!”
뒤로 넘어진 야닉이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마티어스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 한발 빨랐다. 기어이 중심을 잃고 물에 빠진 마티어스가 팔다리를 마구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웁! 화, 황자님! 살려 주세… 푸학! 전 수영을… 못 해요!”
물이 맑아 수심을 가늠할 수 없었던 샘이 생각보다 깊은 모양이었다. 첨벙거리면서도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는 마티어스를 본 야닉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꺼내 줄 테니까!”
맨틀과 더블릿을 차례로 벗어 수면 아래 기둥에 단단히 묶으며 야닉이 소리쳤다.
몸부림치는 사람을 구조하려다 함께 익사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힘이 빠지길 기다리던 야닉은 급한 대로 옷가지를 비끄러맨 줄을 물 위로 던졌다.
“이걸 붙잡아, 마티!”
최대한 멀리 던졌건만 마티어스는 그조차도 붙잡지 못하고 오히려 다리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우풉! 살, 살려…….”
힘이 빠진 몸이 이윽고 축 늘어졌다. 무기력하게 가라앉기 시작한 마티어스를 보고 야닉이 지체 없이 뛰어들었다.
첨벙! 크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깊이 잠수한 그는 마티어스의 몸을 붙들고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물 밖으로 올라온 다음엔 미리 던져 둔 줄을 잡고 다리 위로 힘겹게 기어올랐다.
숨도 고를 틈 없이 야닉은 마티어스의 가슴을 세게 내리쳤다.
“마티! 일어나!”
폐를 압박하고 입에 공기를 불어 넣으며 연신 소리를 질렀다. 마티어스의 입에서 물이 주르륵 쏟아졌지만 감긴 눈은 도통 떠지질 않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인공호흡을 하던 야닉의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젠장! 일어나라고! 마티! 마티어스!”
「그는 죽었어.」
또다시 페어리의 목소리였다. 야닉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마티어스의 가슴을 짓눌렀다.
「망각의 물을 너무 많이 마셨거든. 깨어나는 법조차 잊어버린 거야.」
“입 닥쳐!”
거칠게 소리친 그가 재차 숨을 불어넣었다. 미동 없는 마티어스의 가슴이 불룩 솟았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팔에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흉부를 압박하느라 사리문 그의 입술도 어느새 마티어스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자신이 지체하는 바람에 친우와도 같던 시종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기아스의 핏줄이 좀 더 강했다면 마티어스가 죽지 않았을 텐데.」
그제야 의미 없는 동작이 멈추었다. 흠뻑 젖은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랬으면 칼 뤼시크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았겠지. 그랬다면 마티어스가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야! 안 그래?」
망연하게 앉아 있던 야닉이 홀린 듯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미 숨을 거둔 마티어스를 보는 황금색 눈동자가 짙게 떨렸다. 분노와 박탈감, 좌절과 복수심이 차례로 금안에 휘몰아쳤다.
“너희가 기아스와 했다는 약속이 뭐지?”
자신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차분한 목소리였다.
차갑게 식어 가는 신체와는 반대로 가슴은 뜨거워지고 머리는 되레 명료해졌다. 그러자 페어리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야닉은 굳은 얼굴로 좀 전에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페어리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무해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거리낌 없이 다가온 바스타드 소드의 뾰족한 검날이 아이의 오색 동공에 크게 비쳤다.
“……선물. 지금이라도 받아 가야겠는데.”
위협적으로 검을 들이댄 것과는 반대로 야닉은 나긋나긋하게 을러댔다.
크리스털 바위에 앉아 있던 아이가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구석에 콱 박힌 제 검을 보던 야닉은 동요 없이 아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기아스와 우리가 한 약속. 그건 삿된 존재를 물리치기 위한 거래였어.」
페어리가 훌쩍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우리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고, 너희가 마물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호시탐탐 우리를 잡아먹으려 들고 있지.」
야닉의 주위를 찬찬히 걷는 아이의 발걸음엔 아무런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기아스가 그랬어. 힘을 나눠 주면 우리 대신 마물을 없애 주겠다고. 그래서 우리는 기아스가 죽고 난 뒤에도 핏줄이 찾아올 때마다 힘을 나눠 주었지. 그리고 바깥에선 큰 전쟁이 벌어졌어.」
“전쟁…….”
과거에 있었던 인간과 마물의 대규모 전쟁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야닉은 잠잠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결과적으론 인간들이 승리하긴 했지만, 마물은 아직 전부 사라지지 않았어. 그러니 힘을 나눠 주겠다는 약속은 아직 유효한 셈이야.」
“…‘힘’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거지?”
「당연히 마력이지! 우리가 마나의 시초라는 걸 모르고 있었던 거야?」
페어리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보석처럼 빛나는 눈을 반짝였다.
「어때, 이제 약속을 이행할 마음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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