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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닉은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마물이야 줄곧 토벌해야 하는 대상이었으니 아무런 대가가 없는, 그들의 말대로 선물이나 다름없는 힘이었다.
아니. 대가는 마티어스의 목숨으로 치른 셈인가.
그는 쓴웃음을 삼키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선물이군. 힘을 받아들이겠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페어리가 환하게 웃었다. 야닉은 아이가 내민 손을 스스럼없이 잡았다.
「조금 아플 거야.」
닿은 부분부터 시작된 뜨거운 기운이 물에 젖에 싸늘해진 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전에 없던 열기가 몸을 잠식해 나가더니 금세 불구덩이 속에 집어 던져진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읏…!”
태우다 못해 살이 녹아내리는 화기가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와 안과 밖을 엉망으로 파헤치고 있었다.
‘조금’이라니, 그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살기를 담아 노려보자 마력을 건네던 페어리가 킥킥거렸다.
「전쟁이 끝난 뒤 우리를 찾아오지 않고 죽어 버린 핏줄 72,054명분의 마력이야.」
“왜 그걸 나한테 전부…!”
잇새로 간신히 내뱉은 말에도 고저 없이 평이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야 나중에 기아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따지지 않을 거 아니야. 지금은 그릇이 작아서 다 넣진 못했지만, 감당할 수 있을 때쯤엔 더 많은 마력을 갖게 될 거야.」
옷에서 피어오른 수증기 때문에 페어리의 표정은 흐릿하게 보였으나 웃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몸이 달궈졌을 땐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무릎이 땅에 닿고 두 팔로 바닥을 짚고 나서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야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지켜보고 있던 다른 페어리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야닉 주위로 금방 몰려들었다.
「와! 너 참을성이 대단하구나!」
「기절하지 않는다니, 정신력도 무서울 정도야!」
“끝난… 건가?”
달군 돌을 통째로 삼킨 것처럼 뜨거워진 배 속을 느끼며 그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다가는 험한 꼴만 당하게 될 거란 예감에 비틀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하도 세게 이를 물어 욱신거리는 턱을 매만지는데 작은 손이 불쑥, 옆에서 튀어나온다. 그는 페어리가 건네주는 이상하게 생긴 돌을 얼떨결에 손에 들었다.
「귀환석이야! 이것도 가져가!」
“귀환석?”
당연히 처음 보는 것이건만, 이상하게 낯이 익은 모양새였다.
「네 거야.」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는 페어리를 보던 야닉은 대답 없이 주머니에 돌을 넣었다. 느긋하게 돌멩이 따위나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페어리들이 있는 공간을 빠져나온 그는 서둘러 마티어스가 누워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이미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그를 둘러업고 출구로 걷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다.
“…조금만 참아, 마티. 집으로 보내 줄게.”
미안하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무사히 여길 빠져나가서 기사들을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쉽사리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저녁에 가까운 것 같았다. 사위가 어두워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들어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고갤 돌리자 유적지의 입구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어딜 봐도 까마득히 높은 단단한 암벽뿐이었다.
「동굴의 위치는 수시로 바뀌거든!」
「행운을 빌어, 기아스의 핏줄!」
“…….”
망할 요정들 같으니라고. 그는 속으로 욕설을 뱉으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힘을 받은 뒤부터 전혀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만, 대신 예상치 못한 졸음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는 무겁게 감기는 눈을 바짝 떠 가며 잠을 쫓아내려 강하게 이를 물었다. 머지않아 기이할 정도로 강렬한 수마가 눈앞에서 너울거렸다. 그것은 정신력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수준이었다.
야닉은 결국 마티어스를 업은 상태로 풀썩 쓰러져 버렸다.
「마티어스를 구할 때 너도 망각의 샘을 마셨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까르르 웃음 섞인 요정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먼 곳에서 울리는 듯했다.
아무래도 집으로 보내 준다는 약속은 지키기 어려울 듯싶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나도 곧 갈게.’라고 하는 편이 나았으려나. 문득 드는 생각에 쓴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가만……. 힘을 받았으니 나도 마법사들처럼 하늘에 불꽃 정도는 쏠 수 있지 않을까.
혼곤한 정신으로 손가락에 마나를 흘려 보는데, 전에 없이 커다란 무언가가 손끝에서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손을 올린 다음에는 온통 어둠이었다.
소용돌이 같은 검은 해류에 통째로 빨려 들어가는 아득한 기분이 들더니, 눈꺼풀 위로 다른 빛이 번져 나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공기, 햇살, 감촉, 소리. 모든 게 그가 알고 있던 익숙한 것들이었다.
* * *
한 주임은 아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이불을 걷었다.
곤히 잠든 야닉이 깰까 숨을 죽이고 몸을 일으키는데, 자는 줄 알았던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아 온다.
“……어디 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엔 어딘가 물기가 서려 있었다. 한 주임은 놀란 눈으로 야닉의 얼굴을 더듬었다.
“울었어? 어디 아파?”
그녀의 말에 야닉이 더 놀란 것 같았다.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운 그가 손바닥으로 두 눈을 짓눌렀다.
“왜, 왜 그래?”
불안해져서 야닉의 머리니 어깨니 몸을 지분거리는데 그가 돌연 자신을 와락 껴안았다.
“그냥…. 그냥 옛날 꿈을 꿨어.”
멍하니 있던 한 주임은 그의 등을 슬슬 쓰다듬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다 일어나서 과격한 포옹을 해 오는 야닉이 걱정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럽게 느껴졌다.
“……슬픈 꿈?”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꿈.”
어깨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거리던 그가 자연스럽게 네글리제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한 주임은 파드득 몸서리를 치며 드세게 손을 끌어내렸다.
“갑자기 무슨!”
“생각해 보니 슬픈 꿈이 맞아. 그러니까 위로해 줘.”
뻔뻔하게 내뱉고는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짓는 야닉이었다.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가 쪽 소리 나게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빨리.”
한 주임은 삽시간에 화르르 달아오른 안면을 그의 어깨에 파묻었다. 귓가에 한숨처럼 번지는 숨결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슬픈 꿈은 꾸었다는 건 그냥 핑계인 걸까. 깊게 생각할 여유는 곧 없어졌다.
해가 높이 뜬 시간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깊이 잠든 야닉을 뒤로하고 한 주임은 책상 앞에 서서 그가 새벽까지 흩뜨려 놓은 양피지 더미를 한 곳에 착착 정리하기 시작했다.
바쁜 그가 조금이나마 덜 수고스럽도록 확인이 끝난 것과 아직 풀지 않은 두루마리를 나누는 와중, 표면이 뻑뻑하게 마른 잉크병이 눈에 띄었다.
뚜껑 닫는 걸 잊을 정도로 피곤했나 싶어서 가슴 한편이 찡하니 아려 온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닫고 있는데 문밖에서 작게 흠, 흠!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주임은 서둘러 가운을 두르고 문을 살짝 열었다.
“…어?”
틈새로 보이는 사람이 야닉이 아님에 놀랐는지 미엘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임님! 몸은 좀 괜….”
“쉿.”
얼른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더니 놀란 미엘라가 따라 입을 막고는 작게 고갤 끄덕였다.
한 주임은 밖으로 나가 인내심 있게 느린 동작으로 문을 닫았다.
“난 괜찮아요. 그동안 계속 이렇게 들어왔던 거예요?”
노크도 하지 않고 문 앞에서 헛기침만 하던 미엘라에게 물으니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
“야닉 님이 주임님 쉬게 최대한 조심하라고 하셨거든요. 욕실에 물을 받는 소리가 날 때만 들어가서 얼른 청소하고 나왔죠!”
“아…….”
한 주임은 빳빳하게 몸을 굳혔다.
그게… 물소리가 밖에서 들리는구나.
저절로 오금이 저렸다. 다른 이방인들이 함께 지내는 저택이긴 하지만 넓은 층마다 한 명씩 사는지라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사용인들이 돌아다니는 건 차마 생각을 못 했다.
어쩐지 씻고 나올 때마다 침대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왜 미엘라 생각을 못 했을까. 갑자기 머리로 온몸의 피가 쏠리는 기분이었다.
“식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더 주무실 거면 나중에 올릴까요?”
미엘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실방실 웃으며 묻고 있었다. 한 주임은 최대한 의연하게 따라 웃었다.
“…괜찮아요. 준비해 줘요.”
“네!”
발걸음도 가볍게 멀어지는 미엘라를 보던 그녀는 문을 닫고 잠시 그 위에 머리를 기댔다.
욕실로 가서 세면대에 물을 트는 일조차 부끄러웠다. 격한 도리질로 민망함을 떨쳐 내고 칫솔에 가루를 뿌려 격정적으로 양치질을 했다.
찬물로 세수까지 마치고 나왔는데도 야닉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햇살에 눈이 부실까 봐 한 주임은 묶어 놓은 캐노피 줄을 풀어 침대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조금 뒤 음식이 담긴 쟁반들이 줄지어 들어오더니 식탁을 빼곡히 채웠다.
할 일을 마친 하녀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후다닥 방을 나갔다. 다시 한번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슬슬 그를 깨워야 했다.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침대에 올라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일찍 일어났네.”
어깨에 손이 닿기도 전에 야닉이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한 주임은 죄지은 사람처럼 깜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이, 일어나 있었어? 언제부터…….”
그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댄다.
“쉿?”
미엘라가 왔을 때부터? 생각보다 한참 전에 깨어 있었다는 사실에 눈을 깜빡거리자 그가 단박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직 잠이 묻은 얼굴로 푸스스 웃는 야닉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옛날엔 아침잠이 많았더라고. 한동안 제대로 못 잤더니 잊고 있었나 봐.”
“아…. 저혈압인가 보네.”
사람이 자다 일어나도 이렇게 근사할 수 있다니.
속마음과는 다르게 입에선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한 주임은 말해 놓고도 스스로가 약간 한심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푹 잤어. 마력을 착실하게 깎아 놔서 그런가?”
은근한 눈길로 또다시 슬금슬금 다가오려는 그를 이번에는 단호하게 밀어 냈다.
“밥! 밥 먹어야지!”
“은밀하게 해 놨길래 기대하고 있었는데. 난 또.”
사방에 쳐진 엷은 천을 보며 그가 아쉽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한 주임은 발작적으로 튀어 올라 캐노피를 걷어 끈으로 단단히 동여맸다. 전에 없이 신속하고도 다급한 손놀림이었다.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야닉이 일어나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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