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23화 (123/155)

)

침대 기둥마다 짱짱하게 묶인 캐노피를 두 번씩 확인한 한 주임은 이번엔 식탁으로 가서 음식 커버를 하나씩 열었다.

베이컨과 소시지, 달걀 반숙에 폭신폭신하고 고소한 빵 내음이 식욕을 자극했다. 여기에 따끈한 커피까지 있으면 완벽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간단히 씻고 나온 야닉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먼저 먹고 있지, 기다렸어?”

“차 마시고 있었어.”

그가 한 주임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런 걸 두고 이방인 표현으론 ‘브런치’라고 하던가?”

찻잔을 든 야닉이 가볍게 접시를 눈으로 훑었다.

“음. 그것도 맞긴 한데. 우리말로는 ‘아점’.”

아점? 하고 되묻는 야닉에게 ‘그런 게 있어.’ 하면서 한 주임은 맑게 웃었다.

모처럼 행복한 나날이었다.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빛에 마음까지 환해지는 기분.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그와 마주 앉아 맛있는 밥을 먹고 사랑을 속삭이는 순간이 온통 행복이었다.

그러니까 하루만. 딱 하루만 더 이런 날이 이어지기를.

야닉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몇 시간씩 척척 접히는 것처럼 너무 짧게만 느껴졌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뒹굴거리다가 일어나 밥을 먹고 목욕을 하고, 또 기절한 것처럼 잠이 들었다.

가끔 비어 있는 옆자리를 더듬거리다가 눈을 뜨면 책상에 앉아 양피지를 집중해서 보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한 주임은 가슴에 뭉근한 아픔을 느낀 채로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라는 걸 여실히 알고 있었다.

‘달콤한 휴가는 여기까지.’

어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던 한 주임은 푸르스름한 여명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체력은 충분히 회복되었고 몸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간단히 씻고 나와 잠옷을 벗고 튜닉과 도톰한 블리오를 겹쳐 입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새벽에 그가 조용히 나갔던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에 한 주임은 놀란 기색 없이 미소 지었다.

오히려 놀란 쪽은 야닉이었다. 외출복을 입고 있는 그녀를 본 그가 큰 보폭으로 성큼 다가왔다.

“어딜 가려고.”

다소 굳은 얼굴로 묻는 그에게선 새벽 공기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안에만 있으니까 좀 답답해서. 잠깐만 산책하고 올게.”

“같이 가지.”

주저 없이 따라나서는 그를 붙잡고 한 주임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야닉의 다른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가로채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단호하게 의자를 두드렸다.

“관사에 다녀오는 길이지? 앉아서 일 보고 있어. 금방 갔다 올게.”

“미처 말을 못 했는데.”

그가 미간을 좁히며 한 주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댄 앞으로 요새 안이든 밖이든 절대 혼자선 아무 데도 못 다녀. 내가 그 꼴을 가만 놔둘 거라 생각해?”

이젠 이한율도 없는데 굳이, 말을 내뱉으려던 한 주임은 야닉의 얼굴을 보고 그만 입을 꾹 다물었다. 강압적인 언사에도 그 속에 아픔이 짙게 묻어난 괴로운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덩달아 먹먹해진 얼굴로 그녀는 야닉의 뺨을 쓰다듬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나도 혼자는 아직 좀 무서워. 그러니까 미엘라를 데리고 갈게.”

“…안 가겠다고는 안 하는군.”

“계속 방 안에만 있을 순 없잖아. 그건 싫어.”

입술을 뾰족하게 모으고 어색하게 눈치를 보자 그가 낮은 한숨을 내쉰다. 좀처럼 보기 힘든 투정에 그가 계속 고집을 피울 순 없었다. 한 주임 역시 어슴푸레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낯간지러운 짓이었지만 한 주임은 슬며시 용기를 내어 그의 팔을 꼬옥 잡았다.

“응?”

머릿속으로는 부끄러워 방방 날뛰면서도 그녀는 단둘만 있는 공간이라는 변명을 되새기며 실컷 어리광을 부렸다.

“…….”

금방 녹아 흐물거리는 금색 눈동자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순간이었다.

가끔 써먹어야지. 한 주임은 남몰래 다짐하곤 드레스룸으로 가볍게 총총걸음을 옮겼다.

* * *

흐아암, 크게 하품하는 미엘라와 걷던 한 주임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전신 갑옷으로 중무장한 시커먼 기사 네 명이 기차처럼 줄지어 따라오는 아침 산책길은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바깥에 나온 게 어디야.’

그가 끝까지 반대할까 봐 노심초사했는데, 이 정도면 감지덕지한 수준이었다.

한 주임은 사원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사제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주고받으며 기분 좋게 언덕을 올랐다.

몸은 좀 어떠시냐는 걱정이 담긴 인사가 불편하지 않고 고맙게 느껴졌다. 자신을 향해 허리를 굽히는 사람들의 태도도 전보다 훨씬 더 따스하고 공손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상할 정도로 시선이 오래 머물기도 했다. 낯설지 않은 기시감에 그녀는 자연히 미엘라를 돌아보았다.

“주임님은 좀 더 당당하게 지위를 누리셔도 괜찮아요! 벌써 합방까지 마쳤는데, 웁!”

범인이 여기 있었구나! 아연실색해서 미엘라의 입을 틀어막은 한 주임은 곧바로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까지 공공연하게 사생활이 드러날 줄이야…….

침실을 드나드는 하녀들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차마 각오까진 다지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기도라도 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아야겠어.’

후! 후! 짧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회랑을 걷던 한 주임은 기도실 밖에 기사들을 세워 놓자마자 벌컥 문을 열었다.

“……!”

허둥지둥 따라 들어온 미엘라가 우뚝 서 있던 한 주임의 등에 코를 박았다.

“주임님…?”

얼얼한 코를 매만지던 미엘라는 곧이어 한 주임과 마찬가지로 바짝 얼어 버렸다.

“공주… 아니, 왕녀님…!”

미엘라가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일순 벼락같이 날쌘 동작으로 한 주임의 앞을 막아섰다.

세레나가 그 모습을 잠잠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축하를 해 주어야 하나, 아니면.”

느린 동작으로 바닥에서 일어난 세레나가 융단을 밟아 걸으며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저주를 퍼부어야 하나.”

“더… 더 오시면 밖에 있는 기사들을 부를 거예요!”

떨면서도 제법 강경한 자세로 미엘라가 경고하는데도 그녀의 움직임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런 미엘라가 보이지도 않는지 한 주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세레나는 빙긋 웃기까지 했다.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실은 네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그게 무슨 말이죠?”

한 주임이 바짝 긴장한 채로 물었다. 이혼하고 아이마저 야닉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태연자약한 태도가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세레나가 사원에 딸린 객사에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조만간 내보낼 거라는 야닉의 말도 함께 들은지라 당연히 세레나 역시 알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설마 모르고 있는 걸까. 안다면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의심으로 가득한 눈을 하고 그녀를 지그시 보자 세레나가 돌연 두 손을 덥석 잡아 왔다. 미엘라가 말릴 새도 없이 날렵한 동작이었다.

“네 부하가 사미를 죽였다며? 내 손으로 못 해낸 것이 안타깝지만, 그가 고통스럽게 죽었다니 어찌나 기쁘던지!”

한 주임은 본능적으로 세레나의 눈빛에서 이상한 무언가를 읽어 냈다.

분명히 얼마 전까지 자기더러 사미 크랩턴을 죽인 마녀라며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악을 써 대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세레나는 누구보다 신난 얼굴로 무서울 만큼 활짝 웃고 있었다.

“머리만 내놓고 땅에 묻혔다고 들었어. 게다가 눈이 뽑힌 자리엔 흙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지 뭐니! 세상에, 끔찍하기도 하지!”

“저기, 저기요. 갑자기 왜…. 일단 진정 좀 해요.”

당황한 한 주임이 그녀의 팔을 잡아 내렸다. 맥없이 흔들리면서도 세레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퍼뜩 눈을 빛내더니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놈이 날 납치했어! 멀쩡히 잘살고 있던 날 로엘까지 끌고 가서 욕보였단 말이야!”

새파란 눈에 물기가 차오른 건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이제 두 팔을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 사실이 아버님께 알려지면 난 죽을 거야…. 꼼짝없이 끌려가서 죽을 거라고…….”

미엘라와 한 주임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연히 바라보기만 할 때, 멀리 서 있던 시에나가 고갤 내저으며 다가왔다.

시에나는 덜덜 떠는 세레나의 어깨에 망토를 둘러 주곤 한 주임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왕녀님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델피온 왕국에도 전해진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왕녀님을 데려가겠다는 서신이 도착했지요. 그걸 아신 다음부터 왕녀님이 이렇게…….”

“이혼까지 한 마당에 고국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낫지 않나요, 부인?”

미엘라가 궁금증을 못 이겨 함부로 내뱉은 말에 한 주임이 얼른 눈으로 다그쳤다. 세레나의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하녀장은 이미 포기한 얼굴로 한숨만 내쉬었다.

“율리안 님이 안 계셨다면 상관없겠지요. 하나 데려가신다면 왕녀님이 혼외자를 낳았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지라…….”

왕녀의 혼전임신을 인정하는 순간 마지막까지 피해자를 자청하며 변상을 요구했던 델피온은 한순간에 우스운 꼴이 되어 버린다. 더군다나 5년간 야닉에게서 뜯어낸 금액만 해도 한두 푼 수준이 아니었다. 야닉이 역으로 돌려 달라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왕국의 거취는 불 보듯 뻔했다.

세레나와 율리안을 데려가 처형 후 죗값을 치렀다고 공표하거나, 율리안은 세레나의 아이가 아니라고 뻔뻔하게 우기거나.

어느 쪽이든 간에 세레나가 율리안을 데리고 살 수 없음은 피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나뿐인 아들과 생이별을 하게 생겼으니 정신이 나갈 수밖에. 시에나는 그렇게 말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차라리 다시 한번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쳐서 율리안 님과 사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가 설득을 했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세요.”

“멀쩡한 집을 놔두고 내가 어딜 간단 말이니? 헛소리 좀 작작 하렴, 미라엘.”

하녀장에게 미엘라도 아니고, 미라엘이라고 부르는 세레나를 보며 한 주임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세레나는 단단한 착각 속에 빠져 사는 듯했다. 저를 보며 해맑게 웃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코를 훌쩍이던 그녀가 눈물을 닦고 말갛게 웃었다.

“어쩌면 네가 2황자비로 들어오는 게 다행일지도 몰라. 델피온에선 중혼이 금지라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새 아내를 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 나도 이제 고집 피우는 건 그만두겠어. 앞으론 우리 둘이서 사이좋게 지내자꾸나.”

미엘라가 그런 세레나를 보더니 충격을 받은 얼굴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는 황망한 시선을 올려 한 주임을 향해 울먹거렸다.

“왕녀님은 아직도 본인이 황자비인 줄 아시나 봐요…….”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