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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24화 (12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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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임은 그길로 사원을 내려와 곧바로 방으로 달려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문을 여니 업무를 보고 있던 야닉이 한달음에 달려온다. 그녀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야닉, 이방인 중에… 소환된 사람 중에 정신과 의사는 없었어?”

“응?”

야닉은 그녀를 소파로 데려가 앉혀 놓고 물잔을 내밀었다.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봐. 정신과 의사라니 무슨 말이야?”

불안하게 널뛰던 마음이 차분한 그의 목소리에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한 주임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한 잔을 모두 비우고 긴 숨을 내쉰 그녀는 사원에서 세레나를 만나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녀의 표정이 어땠는지를 전하며 작게 몸을 떨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세레나의 상태는 그녀로선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델피온으로 돌아가면 죽을 수도 있고 아들과 강제로 떨어져 살 수도 있다는 세레나의 미래는 결코 바란 적도, 원한 적도 없는 결말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여전히 야닉의 아내라고 생각한다면 멀리 떠나는 것도 불가능할 텐데.

“나 때문일까? 아닐 거라고 믿고 싶은데…. 공주가 저렇게 된 데는 내 책임이…….”

무겁게 짓누르는 자책감에 손이 떨려 왔다.

“제인. 그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은 야닉의 곧바로 손가락을 얽혀 왔다.

단단히 깍지를 끼는 손길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야닉이 뜨거운 눈길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게 더 서글펐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세레나를 모른 척할 리가 없어. 야닉은 분명 공주를 책임지려 할 거야.

여자로서는 아닐진 몰라도 어떤 형태로든 세레나를 지켜 줄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아는 야닉은 마음이 따뜻하고 책임감 넘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세레나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래서 제 발로 아크만을 떠날 수 있도록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다.

“꼭 이방인이 아니더라도 정신적으로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왕녀는 미치지 않았어.”

야닉이 분명한 목소리로 한순간에 상념을 깨뜨렸다.

“……뭐라고?”

멍하니 되묻는 말에 그가 진지한 얼굴로 시선을 맞추고 재차 단언했다.

“제인, 왕녀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교활한 인간이야. 지금은 마지막 발악을 하는 중이고.”

“그게 무슨 말이야…?”

야닉이 바닥에서 일어나 소파에 나란히 앉으며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미친 척을 하면 내가 자길 버리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거야. 델피온으로 돌아갈 수 없고, 그렇다고 혼자 살아갈 자신도 없으니 최후의 수단으로.”

“그럼 그게 다 연기라고?”

충격을 받은 얼굴로 한 주임이 입을 떡 벌렸다. 눈물 콧물 쏟아 내던 세레나의 모습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왕녀는 옛날부터 거짓말을 숨 쉬듯이 했어. 사용인들이 제 험담을 했다, 하녀가 제 물건을 훔쳤다, 괴한을 시켜 자길 납치하려 했다….”

그가 과거를 떠올리며 이내 피곤한 얼굴을 했다.

“그대도 벌써 봤잖아. 율리안을 내 아이라고 뻔뻔하게 우기던 모습을. 왕녀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야.”

“허.”

듣고 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세레나는 요새에 다시 발을 들였을 때부터 머리채를 잡았던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정상적인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사고가 제대로 박힌 사람이면 돌아올 생각조차 안 했을 텐데!

바보같이 그걸 간과하다니, 한 주임은 황당하다 못해 그것도 모르고 깜빡 속은 자신에게 화까지 날 지경이었다.

“뭐 그런 사람이 다…….”

“일단은 아이도 있고 하니까 날이 풀리는 대로 얼마간 쥐여 주고 내보낼 거야. 그러니 그댄 걱정할 필요 없어.”

그가 손을 뻗어 한 주임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책임감 느낄 필요도 전혀 없고. 이혼은 훨씬 더 예전부터 예정됐던 일이었어.”

“……정말?”

그녀가 무슨 이유로 괴로워하는지 모를 야닉이 아니었다.

또 제 탓이라며 자괴감을 느낄 테지. 그 꼴을 가만 볼 수야 있나.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정말.”

그래도 여전히 불안한 기색인지라 야닉은 차라리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조금 쉬었다가 식사하고 같이 본성에 갈까? 마침 공사가 마무리 단계거든. 새로 꾸민 침실이 당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부드럽게 웃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자 한 주임이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더한 짓도 여러 번 했는데 고작 이 정도에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아. 경황이 없어서 미리 말을 못 했는데, 루이자는 잠시 고향 집으로 돌아갔어. 그대의 일로 많이 괴로워하길래 좀 쉬면서 몸도 추스르고 오라고 했거든.”

그 말에 한 주임이 대번에 토끼 눈을 하고 쳐다봤다.

“많이 아프시대?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앓아누웠다는 얘기는 얼핏 들었는데.”

“그대에게 많이 미안했을 거야. 그대가 납치당한 게 본인 탓이라고 생각했겠지.”

“그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이 순진하고 착해 빠진 여자를 어찌하면 좋을까.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문 사이로 불쑥 고갤 내민 미엘라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성급하게 끼어들었다.

“세레나 왕녀님이 미치지 않았다는 게 사실인가요? 엿들으려던 건 절대로 아닌데 주임님이 문을 안 닫으셔서 무심코…….”

야닉은 놀란 기색도 없이 잠잠하게 대꾸했다.

“그래. 그렇다고 내색은 하지 말고.”

“네, 네! 알겠어요! 그건 염려 마세요!”

한껏 상기된 얼굴을 보니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뭐. 별 상관은 없지만.

그가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으며 한 주임을 품에 안았다.

* * *

“그래서, 왕녀가 정신 나간 자작극을 펼친다는 건 진짜고?”

스캄이 호기심 어린 눈을 번뜩였다.

자리에 모인 이들의 면면에도 같은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야닉은 자신에게 쏠린 이목에도 심드렁하게 어깨를 추켜세울 뿐이었다.

“그 여자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야 모르지.”

“주임님이 신경 쓸까 봐 거짓말하신 거죠.”

포라킨이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저, 저 지독한 놈. 스캄은 차마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아무튼,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 제인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게 조심들하고. 가뜩이나 루이자의 일로 마음이 안 좋을 테니까.”

“제 손으로 유배 보내 놓으시고선 참으로 뻔뻔하십니다. 대장님.”

브레고가 감탄과 책망이 미묘하게 뒤섞인 말투로 혀를 내둘렀다. 그러자 잠잠히 있던 로하겔 경이 즉각 테이블로 몸을 바싹 붙였다.

“집사장으로선 나무랄 데 없어도 책사로선 분명한 실책이었다. 이한율을 호위로 붙인 당사자로서 루이자 호프만 부인이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 브레고 경.”

“그렇게 따지면 한율 님… 아니, 이한율 그자를 가르친 저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놈에게 운디네의 지팡이를 쥐여 준 나도 잘못이 있다는 말이군!”

포라킨과 다위가 연달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쯧쯧, 혀를 차던 알리온이 그만. 하고 좌중을 침묵게 했다. 그는 주름진 손을 무릎 위에 맞잡은 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세레나 왕녀님은 사원에서 잘 보살피다가 후에 거취를 정하는 것으로 하지요. 델피온에는 내가 직접 서신을 보내 놓을 테니 일단락 짓고……. 우선은 공석이 된 책사 자리부터 해결합시다.”

“루이자도 나름대로 고충이 많았을 거야.”

야닉이 매끄럽게 화두를 이어받았다.

“안목을 더 키우라는 의미에서 내보내긴 했지만, 아예 해고하겠다는 건 아니야. 낮에는 성을 관리하고 밤에는 도서관에 틀어박혔던 그녀의 노력을 한순간에 배반할 순 없는 일이지.”

그의 말에 로하겔 경은 얼굴이 반쪽이 될 정도로 공무에 매달리던 몇 년 전의 루이자를 자연스레 떠올렸다.

야닉이 하루아침에 영지를 떠맡았을 때 손이 부족한 나머지 집사장이었던 루이자를 보좌관 자리에 앉혔더랬다.

임시로 부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그녀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처럼 치열하게 정치와 경제를 공부했다.

로하겔 경 역시 그런 루이자의 노고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공연히 무안해진 그가 큼, 헛기침했다.

“…차라리 정권이 바뀐 다음 돌아오라고 하지요. 마음이 약한 분이니 혹시라도 벌어질 유혈사태를 대비해서요.”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전문인력을 들일까 해. 기왕이면 루이자가 복귀했을 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노련한 인물로.”

“예. 바로 찾아보겠습니다.”

로하겔 경이 잉크에 깃펜을 담그는데 야닉이 그 위로 손을 들어 막는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띤 얼굴로 그가 고갤 저었다.

“따로 봐 둔 자가 있어. 경이 알아볼 필요는 없고.”

황궁에 아는 실무진이라도 있는 건가, 두루뭉술하게 추측하던 인원들은 이내 안건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뤄 두었던 주제를 드디어 꺼낼 차례가 되었다.

“자! 이제 귀환석 이야기를 해 볼까. 이방인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시간에 대해 말이지.”

스캄이 사뭇 활기차게 꺼낸 말에 모든 이의 시선이 저절로 임철우에게 집중되었다.

다위가 곧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팔짱을 꼈다.

“너, 정말로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냐? 나처럼 태어난 곳이 통째로 없어진 것도 아닌데 말이야.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네 부모는? 형제들은?”

땋아 내린 턱수염이 책상 위로 늘어지도록 머리를 눕혀 묻는 다위를 보고 임철우는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질렀다.

“부모님은 어릴 때 이미 돌아가셨고, 위로 누님 두 분이 계시기는 하는데…. 제가 고등학생 때 다들 시집을 가서 원체 데면데면했어요. 제 집은 이제 아크만 영지 안에 있는 ‘임식당’이에요.”

멋쩍게 웃으면서도 단호한 태도였다. 다위도 더는 뒷말을 붙이지 않고 입맛만 쩝쩝 다셨다.

포라킨이 찰나의 어색한 침묵을 깨고 야닉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거사가 끝날 때까지는 함구하고 있다가, 제국군이 전부 돌아간 뒤에 영지의 안전이 확보되면 그때 돌려보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브레고가 조금 의외인 얼굴을 했다.

“이방인들이랑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분들의 힘이 얼마나 큰 전력이 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소리야. 이 멍청아.”

투덕거리는 두 사람을 보던 알리온 역시 무겁게 의견에 동참했다.

“이 늙은이도 동감입니다. 이방인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을수록 우리 영지는 훨씬 더 안전할 겁니다. 예상치 못한 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겠지요.”

“몇 년씩 기다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끽해야 한 달 하고도 고작 며칠일 텐데. 일단 덮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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