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도 이의 없습니다.”
게다가 스캄과 로하겔 경까지 아무런 잡음 없이 한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드물었다.
야닉은 마지막으로 다위와 임철우를 보았다. 다위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촛불만 노려보고 있었고, 임철우는 눈을 내리깐 채로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전원 만장일치라.
좌중을 훑던 그의 눈이 일렁이는 촛불보다도 더 밝게 타올랐다.
“이방인들은…….”
침묵을 깨고 야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돌려보낼 거야.”
그는 즉각적으로 터져 나올 반발을 기다렸으나 회의실엔 정적만이 맴돌 뿐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란 뜻으로 가만히 둘러보는데 포라킨이 선뜻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대장님만큼 이방인들을 아끼는 분도 없죠.”
브레고 역시 고개를 까딱거리며 동조했다. 스캄이 커다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죽은 고대인이 그랬다며. 소환됐던 시기로 돌아갈 수 없다고. 그렇다면 하루라도 빨리 보내는 게 맞긴 하지.”
그의 말에 로하겔 경도 무거운 마음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누군가에겐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절실할 수도 있을 터.”
요새의 이익을 위한 냉정한 판단에는 모두가 동의하면서도, 개개인의 생각으론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까짓거 이방인 따위 없어도 이 다위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다들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그것참 든든하구만.”
스캄이 킬킬대며 엄지를 흔들어 댔다.
야닉은 자신의 가신들이 가진 인간적인 면모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는 뿌듯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두 팔을 테이블 위에 짚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단순히 감성적인 이유만은 아니야. 시기를 늦출수록 상황이 복잡해지거든. 만에 하나라도 시즈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귀환을 반대할 가능성도 있어. 집권 초기에 이방인 세력을 잃는다는 건 황제에게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닐 테니.”
“흐음. 일리가 있는 말이군요.”
알리온이 고갤 주억거리며 동조했다.
“자칫하면 돌려보내려는 우리와 머물게 하려는 새 황제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도 있겠습니다.”
야닉은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으며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시즈가 귀환 문제에 관여하기 전에 우리 선에서 발 빠르게 처리해야 해. 다들 서둘러.”
문을 닫고 나가는 주군의 등을 바라보던 이들의 얼굴에 제각각 미묘한 기색이 스쳤다.
휘유, 숨을 돌리는 브레고의 휘파람 소리가 고고한 적막을 깨뜨렸다.
“나는 아직도 우리 대장님이 따뜻한지 차가운지 잘 모르겠단 말이야.”
“확실한 건 여기 모인 우리보다는 몇 수나 앞을 내다보고 계신다는 사실이지요.”
알리온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의자에 기대어 놓은 지팡이를 잡았다. 브레고만이 어딘가 아쉬운 기색이었다.
“군대가 돌아간 다음에 후딱 보내면 안 되는 건가. 쩝.”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한심한 눈을 흘기며 경고한 포라킨이 뒤이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줄줄이 일어서는 동료들을 보던 스캄이 기지개를 켜며 마지막으로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구만.”
* * *
한 주임은 한참이나 거울 앞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어색한 기분과는 달리 전신 거울에 비친 여자는 완벽히 이 시대의 복장을 한 귀족 여성으로 보였다.
그녀는 낯설고도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모슬린과 새틴으로 맞춘 진녹색 드레스는 발등을 덮을 정도로 길게 떨어졌고, 골반을 감싸는 금색 띠와 아래로 갈수록 폭이 넓어지는 소매의 끝동엔 섬세한 자수가 새겨져 있다.
달군 쇠로 구불구불하게 만든 머리카락은 가운데로 가르마를 타 어깨 위로 떨어뜨리고, 제법 큼지막한 금귀걸이까지 착장을 마친 모습은…….
“아름다워.”
마지막 감상은 야닉의 몫이었다.
그는 미엘라에게 건네받은 도톰한 맨틀을 어깨에 빙 둘러 주며 그녀의 몸을 돌려세웠다.
겉옷의 목둘레에 촘촘히 박힌 하얀 털이 살갗을 간지럽힌다. 옷깃에 달린 가느다란 체인을 장식 핀으로 고정해 준 그가 한걸음 뒤로 물러나자 그녀가 결연히 고갤 들었다.
“나 안 이상해?”
제대로 웃으면서 보내 주어야 하는데. 지금 내 얼굴이 어떻더라.
문득 불안해져서 다시 거울을 보려는데, 야닉이 단단히 손을 잡아 왔다. 한 주임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둬 놓고 나만 보고 싶을 만큼 예뻐.”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면 동료들을 따라가고 싶어? 나 버리고?”
“장난치지 말고.”
버림받은 새끼늑대 같은 얼굴로 손바닥에 입술을 누르며 장난치는 그의 어깨를 툭 밀어 냈다.
예쁘게 잘 웃고 있다고, 그러니 연습은 이제 충분하다고. 야닉이 손바닥 위에 간지럽게 속삭였다.
지난 며칠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야닉은 사무실 사람들을 포함해 영지에 있는 이방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중대 발표를 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소환됐던 날짜가 아닌 이곳에 있던 만큼 시간이 흐른 뒤로 간다는 것.
어디로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태어났던 장소로 갈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까지 전부.
그는 알고 있는 것을 숨기지 않고 성실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과 고심에 빠진 사람, 머리를 조아리며 고맙다는 사람과 참아 왔던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까지.
영지에 살고 있는 이방인은 전부 73명이었고, 귀환을 결정한 이방인은 절반이 조금 넘는 숫자였다.
[돌아갈 사람은 그 정도뿐이야.]
한 주임은 귀환석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단언하던 페어리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생각보다도 많은 사람이 이곳에 남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한 주임으로선 조금은 안심이 되는 결과였다.
남기로 한 사람들도 나처럼 이곳에 소중한 사람이 생긴 걸까. 지난날은 모두 잊고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것일까.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이방인이라는 ‘외지인’이 저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마음 한편에 든든한 울타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야닉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레이트 홀에 가득 모인 성의 사용인들과 아크만 기사단과 트라야누스 용병들. 그리고 가운데에 선 한국인들.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러 온 모든 사람의 시선이 제국의 3황자와 그의 이방인 약혼자에게 몰려들었다.
“재인아.”
박 차장이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한 주임은 조금 망설이다가 야닉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마력으로 충분히 채워진 상태에서 오래간만에 느끼는 타인과의 접촉이었다.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그런 온기.
“잘 살아. 연락은 못 하겠지만…. 가서도 내가 기도할게.”
“감사해요. 차장님도 잘 지내세요. 저희 집 비번 안 잊으셨죠?”
괜히 울컥하는 걸 감추려고 어젯밤 내내 말했던 것을 또 꺼내니 박 차장이 그렁그렁한 눈으로도 설핏 웃었다.
“걱정 마. 오피스텔은 내가 알아서 잘 정리할게.”
“싱크대 맨 끝 상부장에 통장이랑 도장 있어요. 얼마 안 되긴 하지만 아기한테 써 주세요.”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박 차장을 꼭 안아 주고는 그녀는 김유정에게 다가갔다.
“유정 씨도 잘 지내.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주임님, 으어헝…….”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도 여전히 눈물 콧물을 쏟아 내던 김유정이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공 대리가 그런 김유정을 부축하며 멋쩍게 웃었다.
“안 간다고 하면 어떡하나 했는데, 엄마 보고 싶다고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 하핫…….”
“대리님도 조심히 가시고요. 유정 씨 잘 부탁드려요.”
“알았어. 아니, 알았어요. 근데 나 꼭 한번 해 보고 싶었던 게 있는데…. 마지막이니까 어떻게 좀 안 될까?”
슬쩍 야닉의 눈치를 보는 공 대리가 미심쩍었지만 그의 말대로 마지막이니까, 한 주임이 의아한 얼굴로 가만히 있자 공 대리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누, 누나. 잘 지내요. 재인 누나.”
“미친…. 징그러워…. 흑…….”
공 대리 품에 안겨 울던 김유정이 퍽퍽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그 모습을 보고 한 주임이 낮은 웃음을 삼켰다.
“거, 적당히들 해, 좀. 빨리들 가란 말이야.”
가만히 지켜보던 염 부장이 쯧, 혀를 차자 박 차장이 성큼 다가가더니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부장님, 정말로 안 가셔도 괜찮아요? 사모님이나 자제분이…….”
박 차장의 말에 염 부장은 숱 없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다시 볼 것도 아니고……. 까놓고 말하자면 애 다섯 살 때 이혼하고 캐나다 가서 산다고 연락 끊긴 지 오래야. 나도 이제 새 출발 해야지.”
뜬금없는 고백에 김유정이 단박에 고갤 돌렸다.
“뭐야! 부장님 맨날 가정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칼퇴하셨잖아요!”
“그러고 대리운전 뛰었다, 왜! 내 나이쯤 되면 노후 준비는 필수라고!”
“아.”
순식간에 숙연해진 분위기에 염 부장이 무안했는지 도르륵 눈을 굴렸다.
“어차피 돌아가도 내 나이면 복직도 못 할 텐데, 가서 빌빌거리느니 밥 주고 재워 주는 여기가 백배는 낫지…….”
아무도 관심 없었던 염 부장의 개인사였다.
야닉이 주위를 환기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그만 돌아갈 시간이야. 인사는 어제 연회에서 충분히 했으리라 생각하고.”
그의 눈짓에 사용인들이 귀환석이 담긴 금고를 들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정말로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바닥에 있던 각자의 짐을 어깨에 이고, 캐리어를 손에 들었다. 아크만에서 지내며 받았던 금화와 옷가지, 개인적인 기념품들로 이방인들의 여장은 제법 무거운 편이었다.
알리온이 사제에게서 건네받은 열쇠로 금고의 자물쇠를 천천히 풀었다. 귀환석들을 확인한 그가 허리를 펴고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전했다.
“피를 묻힌 자가 태어난 곳으로 간다는 건 우리의 추측일 뿐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뿔뿔이 흩어지는 곤란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일행 중에 한 사람을 정해서 그분의 피를 나누어 가지도록 하지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짐가방을 멘 양승원이 나섰다.
“제가 태어난 곳은 서울에 있는 한국대 병원입니다. 그곳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같은 곳에 건실하게 있을 테니 동의하시는 분들은 제 쪽으로 와 주시면 됩니다.”
그의 말에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방인이 한쪽으로 몰려들었다.
양승원은 눈물 모양의 돌 하나를 집어 들고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 조심스럽게 문양에 가져다 댔다.
자로가 알려 준 방법대로 귀환석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혈흔을 감지한 작은 돌에서 서서히 붉은빛이 피어나는 광경에 한 주임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어느샌가 다가온 야닉이 떨리던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감싸 안았다.
“괜찮아. 잘될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