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26화 (126/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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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양으로도 귀환석이 활성화되는 것을 확인한 알리온이 고갯짓을 하고, 단검과 청동 접시를 든 사제들까지 모든 준비를 마쳤다.

양승원이 단검으로 팔에서 피를 내어 그릇에 떨어뜨리면 사제들이 빠르게 귀환석에 묻혀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기를 이어 나갔다.

마지막 돌까지 전부 끝나자 포라킨이 서둘러 양승원에게 회복마법을 걸었다. 녹색 빛이 내려앉아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어 가는 것을 내려다보던 양승원은 조금 서글프게 웃었다.

“이런 것이 우리 세계에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의학지식에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지난 4년간 요새에서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포라킨이 진심으로 건네는 말에 그가 슬쩍 눈물을 훔쳤다.

“의사로서의 사명감보다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는 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양 선생님 덕분에 내가 다시 두 발로 걷게 되었는데요. 그저 고마운 마음만 가지고 건강히 돌아가십시오.”

씩씩하게 걸어 나온 임철우가 악수를 건네며 환하게 웃었다.

양승원의 어깨를 두드려 준 그가 루의 부축을 마다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의 손에도 전부 귀환석이 쥐어졌다.

모두가 예감한 시간이 다가오자 홀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그동안 즐거웠고 다시는 보지 맙시다!”

남기로 한 누군가 농담조로 던진 말에 떠나는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제각기 마지막 인사를 외쳐 댔다.

“잘 놀다 간다!”

“이연주를 잊지 마세요!”

“가자마자 핵닭볶음면 먹을 거야!”

여기저기서 최후의 한마디를 던지는 와중 준비가 끝난 이들이 하나둘 시동어를 읊조렸다.

‘팔린.’

사람들의 몸이 처음 소환당했을 당시처럼 희미해지고 있었다. 김유정이 투명해지는 제 손을 보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주임님! 우리 가요! 진짜 가요!”

“잘 가, 유정 씨!”

“카톡 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하는 김유정의 얼굴이 서서히 흐려지더니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결혼 미리 축하해요, 누나!”

“우리 재인이 잘 부탁드려요, 황자님!”

공 대리와 박 차장 역시 마지막 말을 남기고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방금까지 동료들이 서 있던 자리엔 카펫 위로 밟았던 자국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어쩐지 그들의 얼굴이 아스라이 흐려져 잘 떠오르지 않는다. 진짜 갔구나.

“……아.”

사무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한 주임은 결국 참아 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안녕. 사무실 사람들. 안녕. 웬수 같던 내 동료들.

보고 싶을 거예요. 잘 가요. 안녕.

야닉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 품에 안으며 가만히 등을 토닥였다.

“잘 참았어. 잘했어. 잘했어…….”

나지막이 감기는 목소리에 그녀는 고삐가 풀린 사람처럼 펑펑 울었다. 그 모습을 착잡하게 바라보던 염 부장에게 알리온이 조용히 다가왔다.

“두 개가 남았으니… 하나는 주임님이, 다른 하나는 사자님께서 가지고 계시지요. 가장 최근에 오신 두 분이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을 때를 대비해서요.”

그가 내민 귀환석을 염 부장은 말없이 받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작은 돌 옆으로 공 대리가 주고 간 쪼글쪼글한 담뱃갑이 매만져졌다.

“자식이, 돗대 가지고 인심 쓰기는…….”

부하 직원들이 떠나간 자리를 심란하게 바라보던 염 부장이 결국 고개를 돌렸다. 머지않아 축축해진 코에 결국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 * *

새 단장을 마친 본성의 침실은 전보다 커지고 훨씬 더 밝아졌다. 건축가 이방인과 다위가 합세해서 벽을 트고 창을 내어 발코니까지 갖춘 완벽한 2인실이었다.

야닉은 방으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여운에 잠겨 눈물을 닦고 있던 한 주임을 소파에 데려가 앉혔다.

“좀 진정이 됐어?”

“응…….”

“물 마실래?”

끄덕끄덕. 건네받은 물을 반 정도 비우고 내밀자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로 잔을 내려놓은 그가 찬찬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료들이 돌아가서 쓸쓸하겠네.”

내가 쓸쓸한가. 한 주임은 잠시 생각하다 고갤 저었다.

“…모르겠어. 그냥 기분이 좀 이상해.”

사실 여기 와서 그렇게 자주 붙어 있는 편도 아니었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일주일에 5일씩 매일매일 보던 시간보다도 적었을 텐데.

어쩌면 다음 날이면 또 볼 수 있다는 것과 죽을 때까지 영영 보지 못한다는 차이가 불러온 슬픔이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해 본다.

한동안 야닉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여운에 잠겨 있던 그녀가 어렵사리 용기를 내었다.

“옛날에는 날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불편했는데… 지금은 아는 사람들이 떠났다는 게 슬픈 것 같아.”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던 이야기였다.

“나는…. 나는 실은, 가족이 없거든.”

남을 통해 강제로 알려지는 과거가 아닌, 스스로 밝힌다는 건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첫 고백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 채 보육원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 내성적인 성격 탓에 담임 선생님에게 권유받아 시작했던 양궁.

큰 대회에서의 실수로 시작된 삶의 전환점. 갑작스럽게 떨어진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야닉 리버스.

한 주임은 모든 것을 담담히,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스물아홉 해의 인생은 생각보다 긴 서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말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그 두 배의 삶을 살지도 모르는데, 고작 절반도 지나지 않은 삶에 얽매여 휘둘리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 아닐까.

묵묵히 듣고 있던 야닉이 품에서 반지를 꺼낸 것은, 그녀가 말을 마치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반응을 살필 때였다. 반지를 본 순간 그대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언제 주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야닉이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대의 이야길 들으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

“…….”

“제인. 내가 그대의 가족이 되었으면 해. 날 당신의 일부로 받아들여 줘.”

이건, 현실일까. 어쩌면 나는 아직도 나무가 보여 주는 환상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습관처럼 의구심이 들기도 전에 그가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이 외로웠던 시간보다 더 많은 날을 기쁨으로 채워 줄게.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평생 사랑할 거야. 그건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 터뜨린 웃음에 그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사는 동안 긴장이라는 건 모를 줄 알았는데.”

스스로도 신기하다는 듯 자조적으로 웃던 야닉이 한 주임의 왼손을 살며시 받쳐 들었다.

붉은 가넷이 가운데에 커다랗게 박힌 주위로 자잘한 자색 사파이어가 꽃잎처럼 새겨진 반지가 그녀의 약지에 스르륵 끼워졌다.

“나와 결혼해 줘, 제인. 나조차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당신을 사랑해.”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고 감격에 찬 목이 뜨겁게 막혀 버렸다. 그렇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을 때.

“사랑에 기한이 있다면 만 년으로 하겠어.”

“……?”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대사에 미묘한 표정을 짓자 야닉이 이게 아닌가, 하는 얼굴로 눈을 맞췄다.

“김유정이 이 말은 꼭 하라고 했는데. 틀렸나?”

“뭐?”

안 봐도 뻔한 김유정의 당부가 그려져 한 주임은 조금 전까지 오열하던 것도 잊은 채 젖은 눈을 접으며 환히 웃었다.

보는 이까지 벅차오르게 만드는 미소에 야닉의 가슴께도 아릿해졌다. 지끈거리는 것 같더니 곧 터질 것 같이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가 한 주임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악! 듣기에도 간지러운 소리를 내지른 그녀가 목을 감싸 안아 왔다.

“허락한다고 말해.”

“내, 내려!”

성큼성큼 침대로 향하는 그의 등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한 주임이 발버둥 쳤다.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가소롭게 웃던 야닉이 풀썩, 그녀를 던지듯이 침대로 내려놓았다.

“날 남편으로 맞이하겠다고 말해.”

그가 음험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 옆으로 팔꿈치를 짚더니 코가 닿을 듯 얼굴을 아래로 내렸다.

욕망과 장난기가 뒤섞인 표정에 한 주임은 넘칠 듯한 충만감에 사로잡혔다. 누구와도 그를 나누고 싶지 않은 강렬한 소유욕이 들끓었다.

내 남자, 내 사람, 온전한 나만의 것.

이토록 집요하게 무언가를, 누군가를 열망한 적이 없다. 만약에 이 사람이 사라진다면 그땐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마저 들었다.

한 주임은 떨리는 손을 들어 야닉의 뺨을 감싸 쥐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가를 본 그가 작게 움찔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고 프러포즈를 받은 이 순간까지도 저 아래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불안함을 이제는 고백할 차례였다.

떨리는 목을 가다듬을 여유조차 없었다.

“나는…. 내 마음이 작아서 너 하나만 담기에도 너무 벅찬데… 너는 그게 아닐까 봐 무서워. 아무것도 가져 본 적이 없어서, 혹시라도 너를 가졌다가 잃어버릴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이 침대가 아니라 온몸을 흠뻑 적시는 것만 같았다.

무겁게 가라앉아가는 그녀를 느꼈는지 야닉이 이내 심각해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제인.”

“너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잖아. 의도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다른 부인을 들일 수도 있는 거잖아.”

“제인, 나를 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한 주임이 괴롭게 흐느꼈다.

“나도 언젠가 세레나 공주처럼 되면 어떡하지. 마음이 떠난 널 지켜만 봐야 하는 날이 오면 어떡하지…….”

야닉이 단박에 힘을 주어 그녀의 팔을 끌어내렸다.

붉게 충혈된 눈은 한 주임만이 아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열렬히 끓어오르는 그의 눈동자 역시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어딘가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짙은 음성으로 그가 한 자 한 자 힘주어 각인시키듯 말했다.

“지금껏 누구한테도 마음을 준 적 없어. 그대뿐이야. 내 인생에 당신 말고 다른 여자는 없어.”

“…….”

“그걸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황제가 아니라 신이라도 기꺼이 거역하겠어. 당신 말고 ‘리버스’의 성을 가지는 여자는 평생 없을 거야. 목숨을 걸어서라도 맹세할게.”

야닉은 잡고 있던 한 주임의 손을 제 가슴에 가져다 댔다. 그녀만큼이나 세차게 박동하는 심장이 손바닥을 통해 흘러들어 온다.

같은 고동으로 쿵쿵거리는 울림이, 자르르한 통증이 그녀에게도 오롯이 전해졌다.

“……또 결혼하면 죽여 버릴 거야.”

“그럴 일은 없어.”

“진짜로, 진짜로 죽일 거야.”

“그래. 그렇게 해.”

살벌한 말을 던지는데도 야닉은 비웃지도 않고 한없이 진지하게 받아 주었다. 한 주임은 온몸이 짓눌리도록 그를 끌어당겨 안았다.

둘 사이에 아무것도 비집고 들어올 수 없을 만큼 팔에 힘을 주자 야닉 역시 강하게 반응했다.

얼굴과 목덜미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추던 그가 문득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한 주임은 음미하듯 그의 말을 아로새겼다.

‘제인 리버스.’

그녀의 새 이름이자, 마침내 마지막이 될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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