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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에 있던 이방인들이 하룻밤 새 전부 사라졌답니다.”
“관문 병사들의 말에 의하면 여행을 간다며 소집일 안에 돌아오겠다고 했답니다. 심지어 통행문을 거치지 않고 빠져나간 자들도 있고 말이죠….”
“아크만으로 간 게 틀림없습니다! 이건 명백한 반역입니다!”
귀족 회의에 참석한 원로들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의장 안을 가득 메웠다.
제국의 황제, 헤바투스 아비옐 오웬 3세의 얼굴에도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가 주름진 손을 들어 올리자 대신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헤바투스는 수심이 짙게 깔린 목소리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짐은 이미 경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징집 명령을 내렸다. 내 셋째 아들이 제위를 노린다는 말을 믿고 말이야. 한데 이리들 다시 모인 연유가 무엇이란 말이냐.”
“폐하의 명령은 3황자를 강제 송환하여 조사하는 것이었지요. 징집된 제국군은 그저 경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반역이 확실해진 지금은 송환이 아니라, 결단을 내리셔야 할 때입니다.”
황제와 멀지 않은 상석에 앉아 있던 자가 눈을 번뜩이며 매서운 기색으로 받아쳤다.
짧게 깎은 머리와 잘 다듬어진 진회색 수염 아래의 얼굴은 그가 황제와 비슷한 연배라는 걸 보여 주고 있었지만, 좌중을 압도하는 강렬한 존재감은 제국의 태양보다도 훨씬 더 거대해 보였다.
농노의 아들로 태어나 혼자 힘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 딸을 황태자비 자리에 앉힌 희대의 사업가. 그가 바로 칼 뤼시크 공작이었다.
“폐하께서는 제가 무엇 때문에 사비를 들여 대륙 전역에서 용병들을 불러 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체포를 위해서라는 순진한 말씀은 마십시오.”
거리낌 없이 본색을 드러내는 그를 비호라도 하듯이 여러 대신이 앞다투어 동조하기 시작했다.
“뤼시크 공의 말씀이 맞습니다. 결혼 허가를 받으러 왔던 것 역시 황실 내부의 분위기를 파악하려던 목적이 틀림없어요. 그 근거로 심문할 겨를도 없이 쥐새끼처럼 궁을 빠져나가지 않았습니까?”
“결혼은 핑계였던 거지요! 얼마 전에는 대대적으로 용병들까지 모집했답니다. 외국인, 바이킹, 수인까지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그저 헛된 소문이 아니었던 겁니다.”
“…….”
가만히 듣고 있던 시즈가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남들은 3황자와 우애가 좋았던 그가 침통한 것으로 알았겠지만, 시즈에게 그것은 단지 비웃음을 참기 위한 단순한 행동일 뿐이었다.
자신들처럼 권력에 기생이나 하는 2황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자는 적어도 이 자리엔 없었다. 그 증거로 노골적인 모함이 재차 이어졌다.
“최근 아크만으로 이방인들을 호위했던 기사들의 말을 다시 한번 되짚어 봐야 합니다. 요새의 규모가 생각보다 컸으며 굳건해 보였던 점, 머무는 내내 얼굴도 못 봤다던 로기아 변경백까지 전부요. 3황자에 의해 감금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어쩌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지요.”
“그만!”
참다못한 황제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노쇠한 육신에 비해 몹시도 강건한 목소리였다.
“하여 짐의 아들을 재판도 없이 죽이란 말이냐? 하다못해 나딘 황비의 자식들도 심판대에 올린 다음에야 목을 쳤거늘! 경들은 짐의 체면을 어디까지….”
“비 전하께서는 이만 들어가시지요. 태중의 황손께 해가 될까 저어되는군요.”
감히 황제의 말을 자른 칼 뤼시크의 태도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주먹을 쥔 황제의 손이 경련을 일으킨 것처럼 떨리는 것을 보고도 모건 뤼시크는 태연자약하게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아버님의 뜻대로 하지요.”
황태자비가 몸을 일으키자 시녀들이 황급히 달려들어 그녀를 부축하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배가 나오기 시작한 그녀를 모시는 이들의 태도는 극진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천민 출신 장사치의 천인공노할 만행에도 핏대만 세우는 게 고작인 제국의 황제.
입이 딱 달라붙었는지 아까부터 한마디도 못 하고 있는 황태자.
황제가 아닌 칼 뤼시크의 눈치만 슬슬 보는 소위 고위 귀족이라는 늙은이들.
‘미치겠네.’
별궁으로 돌아온 시즈가 배를 부여잡고 웃기에 충분히 차고도 넘치는 광경이었다.
“본궁에서 즐거운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시즈의 식사를 조금씩 덜어 기미하던 피에스타가 리넨으로 입을 닦으며 여상히 물었다.
다시 생각해도 코미디가 따로 없다는 듯 웃어 대던 그가 뒤늦게 나이프를 들었다.
“아. 있었지. 내 결심을 흔들리지 않게 할 아주 재밌는 일이.”
싱글벙글하며 사슴고기를 자르는 그녀의 남편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내였다. 피에스타가 물로 입을 헹구고 가만히 보자 시즈가 친절히 내용을 보충했다.
“출정의 목표가 오늘 바뀌었거든. 경고가 아닌 토벌로, 생포가 아닌 처형으로. 이 얼마나 멋진 결혼 선물인지!”
고기를 씹어 삼키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맛을 음미하듯 천천히 턱을 움직이던 그의 눈동자에 싸늘함이 내려앉았다.
“이걸로 미련은 완전히 끝난 셈이니 고마워해야 하나…….”
피에스타의 얼굴에도 비장함이 감돌았다.
“거사의 날짜가 정해진 건가요?”
“한 달 뒤. 출정일로부터 엿새가 지난 날. 그날은 대대적인 축제의 날이거든.”
축제라. 피에스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모건 뤼시크의 생일이 그쯤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시즈가 식사를 이어 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던 피에스타가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브리아나 황비님께서 가만히 계실까요? 소식을 접한 아이노스에서도 항의 서신이 온 걸로 압니다만.”
“이미 우리 계획을 알고 계셔. 서신은 연막일 뿐이고.”
시즈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포도주를 들이켰다.
그분이 어떤 분인데, 당연히 알고말고.
* * *
앙상했던 가지 위로 푸릇푸릇한 새순이 돋아나는 시기였다. 찬 바람 속에도 꽃내음이 섞여들기 시작하는 계절, 제국의 수도에 봄비가 내렸다.
창문 밖으로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 빗물을 힐끗 보던 시즈가 거울 앞에 섰다.
하녀장이 마지막으로 에글렛을 옷깃에 달고 물러나자 제 차림새를 둘러보던 그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역사적인 날이니 신경을 써야지. 어떤가, 마거릿?”
“멋지십니다.”
향유로 금빛 머리칼을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반듯하게 선 주군을 보며 하녀장이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자네도 그렇고 피에스타도 그렇고, 사람들이 너무 뻣뻣해서 재미가 없네. 뭐… 그래서 당신들을 좋아해.”
“공주님들께서는 조금 전 연회장으로 출발하셨습니다. 이제 가실 시간입니다.”
아랑곳하지 않고 물러나 문을 열어 주는 하녀장을 본 그가 이윽고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 냈다.
푸른 제복을 입고 별궁을 나서는 그의 눈에 광채가 돋는다. 마차에서 내린 뒤 본궁을 에워싼 병사들을 둘러보는 표정에도 냉정함이 서렸다.
황금 사자의 표식이 그려진 서코트를 두르고 있는 칼 뤼시크의 사병들은 궁 바깥은 물론, 내부에도 바글바글했다.
최소한의 인원만 남긴 황궁에는 북부로 출정한 제국군을 대신해 칼 뤼시크의 무장병력이 빈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본궁 안팎으로 포진한 살풍경에 그가 쓴웃음을 삼켰다.
‘감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건가. 사갈 같은 늙은이.’
감정을 지워 내고 평소와 같이 나사 빠진 얼굴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시즈 오베라가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이번에는 찬란하도록 눈부시고 활기찬 파티장이 그를 맞이했다.
그레이트 홀을 한가득 밝히는 샹들리에 아래로 숌과 비엘을 연주하는 궁중 악사들이 한데 모여 경쾌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벽 한 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값비싼 선물들은 전부 국내외에서 밀려든 황태자비의 생일과 회임을 축하하는 뇌물이었다.
나이 든 귀족들은 테이블에 앉아 축배를 나누고, 그들의 영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인사를 나누고 술잔을 든 채 흥겹게 춤을 추기도 했다.
영애들은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머리 모양이나 드레스, 화장법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워 댔다. 그리고 그들 사이엔 2황자의 아내들도 여럿 뒤섞여 있었다.
그녀들은 곁눈질로 시즈를 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자연스럽게 수다를 이어 나갔다.
시즈는 사람들의 의례적인 인사를 받으며 회장을 가로질러 연단 위로 올라섰다.
가로로 기다랗게 이어진 테이블에는 황족들을 위한 붉은 벨벳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시종이 안내한 시즈의 자리는 황태자의 왼쪽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비어 있어야 할 황후석에는 제국에서 두 번째로 고귀한 여인인 모건 뤼시크가 떡하니 앉아 비단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자리까지 지각이라니, 형편없는 녀석.”
황태자 체이스가 주위에 전부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비난하는데도, 시즈는 여느 때처럼 능청스럽게 실실거렸다.
“준비할 것이 많다 보니 좀 늦었습니다. 전하.”
“준비는 무슨…. 또 어디서 근본 없는 자들과 놀아나다 온 거겠지.”
체이스는 코웃음을 치며 더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가차 없이 몸을 돌렸다.
시즈는 맞받아치지 않는 대신 잔을 채워 주는 시종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웃음을 던져 대는 그를 모건이 슬쩍 흘겨보았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질투 어린 시선이었다.
황자와 황녀들의 잔에 포도주가 가득 채워지자 황제가 몸을 일으키더니 황금색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것을 본 악단의 지휘자가 연주를 멈추자 연회장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황제는 껄끄러운 속내를 감추고 지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레비탄 제국에 있어 거룩한 날이 될 것이다. 새 생명을 잉태한 여인을 위해 다 같이 축배를 들자꾸나. 황가의 안위를 위협하는 역도는 용맹한 제국군이 시일 내로 처단할 것이니 이 헤바투스 아비옐 오웬의 앞길에, 위대한 제국의 앞길에는 오로지 영광만이 자리할 것이다!”
“임파우 레비탄!”
“임파우 오웬!”
마찬가지로 잔을 든 귀족들이 화답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지휘자의 힘찬 손짓에 악단의 연주가 다시 시작되고 뤼시크 공작의 주위로 축하 인사를 건네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파티는 온통 들뜬 얼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무르익는 가운데, 흡족하게 웃으며 응대하던 공작이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의 시선이 연회장의 입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양쪽으로 활짝 젖힌 문으로 회색 수도복을 입은 사제들이 줄줄이 들어서더니, 그 뒤로 수도의 교구를 관장하는 주교 사제가 불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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