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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의 예고 없는 방문에 당황한 이는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주교의 뒤편으로 전신 갑옷을 두른 신성 기사 열댓 명이 보이기 시작하자 칼 뤼시크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꺼림칙한 느낌에 공작이 시종에게 바깥 상황을 알아보라 지시하는 사이, 주교가 바닥에 끌리는 낡은 수도복을 입고 회장의 한가운데로 진중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적막으로 둘러싸인 회장 안에 젊은 사제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경사스러운 날에 교회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더군다나 황실의 후손이라면 더더욱 축성을 내려 드려야 할 터.”
“우리에겐 대주교가 계신데 무슨 축성이 더 필요하단 말입니까.”
사람들을 밀어 내고 칼 뤼시크가 걸어 나왔다.
“그보다도 초대도 받지 못한 자가 어찌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었는지 묻고 싶군요. 더군다나 무장한 성기사들까지 데리고 말입니다.”
묵직한 목소리로 을러댐에도 주교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빳빳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대주교님은 제국군과 함께 원정을 떠나셨고…. 아. 초대장이라면 벌써 받았습니다. 저기 계신 2황자님께요.”
공작의 서슬 퍼런 눈이 스르륵 돌아갔다.
어느새 계단을 내려온 시즈 오베라가 두 사람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황제는 물론, 황태자와 황태자비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넋이 나가 있었다.
“지겨운 냉전은 이제 끝낼 때도 되지 않았나요? 대사원과의 악연은 우리 황제 폐하의 대에서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에요.”
“시즈 오베라! 이게 무슨 행패냐!”
참지 못하고 체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하는 잠시 입을 닥치시고.”
여전히 팔을 든 채로 고개만 돌려 말하는 시즈의 얼굴엔 장난기가 홀연히 사라졌다.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는 체이스를 보며 그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기왕이면 아름답게 끝내고 싶었는데…. 여기 계신 공작 각하께서 궁에 개들을 잔뜩 풀어놓은지라 어쩔 수가 없네요.”
“스, 습격입니다! 커헉!”
헐레벌떡 문으로 달려든 황실 근위병이 채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뒤에서 날아든 장검이 그의 가슴을 단박에 꿰뚫었다.
제복 차림의 군인이 쓰러진 자리 위로 하얀 깃발을 든 기사가 나타났다. 혈흔으로 얼룩진 칼날이 기사의 미색 서코트 자락에 검붉은 얼룩을 만들어 냈다.
검을 뽑아 재차 목덜미에 꽂아 넣은 신성 기사는 시체 앞에 우뚝 서서 성호를 그었다. 경건하기까지 한 손짓에 연회장의 육중한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습격을 알리는 올리판트 소리가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아스라이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꺄아아아악!”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단으로 짠 신발이 아무렇게나 날아다니고 우왕좌왕하는 귀족들이 기사들의 검에 연달아 풀썩풀썩 쓰러졌다.
구석에 모여 비명을 지르던 규수들 사이에서도 잔혹한 피바람이 불었다. 드레스 안에서 단검을 꺼내 든 시즈의 부인 다섯이 그들의 목숨을 차례차례 거두고 있었다.
황제와 황태자를 둘러싼 시종들이 아비규환을 피해 서둘러 뒷문으로 그들을 모시고 달려갔지만, 외부에서 잠긴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그들의 앞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엄하다! 이놈들! 으아악!”
누구의 비호도 받지 못한 황녀들은 본능적으로 커튼처럼 내려온 휘장 뒤로 숨어들었다. 숨었다는 표현이 무색하리만치 조악한 몸부림이었다.
머지않아 황금 독수리가 그려진 휘장이 신성 기사단의 손에 자비 없이 뜯겨 나가고, 그들 앞에서 바들바들 떨던 황녀들은 꽁꽁 묶인 채 단체로 무릎을 꿇리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혼란 속에서 제 딸을 향해 몸을 돌리던 칼 뤼시크의 목에도 차가운 날붙이가 들이밀어졌다. 예리한 칼날을 목에 바짝 갖다 댄 이는 젊은 주교였다.
“목숨을 잃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계십시오.”
“……알겠소.”
품에서 단검을 꺼내려던 칼 뤼시크는 살갗을 찌르는 통증에 저항을 포기하고 두 손을 위로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즈가 달갑지 않은 얼굴로 비죽거렸다.
“야닉이 무슨 바람이 들어선지 공작만큼은 살려 두라고 해서 말이야. 내가 또 그 녀석 말은 잘 듣거든.”
그는 친절하게도 공작 대신 단검을 꺼내 보란 듯이 바닥에 버려 주었다.
도망가는 사람들과 뒤를 쫓아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이 어지러이 뒤섞인 사이를 시즈는 느긋하게 걸었다.
“황자님! 시즈! 사, 살려 주세요!”
그런 그에게 어딘가의 영애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바짓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이름이… 뭐였더라.”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중얼거리자 화려한 외모의 여자가 필사적으로 울부짖었다.
“클라우디아예요! 절 디아라고 불러 주셨잖아요! 그 밤을 벌써 잊으신 건가요?”
“그래! 맞아. 브루거 자작가의 차녀였지.”
그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젖은 얼굴에 한 줄기 희망이 차올랐다. 시즈는 빙긋 웃으며 몸을 물렸다.
“줄을 잘못 선 아버지를 탓해야지. 아, 벌써 돌아가셨나? 잘 가, 디아. 나도 반가웠어.”
“……네? 꺄악!”
미련 없이 내쳐진 몸에 좌절할 틈도 없이 그의 아홉 번째 부인이 다가오더니 여인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지옥 같은 풍경을 뒤로한 채 뒷짐까지 지고 태연히 계단을 오르던 시즈는 의외의 광경을 맞닥뜨렸다.
모건 뤼시크가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일찌감치 주인을 버리고 도망갔다가 싸늘한 주검이 된 시녀들 덕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황태자비의 얼굴이란 가히 볼만한 것이었다.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고갤 드는 그녀를 시즈는 자못 안타깝게 내려다보았다.
“그러길래 날 선택하라고 했잖아. 이게 무슨 비참한 꼴이야, 모건.”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내 부름에 응했나?”
치미는 배신감에 모건은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랑이 아닐진 몰라도 ‘뤼시크’라는 배경만큼은 절대로 거역하지 못할 줄 알았던 그가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당신이 내 아내들의 뒷조사를 시작했을 때부터 눈치를 채긴 했어. 그것도 뭐… 상대해 주기 시작하니까 얌전하길래 암살자들을 줄줄이 아내로 들였지. 밤마실에 눈먼 자업자득이라고나 할까.”
귀에 대고 속삭였던 달콤한 말들이 전부 눈을 가리기 위한 거짓이었다니.
손톱만큼의 애정도 없었던 계획적인 만남이라는 사실이 고통스럽게도 그녀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황후가 되지 못할 바에야 죽는 게 나아. 날 모욕할 셈이면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죽여.”
잇새로 사납게 내뱉는 독기 어린 말에 시즈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내 조카를 죽일 수야 있나. 그럴 순 없는 노릇이지.”
“조카? 이 아인 시즈, 당신의 아이야!”
참지 못하고 터뜨린 말은 결박당한 그녀의 아비에게도, 그녀의 남편에게도 충분히 들릴 정도로 큰 파장이었다.
별안간 큰소리에 미간을 좁힌 시즈가 대수롭지 않게 쯧쯧, 혀를 찼다.
“체이스의 아이겠지. 왜냐하면…….”
“그는 불임이야!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모건이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흥분한 그녀의 이마에 핏대가 바짝 솟구쳐 올랐다.
“사생아라도 만들까 봐 결혼한 직후부터 그의 식사에 매번 약초를 달인 물을 넣었단 말이야! 그러니 이 아이는 당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시즈 오베라의 핏줄일 수밖에!”
“다, 당신이 어떻게…….”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던 체이스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털썩 주저앉았다.
체이스의 눈엔 심장에 칼이 꽂혀 싸늘하게 식어 가는 아버지보다도 아내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 듯했다.
어느덧 고요해진 연회장에는 살아남은 이들의 거친 숨소리와 꺼져 가는 신음만 이따금 들려올 뿐이었다. 바깥에서 이는 소란은 여기 있는 어느 누구의 귀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시즈가 돌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적막을 깨는 웃음소리에 모건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하하! 이건 제법 충격인데. 우리 황태자비 전하께서 남편을 손수 불구로 만들 줄이야!”
눈물까지 흘리며 웃던 그가 큭큭거리더니 피에스타가 건넨 손수건으로 눈꼬리를 닦았다.
겨우 진정하고 숨을 돌린 후엔 처음 보는 낯선 표정이었다. 오물이라도 튄 것 같은 얼굴로 시즈가 갑자기 알 수 없는 소릴 지껄여 댔다.
“그런데 어쩌지. 나는 훨씬 더 이전부터 아이를 만들 수 없는 몸이었거든.”
“……뭐?”
후우. 긴 한숨을 돌린 시즈가 이번엔 짜증스럽게 옷깃을 탁탁 털었다.
“모건 뤼시크. 그 영민한 머리로 생각을 좀 해 봐. 내 아내가 몇 명이며, 또 내가 난잡하게 놀아난 여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이때까지 내 아이를 낳았다거나 가졌다는 여자를 본 적이나 있어?”
손수건을 돌려받은 피에스타가 설핏 쓴웃음을 삼켰다.
“황비 내전 때 우리 어머니가 독살을 당한 건 유명한 일화고. 사실 그때 나도 죽을 뻔했거든.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는데 의사 말로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올 거라더군? 처음에는 안 믿었는데…….”
그는 연회장 곳곳에 서 있는 자신의 아내들이자 충직한 살수들을 둘러보고는 어깨를 추켜세웠다.
“젊고 건강한 부인들에게서 후사가 없으니 그게 사실이었다는 걸 깨달았지. 더불어 미각도 잃었고 말이야.”
모건의 파리한 얼굴 위로 사내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워졌다.
“우울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그렇다면…… 그 배 속에 든 건 누구의 자식일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 없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황망한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몇 번인가 금발의 광대들과 은밀히 어울린 적은 있었으나 그들은 모두 아버지가 보내 준 여흥 거리였다. 분명 안심해도 좋다고 말한 것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떨리는 눈동자가 향한 곳에는 매정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는 뤼시크 공작이 있었다. 자신을 외면하는 공작을 보며 모건은 뒤늦게 진실을 알아챘다.
‘아버지는 형제가 모두 불임이라는 걸 알고 계셨던 거야…….’
파르르 경련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던 그녀는 곧이어 들리는 체이스의 억눌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성기사 두 명이 그의 양쪽에 서서 사지를 붙잡고 다른 한 명이 그악스레 머리와 턱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 곁에 피에스타가 다가와 품에서 작은 꾸러미를 펼쳐 들었다. 안에 든 하얀색 가루를 본 체이스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발버둥 치던 몸부림은 기사들에 의해 간단히 저지되고, 강제로 벌어진 입으로 내용물이 속절없이 쏟아져 내렸다. 억지로 뱉으려던 황태자의 코에 피에스타가 훅 숨을 불어넣자 목구멍이 크게 들썩거렸다.
“쿨럭! 컥! 크억!”
바닥을 짚은 체이스가 벌게진 눈으로 악에 뻗친 소리를 질러 댔다.
“시즈! 시즈 오베… 컥! 너 나한테 뭘 먹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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