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29화 (129/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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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라는 딱지는 영 껄끄러워서요. 아무리 그래도 민심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시즈가 테이블에서 몸을 물리더니 천천히 걸어왔다.

“술과 약에 취한 황태자가 광증이 도져서 하나뿐인 아버지를 살해했다…. 그 과정에서 말리던 2황자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소문을 흘리기엔 그게 적당하지 않겠어요?”

말을 마친 그의 눈짓에 숙련된 기사 하나가 걸어 나왔다. 눈빛을 주고받은 뒤 기사가 시즈의 왼쪽 하복부에 푹! 가차 없이 단검을 찔러 넣었다.

“윽……. 생각보다… 너무 아픈데.”

제복을 비집고 나오는 뜨거운 열기에 비틀거리던 그를 피에스타가 서둘러 부축했다.

“말씀하지 마십시오. 회복마법은 며칠 후에나 받으실 수 있으니까요.”

“…새 원로들에게 실컷 보여 주고 난 다음에 말이지.”

증인이 되어 줄 뤼시크의 반대파 세력들이 헐레벌떡 치료사들을 데리고 입궁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보수적이고 꽉 막힌 뒷방 늙은이들이긴 하지만 누구보다 충직하고 애국심이 넘치는 지방의 제후들. 앞으로는 그들이 시즈의 손과 발이 되어 국정을 이끌어 나갈 제국의 중심세력이 될 것이다.

창백한 몰골의 시즈가 한탄 섞인 웃음을 머금었다.

‘이제는 밤놀이도 마음대로 못 하겠군.’

벌써부터 황제의 몸가짐을 단속하는 꼬장꼬장한 노인들의 잔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 광경을 보던 칼 뤼시크가 돌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사람 보는 눈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는데, 내가 이런 실수를 할 줄이야. 눈먼 자들은 2황자의 쾌유를 바라며 기꺼이 자넬 차기 황제로 추대하겠군. 하하하!”

“대사원의 축복 아래 말이죠.”

주교는 영광스러운 장면을 목격이라도 한 것처럼 시즈를 향해 성호를 긋더니 깍듯이 허리를 굽혔다.

공작이 아직 소란스러운 바깥을 의식한 듯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혔다.

“궁에 깔린 내 병사들이 제법 수가 될 텐데, 이젠 어쩔 셈인가. 성기사들로는 전부 감당하지 못할 텐데.”

웃음을 뚝 멈추고 던진 질문에 시즈가 가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닫혀 있던 연회장의 문이 덜컹 열렸다. 덩달아 뤼시크 공작의 말문 역시 막혀 버렸다.

칼 뤼시크의 사병은 전멸했다. 구태여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건재한 성기사들 사이로 황동색 갑옷을 두른 군인들이 남아 있는 목격자들을 베는 장면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 금빛 호버크를 두른 기사가 당당히 위용을 드러냈다. 투구에 선명하게 새겨진 태양 문장이 불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벌써 다 끝난 거야? 재미없게.”

바스타드 소드를 옆구리에 끼고 머리를 감싸고 있던 그레이트 헬름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이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웬만한 기사들과도 어깨를 견줄 만한 장신이었다. 칠흑과도 같은 새까만 머리칼과 눈동자, 자국의 특징과도 같은 구릿빛 피부를 본 칼 뤼시크의 얼굴이 곧바로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아이노스를 잊고 있었군.”

“오랜만입니다. 뤼시크 공.”

브리아나 황비가 산뜻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실내를 둘러보더니 쇠 신발에 걸리는 것들을 거리낌 없는 발길질로 밀어내고 넘어서면서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내가 말했잖니, 시즈. 저 노회한 여우를 상대하기엔 팔라딘만으로는 부족할 거라고.”

“하하……. 여전하시네요. 둘째어머니는.”

극렬한 통증에 입술을 깨물면서도 시즈는 반가운 기색으로 2황비를 맞이했다.

“칭찬으로 들으마.”

황비는 처참하게 널브러진 사람들을 지나쳐 반쯤 정신을 놓아 버린 체이스를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쯧쯧,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동공이 풀린 채 침 흘리고 있는 황태자를 뒤로하고, 이번엔 눈도 못 감고 숨을 거둔 황제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증오와 연민이 동시에 까만 눈동자 위로 짙게 번졌다.

“내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결말은 맞이하지 않았을 텐데. 이 불쌍하고 무능한 남자 같으니라고.”

그녀는 아이노스 말로 나직이 중얼거리며 남편의 얼굴에 흰 천을 덮었다.

짧은 애도 끝에 몸을 일으킨 브리아나 황비가 뒤를 따라 들어온 자신의 참모를 향해 단호한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

“태양의 기사단은 이대로 제국군을 따라 북부로 이동한다. 데려온 종자들은 여기 남아 궁을 정리하고 의복을 갈아입혀. 황궁이 그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될 것이다.”

“이자는 어찌할까요?”

칼 뤼시크를 가리키며 묻는 장교에게 그녀는 싱긋 웃으며 즉답했다.

“공작과 그의 여식은 아주 정중히, 예의를 갖추어 수감하도록.”

마지막 말은 보란 듯이 제국어였다. 그녀는 들것에 누운 시즈에게도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회군 명령은 내리고 기절하려무나.”

“……명심하죠.”

“내용은 내가 조금 바꾸어도 상관없겠지?”

도무지 당해 낼 수가 없는 여인이었다. 시즈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고갤 끄덕이자 황비가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 그럼 이제 우리 아들의 새 신부를 만나러 가 볼까.”

* * *

황제가 서거했다. 그것도 황태자의 손에!

충격적인 소식은 들불처럼 빠르게, 황소 떼처럼 저돌적으로 제국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황태자는 유약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라, 호기심에 손을 댄 약을 끊지 못하고 결국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연회장에서 공개적으로 호통을 치는 황제에게 순간적으로 반발심이 들었다고 했던가, 당장 제위를 내놓으라며 목을 졸랐다고 했던가.

종내에는 입에 담지도 못할 정도로 과장된 괴소문이 나돌아다녔다. 수도의 귀족들은 어쩐지 그의 애환을 알 것도 같았다.

황제뿐만이 아니라, 연회에 참석한 고위 대신들 일가가 전부 참변을 당했다.

황제가 살해당한 것을 보고 평소에 앙심을 품었던 가문끼리 서로 모함하다가 칼부림이 일었다고 하는데, 그들의 소식은 그다지 화제가 되진 못했다. 뤼시크 공작이 연줄을 핑계로 귀찮게 굴 방계가 없는 귀족들로 제 편을 꾸려 황실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를 살인자로 만든 금단의 약은 뤼시크 상단에서 불법으로 취급하던 것이라는 오명까지 덧붙여졌다. 근거로 뤼시크 공작과 황태자비가 돌연 자취를 감추었다는 뒷소문도 함께였다.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아이노스에 있던 황비가 돌아오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던 이든 황자의 모친까지 두 팔 벗고 나서서 내정을 관리하겠다는 황실의 발표는 제국민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거기다 권력에 밀려 잠시 물러났던 불세출의 정치인들이 2황자의 부름을 받고 대거로 복귀했다.

대사원 역시 애도를 표하며 새 정권을 지지하겠다는 공표를 내렸다. 냉전의 종막에 사람들은 연일 환호했다.

상황은 급물살을 타고 빠르게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

불안하게 우르릉거리는 하늘을 보던 이한율이 고개를 내리고 후드를 젖혔다. 머지않아 한바탕 쏟아질 기세에 검은 발톱 용병단 역시 어두침침한 하늘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산의 초입인데, 더 들어가면 완전히 깜깜하겠는데요?”

“황실 마법사가 몇 명인데, 알아서 밝혀 주겠지.”

용병대의 대장과 부대장의 대화를 들은 그가 협곡 아래로 길게 이어진 군인들을 보며 초조하게 입술을 물었다.

기껏해야 2만이 될까 말까 한 애매한 병력. 게다가 대부분은 전투 경험이 없는 어린 병사들이다.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정예기사들과 젖비린내나는 소년병들로 과연 요새를 함락할 수 있을까.

이는 토벌 자체에 회의적이던 황제가 소극적인 반항을 한 결과였다. 그나마 칼 뤼시크가 동원한 노련한 용병들이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자잘하게 입술을 깨물던 그가 말을 몰아 황실 장교에게 가까이 몸을 붙였다.

“취발론에서 발목을 잡히면 더 불리해집니다. 3황자의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해야 승산이 있어요. 장애물들은 모두 무력으로 돌파해야 합니다.”

“안전하게 넘어가려면 정해진 경로로 이동해야 한다. 소중한 병력을 잃을 수는 없는 일.”

이한율을 한번 힐끗 보더니 가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젓는 지휘관이었다.

야닉 리버스가 가만히 앉아 손님을 기다리게 둘 수는 없었다. 눈에 보이는 전서구들은 모두 마법으로 죽여서 떨어뜨렸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아크만으로 날아갔을 수도 있다.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이한율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매를 비틀었다.

“……경로야 새로 개척하면 그만이죠.”

말을 마치자마자 멋대로 튀어 나간 그가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운디네의 눈물 결정이 박힌 지팡이 끝에서 마력이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부관들이 달려와 말릴 틈도 없이 이한율은 산을 향해 화염을 쏟아부었다. 새빨간 불꽃이 고목과 가시덩굴을 덮치자 축축했던 가지 위로도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신성한 산에 이게 무슨 짓이야!”

선두에서 소란이 일었다. 뒤따르던 도열이 흐트러질 만큼 하늘 높이 불길이 솟아오르고 난무하는 고성과 놀란 말의 울음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이를 깡그리 무시하며 이한율이 목에 핏대를 바짝 세웠다.

“마법사 부대는 앞으로 나와서 숲을 태우고 이대로 전진한다! 방해하는 자는 즉결 심판하겠다!”

“이봐! 미쳤나? 이곳의 사령관은 나야! 아무리 현자라고 해도….”

장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목에 검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운 물줄기가 스치자 갑주로 중무장한 머리가 속절없이 땅으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져 버렸다.

충격에 휩싸인 모든 이가 동작을 멈추더니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상관이었던 자의 신체를 내려다보았다.

“지금부터 부대는 내가 지휘하겠습니다. 이자와 같은 꼴이 되고 싶은 분이 계시면 얼마든지 나오세요.”

공손한 말투와는 반대로 살의가 가득 담긴 으름장에 부관들은 즉각 입을 다문 채로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개중엔 대주교인 갈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합류한 용병단 중에 현자가 끼어 있던 걸 발견했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불렀던 그가 어버버, 입만 벙긋거렸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희멀건 낯으로 소환진 위에 서 있던 순진한 이방인이, 지금 이 악마 같은 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이방인을 따라가는 것이 맞는 건가,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던 갈록에게 이한율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쪽이 염 부장님이랑 비슷한 마력을 가졌다고 했죠. 이쪽으로 나와서 산에 불을 놓으세요. 뒤는 내가 알아서 끌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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