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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도 보도 못한 마법을 써 가며 눈 하나 깜짝 않고 지휘관을 죽인 그를 함부로 거역할 수 있는 노릇도 아니었다.
갈록은 식은땀을 흘리며 말에서 내려 맨 앞으로 걸었다. 기병들은 눈치를 보다가 엉거주춤 내려와 말에게 덮개를 씌우고 새로운 지휘관의 명령을 기다렸다.
이한율을 데려왔던 검은 발톱 용병단이 의기양양하게 부관들을 제치고 나오는 사이, 전방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열기가 제국군을 덮쳤다.
2만여 명의 눈동자 속에 수천 년간 신성시해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광경이 똑같이 비쳤다.
구불구불하게 정상을 향해 이어지는 취발론의 산길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법사들이 숲을 태우고 이한율이 물을 뿌리며 지나간 자리는 온통 새까만 진창이었다.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그들의 좌우로 이한율이 처리하지 않은 불길이 끊임없이 번져 나갔다.
땅이 흔들리고 불붙은 나뭇가지와 수풀들이 몸부림치듯이 마구 뒤흔들렸다.
먼 곳에서,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도 이명 같은 정령들의 비명이 군대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산이 울부짖고 있었다.
“노, 노움의 분노를 사게 될 거야! 우리는 전부 죽은 목숨이라고!”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던 일부 용병들이 결국 진영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으악!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병사들이 다급하게 검을 빼 들었다. 여기저기서 나무줄기가 튀어나와 병사들의 발목과 허리를 휘감고 짙은 어둠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곧이어 이한율의 앞에도 덩굴이 튀어나와 뱀처럼 위협적으로 줄기를 세우며 앞을 막아섰다. 그는 이를 짓씹고 진로를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태우고 갈랐다.
「그만둬!」
「너희는 우리 모두의 저주를 받게 될 거야!」
-산을 해치는 자들은 땅속에서도 영원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분노에 찬 요정과 정령의 목소리는 군대를 압도하기 충분했다. 그 우레같은 경고에 겁에 질려 왔던 길을 되돌아 달음질치던 병사들의 머리 위로 비수 같은 물줄기가 날아다녔다.
“이 자리에서 죽기 싫으면 당장 전진하란 말이야!”
광기에 사로잡힌 이한율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산을 울렸다.
* * *
제인은 프러포즈를 받고 난 후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본성 침실에 새로 생긴 커다란 테라스만큼이나 빠르고, 또 놀라운 속도였다.
동료들이 전부 돌아갔다는 여운에 잠길 틈도 없이 진행된 결혼식.
하루아침에 본성을 통째로 예식장으로 바꾸어 버린 야닉의 추진력은, 급하게 일을 처리하는 데 익숙했던 자신조차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프러포즈를 받았을 때 손가락에 끼워졌던 반지보다 곱절은 더 화려한 결혼반지가 식장에 등장했다. 이것도 그나마 고집을 부려 가장 무난한 것으로 고르고 고른 것이었다.
금빛 링 전체를 에두르는 진주와 청금석이 쉴 새 없이 반짝거렸다. 큼지막한 보석이 달리지 않은 것으로 택한 것인데, 대신에 손가락 한 마디를 꽉 채울 만큼 넓은 크기를 자랑했다.
주례를 섰던 알리온이 엄숙하게 성혼선언문을 낭독한 다음엔 예쁘게 차려입은 미엘라와 하녀들이 작약 꽃잎을 허공에 흩뿌렸다.
제인이 부케를 던지자 야닉이 기다렸다는 듯 낚아채는 장면에서는 남은 이방인들이 배를 잡고 웃어 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일반 하객들은 이방인들의 풍습이겠거니 그저 열렬한 박수만 보낼 뿐이었다.
3황자와 이방인의 혼례를 기념하는 성대한 연회는 일주일 가까이 이어졌다.
첫 사흘간은 로엘의 축하사절단과 북부지역의 크고 작은 영지에서 방문한 귀족들로 인사를 나누는 데 정신이 없었고, 그 뒤로 평민들에게 특별히 개방된 연회장에는 영지민과 용병들이 몰려들어 연일 북새통을 이루었다.
매일같이 묵직한 드레스를 입고 축하주를 마시며 성심성의껏 손님들을 응대하던 제인은 밤마다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러면 어느샌가 야닉이 다가와 그녀의 다리를 주무르고 굳은 어깨를 매만져 주었다.
본인도 못지않게 피곤할 텐데, 마사지를 하다가도 은근슬쩍 야릇해지는 손길에 제인은 나중에는 저항하는 것마저 포기해 버렸다.
시끌벅적한 연회가 끝난 뒤엔 한차례 소동도 일었다.
델피온에서 사미 크랩턴의 시신을 인도할 가족이 요새를 찾아왔는데, 그는 자신을 사미 크랩턴의 동생인 지미 크랩턴이라고 밝혔다.
하나뿐인 혈육의 처참한 모습에도 그는 놀라는 기색 하나 없었다. 그저 막연히 언젠가는 이렇게 되리라 예상했다며 씁쓸하게 웃을 뿐.
[크랩턴 가의 후계자를 데려가겠습니다.]
형의 죽음에도 담담했던 그가 율리안을 본 후 내뱉은 첫마디는 모두를 경악게 했다.
따로 진위를 가릴 필요도 없었다. 율리안과 꼭 닮은 흑발의 사내를 보자마자 세레나가 경기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당장 저놈을 잡아들여! 저자는 예전에 날 농락했던 범죄자라고!]
[연인이었죠.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왕녀님. 5년 전에 내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았더라면 당신을 납치해서라도 결혼을 막았을 겁니다. 저와 함께 델피온으로 돌아가요. 가난한 남작 부인이 될 테지만…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레비탄 사람이야. 제국의 황자비란 말이야!]
윔플이 벗겨지고 드러난 붉은 머리만큼 핏발이 선 눈동자로 세레나는 극렬하게 저항했다.
마지막까지 발악하는 그녀에게 동정은커녕, 손가락질하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세레나를 보던 제인이 문득 두 눈을 꽉 감았다. 이유도 모른 채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던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율리안은 죄가 없어. 단지 부모를 잘못 만난 것뿐이잖아.]
로엘에서 아크만으로, 본성에서 다시 사원으로, 또다시 델피온으로 떠나기에 앞서 다섯 살의 율리안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겨우 새 잠자리에 익숙해진 아이가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시간. 두렵고 낯설 친부에게 정을 붙일 시간.
따뜻한 곳에서 배부르게 먹고 잠들 수 있는 시간을 조금만 더.
그녀는 한 가닥 남은 인정을 세레나가 아닌 율리안을 위해 베풀기로 마음먹었다.
세레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 식구를 델피온으로 보내려던 야닉에게 제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이에게 시간을 좀 주자고.
야닉은 그런 제인을 잔뜩 침잠한 눈으로 보다가 마지못해 승낙했다.
[불편하면 언제라도 이야기해야 해. 잘 알겠지만 난 내 여자가 무언갈 숨기는 걸 좋아하지 않아.]
언제부턴지 ‘사람’에서 ‘여자’로 바뀐 대사에 멀지 않은 옛 기억이 떠올라 제인은 조금 웃었다.
야닉은 그렇게 말하고는 지미 크랩턴에게 잠시 여기에 머물면서 세레나를 잘 설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미 크랩턴은 머리를 조아리며 그대로 짐을 풀었다.
그래. 이거면 된 거야.
제인은 테라스를 나와 허리춤에 벨트를 착용하고 롱소드를 단단히 고정했다.
화살집을 등에 메고 다위가 만들어 준 활을 어깨에 두른 후 신발 끈을 꽉 조였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반드시 제 손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저기에 이한율도 있을까.’
회색 방벽 너머 저 멀리,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산등성이를 보며 그녀는 빠듯하게 활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잠시간 침실을 둘러본 후 밖으로 나갔다. 미엘라를 포함한 민간인들은 대피를 마친 상태였다.
자신을 데리러 온 기사들을 따라 걸으며 사용인들 대신 성안에 자리한 무장 병사들을 둘러보는 제인의 가슴이 긴장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용병대 관사에 도착한 그녀는 이미 채비를 마친 로하겔 경과 스캄을 복도에서 마주쳤다. 로하겔 경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만발의 준비를 마친 제인을 보고 깍듯하게 고갤 숙였다.
“오셨습니까. 공주님.”
“아니지, 이 양반아! 이 자리에는 공주가 아니라 어엿한 군인으로 오신 거라고. 안 그렇습니까?”
개방형 투구 아래로 목까지 쇠사슬에 둘러싸인 배서닛을 착용한 스캄이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제인은 조금 웃으며 도리질을 했다.
“예전처럼 편하게 말씀하세요. 부대장님.”
“…그럴까? 에이, 됐수다. 대장이 알면 날 산 채로 화형에 처할걸.”
심각한 상황에서도 태연히 농담을 던진 스캄이 손수 집무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제인은 짧게 호흡을 가다듬고 발을 내디뎠다.
* * *
깨금발을 세우고 위로 뻗은 자그마한 손이 기도실의 문을 열었다.
“테오!”
안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남자를 보더니 율리안이 활짝 웃으며 달려들었다.
남자는 등에 매달리는 아이가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앞으로 고쳐 안고는 금방 눈살을 찌푸렸다.
“또 멋대로 혼자 나왔구나.”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옷이나 주워 입고 나온 아이에게 그가 제 로브를 벗어 둘러 주며 핀잔을 주었다. 율리안이 입을 삐죽 내밀면서 남자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치만 어머니는 나를 꼴도 보기 싫다고 하고, 이상한 아저씨가 자꾸 귀찮게 굴잖아.”
“그럼 못쓰지. 아버지라며.”
율리안의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이 더없이 따뜻했다. 다정한 손길이 좋아서 아이는 더욱 남자에게 매달렸다.
“필요 없어. 그딴 거. 나는 왜 이렇게 아버지가 많아? 정말 피곤해 죽겠어.”
“…….”
[피곤해 죽겠다.]
[골이 울리니 조용히 좀 해.]
[기회가 있을 때 실컷 먹어 놔야지.]
전부 다 지난 한 달간 봐 온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자신에게, 하녀에게, 그리고 혼잣말처럼.
아이는 주위에 있는 어른들의 언어습관을 그대로 배우는 경향이 있다. 기가 차는 말 몇 마디로 그는 율리안이 그간 어떤 환경에 놓여 있었는지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로기아 후작은 어금니를 깨물며 율리안을 힘주어 안았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줄 알았던 심장이 다시금 아프게 요동치고 있었다.
살을 녹이고 가슴에 스며든 뜨거운 눈물이 강파른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테오? 우는 거야?”
“…….”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끌어안은 채 로기아 후작은 괴롭게 흐느꼈다. 율리안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 큰 어른이 울면 어떡해. 뚝 해야지…….”
“미안해……. 내가 미안하다. 아가….”
덩달아 그렁그렁해진 율리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퐁퐁 샘솟은 굵직한 눈물을 떨어뜨리더니 이윽고 으앙, 울음이 터졌다.
작은 아이의 품에서 무너져 울던 로기아 후작이 그제야 놀란 얼굴을 떼어 냈다.
그는 제 눈물도 갈무리하지 못하고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율리안의 얼굴을 거칠거칠한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율리안. 이제 그만 울자꾸나.”
“흐어엉.”
“아저씨도 이제 안 울게. 그러니 제발 그치렴…….”
잔뜩 잠긴 목소리로 연신 괜찮다고 말하며 등을 토닥였다.
“내가 지켜 주었어야 했는데, 미안해. 정말, 정말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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