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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 안은 조그만 온기가 깊은 우물 속까지 흘러 들어온다. 그를 둘러싼 오래된 돌벽이 부서지고 비로소 햇살이 드리워졌다.
사방이 안개로 둘러싸인 길을 헤매던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빛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주저앉아 있던 몸을 세우고, 율리안도 일으킨 그가 걸음을 옮겨 단상 위에 곱게 접힌 푸른색 천을 집어 들었다.
“율리안 님! 얼마나 찾았다고요. 빨리 지하동으로 대피를…!”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시에나가 문득 넋을 잃어버렸다. 딸의 머리끈을 손목에 감고 입을 맞추는 루기아 후작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여, 영주님……?”
유령이라도 본 얼굴을 하는 시에나에게 그가 율리안을 데려가더니 손을 넘겨주었다. 시에나가 파르르 떨리는 제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세실은 이 머리끈만큼이나 아크만을 사랑했지. 딸아이가 아끼는 곳에, 내 목숨과도 같은 땅에 무의미한 죽음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
경악에 차 있던 하녀장이 황급하게 몸을 수그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의 얼굴에 당혹감과 감격스러움이 차례로 지나갔다.
“가서 로하겔 기사단장을 불러와. 내 갑옷이 아직 녹슬지 않았으면 좋겠군.”
“!”
“……그전에 오랜 친우이자, 하나뿐인 주군에게 용서를 먼저 빌어야겠다.”
* * *
관사 사령관의 집무실엔 한동안 정적이 일었다. 시큰거리는 코를 훌쩍이던 로하겔 경이 모셔 온 아크만의 진짜 주인 때문이었다.
제인은 일순간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에 의식적으로 호흡에 집중하며 아성의 유령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사내는 더 이상 유령 따위가 아니었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던 은발은 짧아지고, 머리 색과 대조되어 더더욱 새까맣게 보이는 철갑옷을 두른 로기아 후작이 책상 앞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고 있었다.
철컹거리는 무릎 보호대가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묵직한 소리를 내며 적막을 깨뜨렸다.
“아크만의 영주, 테오도르 로기아가 제국의 3황자 야닉 리버스 님께 인사 올립니다.”
“……후작.”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야닉은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히 그에게 다가갔다.
무려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주를 대신해 아크만을 지켜 내고 돌본 야닉이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영토의 수호자로서 책임과 의무를 저버렸던 로기아 후작을 이 자리에서 단죄한다 해도 누구도 반대하거나 비난할 순 없을 터.
그녀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집무실에 모인 모든 이의 얼굴에도 동일한 긴장감이 역력히 떠올랐다.
“황명을 받았음에도 변경백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점.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제국군이 물러나고 아크만이 안전해지는 순간이 왔을 때 저를 벌해 주십시오. 마땅히 죽음으로써 죄를 갚겠습니다.”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로기아 후작은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 같기도 한 단단한 음성이었다.
“죄를 갚겠다…….”
야닉이 그의 말을 되풀이하듯 잔잔히 읊조렸다.
“그전에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후작의 옆에 가까이 선 그가 문득 떠오른 듯이 물었다.
“구병호가 말했던 1,977일간의 기도는 다 채웠나?”
‘전부 다 알고 계셨구나…….’
로기아 후작이 아프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며칠 남았습니다.”
“며칠?”
“이틀이 남아 있습니다.”
이틀. 이틀이라. 그렇게 말하고 몸을 세운 야닉은 미간에 빗금이 그어질 만큼 눈을 세게 감았다.
고작 이틀을 남기고 입을 열었다는 말이지.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
서서히 드러나는 호박색 눈동자가 사내를 훑어 내렸다.
“……지났으면 섭섭할 뻔했는데, 어쩔 수가 없네. 그만 일어서게.”
후작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린 그가 허무하게 웃어 버렸다.
턱 근육이 바짝 조여질 정도로 이를 물고 있던 후작이 명을 받들어 몸을 일으켰다. 꼿꼿하게 선 신체와는 반대로 그의 회안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몸을 돌려 팔짱을 끼고 있던 스캄에게 다가갔다.
“로하겔 경과 더불어 자네가 고생이 많았네.”
“나야 뭐…. 심심하진 않았수다.”
쩝, 이런 상황이 낯간지러운 듯 스캄이 괜히 눈알을 굴렸다.
“다위 님.”
이번에는 다른 이들처럼 철갑옷으로 온몸을 꽁꽁 무장한 다위에게 다가갔다. 다위는 여전히 마뜩잖은 얼굴이었다.
“한심한 녀석. 감히 내 작품을 5년씩이나 처박아 둬?”
그가 후작의 허리춤에 있는 장검을 힐끗 보며 혀를 차자 후작이 설핏 웃음을 머금었다.
“어디 한 군데 녹슨 곳 없이 처음 받았던 때처럼 새것 같더군요. 감사합니다.”
“당연하지! 내 실력을 뭘로 보는 거야.”
꿍얼거리는 다위의 옆으로 알리온이 웃으며 다가왔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이제 사원은 당분간 출입 금지입니다?”
눈썹을 치켜세우며 농담처럼 던진 말에 후작이 깊게 고갤 숙였다.
“예. 주교님. 명심하지요.”
그는 자신을 향해 머리를 숙이는 브레고와 포라킨에게 고마움을 담은 눈짓으로 인사하고는 마지막으로 제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는 눈앞에 선 아크만의 영주를 올려다보았다.
긴 은빛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유령처럼 사원을 거닐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강인한 기백을 내뿜는 무신이 제 앞에 서 있었다.
희로애락을 잊은 듯한 창백했던 얼굴엔 이제는 거대한 위압감이 대신 자리 잡고 있었다. 왜 이 사람이 온통 하얗다고 생각했을까.
야닉이 작렬하는 태양처럼 눈 부신 색이라면, 로기아 후작은 폭풍 속 거센 파도와 같은 검푸른 색일 거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 모습이 감동적이면서도 어딘가 낯설어 제인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안녕하세요.”
“신의 산에서 귀환석을 찾아낸 용감한 여인께 경의를 표합니다.”
야닉에게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무릎을 꿇는 그를 보고 제인이 허겁지겁 따라 앉았다.
“이, 일어나세요. 영주님.”
“황자비 저하께 인사 올립니다. 제국의 비천한 종, 테오도르 로기아입니다.”
만류에도 꿋꿋하게 예를 표하는 후작을 야닉이 자랑스럽게 지켜보았다. 다른 이들도 모두 흡족하게 보는 가운데, 오로지 제인만이 당황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목소리가 많이 낮으시네요…. 하하…….”
“한동안 아침 운동을 안 나오시길래 걱정했습니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아…….”
그녀는 민망함에 적당한 대꾸를 찾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결혼 후에도 도통 놔주질 않던 그 덕에 아침에는 기진맥진해서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다.
제인이 새초롬하게 야닉을 흘겨보았다. 자신의 남편은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세울 뿐이었다.
운동은 오후에 연무장에서 활과 검 연습을 하는 게 전부였으니 두 사람은 무척 오랜만에 서로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뜨거워지는 안면을 무시하고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후작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세실도 이걸 더 바랐을 겁니다. 한심한 아버지로 남을 순 없는 일이니까요. 공주님께서 맨 처음 제게 겉옷을 벗어 주셨을 때, 부끄럽지만 그때부터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먹먹해진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한번 각오를 굳게 다졌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다시 일어서야겠다고 말입니다.”
“옷을 벗어 줬다고? 이건 대장이 그냥 넘어갈 수 없겠는데!”
난데없이 엉뚱한 곳에 포커스를 맞춘 스캄에게 맞장구치듯 야닉이 느른하게 고갤 끄덕였다.
“사형.”
왜들 저래, 진짜. 제인이 딱 그런 얼굴로 스캄과 야닉을 번갈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정작 로기아 후작은 이들의 농담이 그리웠다는 듯이 기쁜 얼굴로 웃고 있었다.
* * *
연무장에 집결한 아크만 기사단과 트라야누스 단원들 사이로 비장함이 맴돌았다.
기사들은 면갑을 쓰고 그 위에 그레이트 헬름을 착용한 채 심지 굳은 얼굴로 단상을 향해 서 있었다. 새까만 갑옷 위에 입은 푸른색 서코트가 칼같이 늘어서 있는 광경이란 가히 위압적이었다.
평소에는 그들과 시시콜콜한 잡담이나 주고받던 용병들도 전부 호버크나 가벼운 흉갑을 착용한 채 각자의 무기를 들고 호기롭게 늘어섰다. 일반 용병들 사이로 거인족과 자유 기사, 수인족들이 눈에 띄었다.
대장간을 지키고 있던 움리족들 역시 오늘만큼은 울퉁불퉁한 팔근육을 꿈틀대며 두 손에 쇠망치와 원형 방패를 단단히 쥐었다.
후방 지원 부대로 동원된 사제들과 이방인들은 종자들과 함께 보급 막사 안에서 대기했는데, 그중엔 의외로 염 부장의 모습도 보였다.
제인은 우중충한 하늘 아래 눅눅한 공기를 가로지르면서 이들의 모습을 한가득 눈에 담았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집무실을 나온 요새의 수뇌부가 마침내 차례로 줄지어 단상 위로 올랐다. 굳게 마음을 먹고 계단을 오르는 그녀에게 뒤따르던 야닉이 불쑥 말을 건넸다.
“임 사장과 루는 지하로 보냈어. 거기에도 수비군은 필요하니까.”
“응.”
어떤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기에 제인은 일부러 짧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절대로 야닉과 떨어질 수 없었다.
“그대도 그리로 가 있으면 좋겠는데.”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결국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우뚝 걸음을 멈춘 제인이 차분하게 뒤를 돌았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한 건 너야. 그러니까 억지로 보낼 생각 하지 마.”
생각보다 단호한 음성에 야닉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반드시 도움이 될게. 그 말을 덧붙이며 제인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마저 올랐다. 캄캄한 궤짝에 갇혀 무기력하게 끌려갔던 기억이 다시금 그녀를 괴롭혔다.
‘괜찮아. 다 지난 일이야.’
고개를 흔들어 악몽 같은 기억을 떨친 제인은 어느새 연단 위에 올라선 야닉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포라킨에게 눈짓을 하자 그녀가 지팡이를 들어 바람 마법을 가동했다.
한바탕 쏟아질 듯이 우르릉거리기 시작하는 잿빛 하늘 아래 설원 늑대의 수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산한 바람만 나부끼는 고요함 속에서 아크만과 트라야누스의 깃발만이 세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목에 검은 갈기가 달린 흑색 망토를 두른 야닉이 도열한 병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크만의 영주, 테오도르 로기아 후작이 복귀했다. 그러니 오늘 이 자리를 마지막으로 내가 연설을 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제야 후작을 발견한 이들이 일제히 술렁거렸다.
인사는 나중에 하고. 그가 소란을 잠재우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런 건 실무진이나 하는 거잖아? 나 정도 되는 위치에서 나설 일은 아니지.”
짐짓 가벼운 농담으로 서두를 열자 곳곳에서 피식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야닉은 이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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