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32화 (13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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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2만 명의 황실군이 아크만을 향해 오고 있다. 이르면 내일 저녁 방벽 앞까지 당도할 테고. 이 자리에 모인 병력은 고작해야 500명. 우리의 몇십 배나 되는 군대를 상대하기엔 어찌 보면 절망적인 숫자겠지.

하지만 성채 아래 영지엔 8천 명의 아크만 시민들이 살고 있고, 그중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매년 우리와 함께 마물에 대항하는 위대한 전사들이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폭풍이 지나고 찾아온 손님들이 괴물이 아닌 사람일 뿐. 따라서 나는 아무런 걱정도, 두려움도 가지지 않는다.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닌 저 황실군이 될 것이며, 패배의 쓴잔 역시 우리가 아닌 그들이 마시게 될 것이다.

저들에게 마법사가 있다면 우리에겐 이방인이 있고, 저들에게 현자가 있다면 너희에겐 내가 있다.

준비되지 않은 자들의 말로는 비참하겠지만, 만반의 태세를 갖춘 우리에게는 기다렸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여전히 겁에 질린 자가 있다면 옆에 있는 동료의 얼굴을 봐라. 그래도 저놈보다는 내가 오래 살지 않을까, 싶을 거야.”

그의 말에 티보와 고르칸이 킬킬거리며 서로 주먹을 맞부딪치고, 블라산코와 미르, 폰이 돌아가면서 눈을 맞춘 채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외면하는 스캄에게 강제로 뜨거운 포옹을 선사한 로하겔 경은 또 한 번 뜨거워진 눈시울을 훔쳤다.

“어떠한 위험이 닥치더라도 너희 곁에는 든든한 전우가 함께할 것이다. 바로 지금 옆에 있는 동료들이 곧 너희의 검과 방패가 될 테니.”

야닉이 고개를 돌려 로기아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 강렬한 눈빛에 충심이 끓어오른 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테오도르 로기아는 비장하게 검을 뽑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곤 자신을 향한 신의에 보답하듯 가슴을 크게 부풀려 우렁차게 외쳤다.

“어떤 화살도 아크만의 성벽을 넘지 못할 것이며, 어떤 창도 드워프의 방패를 뚫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겐 오로지 승리와 영광만이 있을 것이다!”

“와아아아!”

영주의 호령에 화답하는 생생한 함성이 내성을 넘어 성채 아래까지 광활하게 울려 퍼졌다.

노도처럼 밀려드는 그들의 기개에 제인은 전신이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이보다도 훨씬 더 많은 군중 앞에 서 본 적이 있음에도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강렬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이 펴지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솟아오른다.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물고, 주먹을 말아 쥐게 하는 힘. 그게 바로 전의였다.

잘게 떨리는 그녀의 주먹을 어느샌가 다가온 야닉이 커다란 손으로 단단히 감쌌다.

“고집불통 아가씨.”

“여기서 고집불통 아가씨보다 활 잘 쏘는 사람이 있어?”

슬쩍 눈을 흘기자 야닉이 있을 리가, 하더니 보기 좋게 웃는다. 제인 역시 긴장을 풀고 따라 웃고 말았다.

“대장님은 왜 저들이 회군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안 하는 거야?”

슬쩍 다가온 브레고가 귀엣말로 묻는 말에 포라킨이 지팡이를 내렸다.

투지에 찬 군인들에게 자칫 독이 될 수도 있는 말을 그분이 할 리가 있나. 뜨겁게 달궈진 연무장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이 호기로운 빛을 머금었다.

“희망은 때때로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거든. 이 멍청아.”

* * *

「뜨거워…!」

「이방인이 숲을 통째로 태우고 있어!」

“……헉.”

페어리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난 제인이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침대 아래에서 신발을 찾아 신기 시작했다.

마물이 침공했을 때 들은 적 있었던 올리판트 소리가 요새 전체에 공습경보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번개처럼 일어나 테라스로 달려 나간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훅 끼치는 매캐한 냄새에 다급하게 코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내 눈 앞에 펼쳐진 황망한 광경에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안 돼…….”

능선의 굴곡을 따라 번진 불은 기다란 띠 모양으로 새빨갛게 타올라 지옥과도 같은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취발론 산맥 너머에서 피어오르던 연기는 한층 더 무서운 기세로 부피를 피워 밤하늘을 온통 뿌옇게 만들었다. 산에서 솟아오른 회색 연기가 비구름과 뒤섞여 분간이 어려울 정도였다.

온통 붉어진 사위와 먹구름 같은 연기를 등지고 그녀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와 텅 빈 침대를 살폈다.

잠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야닉이 분명 함께 누워 있었는데…….

군대가 취발론을 넘어오려면 아직 시간이 있으니 오늘은 편하게 자라며 등을 토닥여 주던 그가 보이지 않았다.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몸이 떨려왔다. 떨리는 손으로 외투를 집어 드는 순간, 침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야닉이 성큼 들어왔다.

“제인. 서둘러. 군대가 산을 빠져나오기 시작했어.”

그가 다가와 재빨리 옷을 여며 주고는 그녀를 데리고 침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얼떨떨하게 따라 나온 제인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야닉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하루는 더 걸린다고 하지 않았어?”

“산에 불을 질러서 최단 거리로 진입한 모양이야.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지휘를…….”

굳은 얼굴로 중얼거리던 그가 문득 깨달은 듯 뒷말을 흐렸다.

“…이한율이겠군.”

제인은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재차 발을 내딛는 그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빨리했다.

이방인이 숲을 태운다던 페어리의 목소리와 야닉이 방금 한 말로 더욱 확실해졌다.

이한율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아마도 나를 찾아서.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횃불이 줄지어 타오르는 성벽으로 서둘러 올라갔다.

그곳은 벌써 전투 준비가 한창이었다. 무쇠솥에 기름을 가득 담아 나르고 투석기에 돌덩이를 매달고 있는 병사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여기저기서 무언갈 가져오라는 고성이 빗발치는 현장을 뚫고 야닉은 방벽 내부에 있는 위병소 건물로 그녀를 데려갔다.

“젠장! 거사를 연회 날에 맞추는 게 아니었어. 출정이 한참 지난 다음에야 전령이 출발했을 테니 충돌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빨리 와 버리면 이쪽에서도 공격하는 수밖에 없다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들리는 거친 음성에 제인이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스캄이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이를 짓씹고 있었다.

로기아 후작과 로하겔 경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야닉과 제인을 향해 짧게 묵례했다.

“제국군이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습니다. 해자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서 성문을 방어하려던 참입니다.”

후작이 잠깐 사이 회의한 내용을 야닉에게 보고하자 그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곧 비가 올 거야. 불을 지르는 건 큰 도움이 되지 않아.”

제인은 야닉을 따라 빈 의자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이들의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목표는 전령이 올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얌전히 돌려보내는 것이지, 적을 섬멸하려는 게 아니니.”

탁자 위에서 일렁이는 촛불을 보며 무겁게 꺼낸 말에 다위가 곧바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저놈들이 성문을 뚫고 쳐들어오는 걸 손가락이나 빨면서 구경하다가 사이좋게 저세상 가자는 소리냐?”

“요새 주위로 불을 피울 수 없다면 전투는 피할 수 없습니다. 저들은 공성탑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그걸로 방벽을 타고 오르는 순간 살육전이 펼쳐질 겁니다.”

“외부 방벽에 맞먹는 높이로 공성탑을 지을 순 없어. 저놈들은 어떻게 해서든 성문을 열려고 할 거다.”

로하겔 경마저 다위의 편에 서서 거들자 야닉이 더욱 고심에 빠진 눈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후작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불필요한 살생을 꺼리시는 건 이해를 합니다만, 그렇다고 아크만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저희가 소극적으로 방어할수록 적들은 더욱 맹렬하게 달려들겠죠.”

후작은 결연한 눈빛으로 주군을 설득하고 있었다.

“차라리 초반에 한두 차례 기세를 꺾어 놓는 편이 저들의 피해를 줄이는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군의 사기가 가득 차 있을 때 말입니다.”

북부 일대는 평소에도 날씨가 흐린 편에다가 비보다는 눈발이 잦은 지역이었기에 하늘에 낀 구름을 간과한 것이 실책이었다.

이틀은 더 지나서 도착해야 할 제국군이 빠르게 당도한 점, 그리고 그사이에 이한율이 포함된 점, 해자에 불을 놓을 수 없게 된 점들이 상황을 악화시킨 듯 보였다.

“황제가 바뀌었다는 소식을 저들이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 먼저야. 사흘 정도는 전령을 더 기다려 봐야 해.”

다른 영지에 들르지 않고 곧장 산과 광야를 가로질러 온 그들이 제국의 태양이 바뀐 것을 알 리 없었다. 설령 오는 길에 마주친 자들에게 소문을 들었더라도 일단 명령을 받은 이상 함부로 회군할 수도 없는 일.

그렇다면 이쪽에서 말로 설득하여 잠시라도 진군을 멈추게 해야 했다.

“…이한율이 저기 있는 이상 어떻게 해서든 공격하려고 할 거예요.”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던 제인이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모인 이목을 향해 긴장된 숨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산에 불을 지른 것도 이한율의 짓일 거예요. 믿으실진 모르겠지만 페어리들이 제게 말해 줬어요.”

“그건 우리 공주님 말이 맞을 거야. 이 나라에 사는 놈들이 그런 미친 짓을 할 리 없으니까.”

스캄이 적극적으로 두둔하자 제인은 조금 더 용기를 끌어모았다.

“그러니 전령이 도착할 때까지 제가 시간을 끌어 볼게요.”

“제인.”

야닉이 즉각 말을 가로막았다. 그간 봐왔던 모습과는 달리 차가우리만치 매서운 눈빛으로 그가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고 있었다.

제인은 동요하지 않고 더욱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선두에 나서면 이한율은 쉽게 공격하지 못할 거예요. 제가 방패가 돼서 시간을 끄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에요.”

좌중의 침묵이야말로 그녀의 말이 맞을 수밖에 없다는 방증이나 다름없었다.

빈말이라도 만류하는 자가 없다는 건, 자신에게 의지할 만큼 심각한 상황임이 틀림없다고 제인은 확신했다.

자신의 남편이기 전에 그는 제국의 황자였다.

제 손으로 자국의 군인을 친다는 건 분명히 쉽지 않은 결정일 것이다. 그렇기에 적극적으로 반대할 수도 없는 처지라는 걸 그녀는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야닉이 이마를 짚더니 괴롭게 입을 열었다.

“……일단 공격 태세를 갖추고 저들이 병영을 세우면 협상가를 먼저 내보내지. 그대는 협상이 결렬된 이후야.”

끝까지 반대하면 어떡하나 싶었던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위병소는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고마워.’

입 모양으로 작게 건넨 말에 야닉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제인은 손을 뻗어 야닉의 주먹을 찬찬히 쓸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커다란 손이 흠칫 떨려 오는 것이 느껴졌다.

“조심할게.”

그녀는 소리 내어 다짐하듯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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