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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33화 (13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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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이 거덜 나는 한이 있더라도 주임님, 아니 공주님은 제가 확실하게 지켜 드리겠습니다!”

드물게도 포라킨이 벌떡 일어나더니 의욕적으로 목소리를 드높였다. 제인은 그녀의 눈가가 붉어진 것을 보고 덩달아 뭉클해졌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비로소 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자부심이 훨씬 더 컸다.

네가 왜 여기 있느냐는 눈초리는 이제 누구에게서도 비치지 않는다.

당당히 이들 사이에서 의견을 낸 걸로도 모자라, 막중한 임무까지 부여받았다는 생각에 심장이 송두리째 널뛰었다. 야닉의 손등 위에 올렸던 손은 어느새 위치가 뒤바뀌어 그가 제인의 손을 덮고 있었다.

“그나저나 하랑, 그 녀석은 당최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전령이 죽으면 대신 깃발 들고 달려오기로 한 거 아니었나?”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스캄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브레고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면서 끼어들었다.

“설마 무서워서 도망친 건 아니겠죠? 이한율을 보자마자 이건 아니다 싶어서 일찌감치 손을 떼 버렸을 수도…….”

“찬물 좀 끼얹지 마라, 너는!”

몽둥이 같은 스캄의 주먹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브레고가 으으, 신음하며 포라킨을 쳐다봤지만 그녀는 한심한 눈으로 한번 흘길 뿐이었다.

산을 넘어온 제국군은 요새에서 2km쯤 떨어진 드넓은 대지 위에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오는 길에 베어 낸 나무로 목책을 설치하고 흙을 퍼담은 주머니를 쌓아 올려 벽을 만들더니, 장대비 속에서도 막사와 천막들이 빠른 속도로 세워졌다.

수목이 부족해 질이 좋지 않은 나무로 만든 투석기가 몇 대 더 추가된 점 외에는 특별할 것 없는 형태였다. 성벽 위로 넘어와 공격할 수 있도록 높게 지어진 공성탑 역시 주요 재질은 나무였다.

“비만 안 왔어도 활활 잘 탔을 텐데.”

제국군의 임시 병영을 둘러본 야닉의 짧은 평가였다. 심상치 않은 소리를 내던 하늘에선 기어이 굵은 비가 매몰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요새로선 달갑지 않았으나, 끊임없이 타오르던 산에는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제인은 연기마저 전부 사그라든 취발론 산맥을 확인하고는 이번엔 적군의 병영을 살폈다.

“……협상이 잘 될까?”

눈을 한껏 좁히고 그가 보던 것에 초점을 맞추려던 제인이 결국 포기하고 망원경을 내려놓았다.

가시거리가 충분하지 않은 이 시대의 망원경으론 거센 빗줄기와 뿌옇게 뜬 물안개를 뚫고 상대 진영을 속속들이 관찰하긴 어려웠다.

새삼 그가 반신의 후손이라는 걸 깨달은 부러움 섞인 얼굴로 바라보자 야닉이 설핏 웃으며 후드를 올려 주었다.

“실패하더라도 당신이 위험에 처할 일은 없어.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제인은 그의 손을 잡고 망루에서 내려와 성벽 위에 포진해 있는 궁수 부대와 투석병들,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남기로 결정한 이방인들을 둘러보았다.

새까만 로브를 입고 굵은 빗방울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이들이 바로 요새의 최전선에서 칼날을 막아낼 주역들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깍듯하게 예를 갖추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향해 허리를 바로 세우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웃고는 있지만, 이들의 얼굴을 보니 다시 한번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이제 자신은 평범한 이방인이 아닌 제국의 황자비고, 이웃이고 동료였던 사람들은 야닉과 함께 자신이 지켜 내야 할 국민이 되었다. 막중한 의무가 버겁기보다는 사명감이 되어 그녀를 채워 나갔다.

원래 세계에서도 그런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평온하고 순탄한 삶이란 영 인연이 없는 건가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가벼워졌다.

구멍이라도 뚫린 듯 여전히 세찬 폭우가 쏟아지는 하늘에 희미한 빛이 어렸다. 동이 터 오고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나오는 이들은 수도복을 입은 사제들이었다.

다섯 명의 사제들은 전부 백마 위에 올라 결연한 표정으로 질척한 땅 위를 나아갔다. 선두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의 손에는 각각 아크만의 푸른 깃발과 대사원의 하얀 깃발이 기다랗게 들려있었다.

성벽에서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마법사 부대가 앞으로 나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호막의 범위가 닿는 곳까지 최대한 전진한 협상단은 지정된 자리에 우뚝 멈춰서서 제국군의 응답을 기다렸다.

생각보다 멀리 떨어진 그들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던 제인이 확신 없는 음성으로 고갤 돌렸다.

“대화를 아예 안 하려 들지는 않겠지…?”

“보통은 공격하는 쪽에서 먼저 무혈입성을 노리고 전령을 보내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하면서.”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손등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장난치지 말고.”

제인이 콧잔등을 찡그리다가 머리 위에 둘린 장막으로 시선을 올렸다.

야닉이 만든 실드는 둥근 지붕처럼 두 사람을 감싸고 있어서 다리를 제외하고는 상반신 어느 한 군데도 젖지 않은 채였다.

남들은 장대비를 맞으면서 경계를 서는데, 자신만 뽀송뽀송한 것이 못내 신경 쓰여 말을 걸려던 순간.

“헤르미네!”

무언갈 발견한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포라킨을 찾았다. 동시에 포라킨과 이방인들이 지팡이를 들고 사제들 앞에 순식간에 실드를 전개했다.

곧게 떨어지던 빗줄기가 투명한 장막을 타고 둥글게 휘어져 흘러내렸다. 이윽고 반대쪽에서 말 한 마리가 누군가를 태우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사람은 온통 검은 로브와 후드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였다.

사제들이 긴장으로 주시하고 있을 때, 홀연히 다가오던 인영 뒤로 화살 수백 개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그들을 향해 빗발친 화살들은 전부 출렁이는 실드에 부딪혀 바닥에 고꾸라졌다. 사제들은 서둘러 놀란 말들을 진정시키고는 다급하게 고삐를 잡아당겼다.

“협상은 결렬입니다! 어서 돌아가요!”

방향을 돌려 아직 열려 있는 성문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여전히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말을 발견한 사제 한 명이 눈살을 과격하게 구겼다.

말 위에 탄 사람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뻣뻣한 가죽옷과 나무토막을 묶어 상체를 세우고 고정해 놓은 모습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사제는 예리한 무언가에 베인 듯한 시신의 목을 보다가 곧이어 가죽옷 위에 무언가 적혀 있음을 깨달았다.

“이자를 안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가 돌아가던 다른 사제들에게 소리쳤다. 그사이 반대쪽에서 쏘아 올린 화살들이 한 차례 더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이어진 공격 역시 마법사들의 실드에 튕겨 나가 앞서 떨어진 화살 위로 후두둑 쌓였다. 사제들과 마중을 나온 병사들이 황급히 말을 이끌고 성으로 돌아왔다.

“성문을 닫아라!”

쿠웅! 요란한 소리로 굳게 닫힌 문 안쪽에선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시신이 입고 있던 가죽옷을 벗겨 내자 황금 독수리가 새겨진 서코트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황실 기사가 입는 서코트는 붉은색인 데 반해, 고인의 옷은 붉은색과 노란색이 교차하는 줄무늬 형태를 띠고 있었다. 황가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전달하는 이의 전형적인 복장인 것이다.

황제가 보낸 전령을 무참히 살해해 말에 태워 보낸 사람은 그걸로도 모자라, 자신의 메시지까지 가죽옷 위에 써서 보낸 참이었다.

시신을 전시하듯 보낸 저의는 명백했다. 군대는 지금 명령을 거부한 채 단독으로 침공 의사를 밝힌 것과 다름이 없었다.

“……우리는 보고나 하자고.”

주위를 둘러싼 병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얼어붙은 얼굴로 들것에 시신을 실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주검으로 도착한 전령은 그대로 성벽 위로 옮겨져 사령부까지 이송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의사를 밝히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한데요? 안 그래요, 부대장님?”

브레고가 사납게 웃으면서 흰 천으로 머리와 목을 덮은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황제가 바뀌든 말든 일단 치고 보겠다 이거지. 근데 여기엔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시신 위에 올려놓은 가죽옷을 보고 스캄이 묻자, 모든 이의 시선이 제인에게 몰려들었다. 메시지는 단연 한글로 쓰여 있었다.

1. 한 주임을 보낸다.

2. 황자의 목을 보낸다. 택1

가죽 위에 칼로 긁어서 새긴 글씨를 내려다보던 제인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아주 조금, 이한율이 아닐 거라고 기대했던 마음이 산산이 조각나 발끝에서 흩어졌다. 그녀는 절망감을 애써 누르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를 보내 주면 얌전히 물러나겠대요.”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은데.”

야닉이 곧바로 끼어들어 손끝으로 탁탁, 옷을 두드렸다.

“뜻은 몰라도 읽을 순 있어. 생각보다 어렵진 않더라고.”

그는 제인이 부정할 틈도 없이 거칠게 긁힌 옷 위를 손가락으로 쓸어 나갔다.

“물론 숫자도 알아. 두 가지 내용이 적혀 있고…. 위에는 제인. 아래엔 나를 뜻하는 글자가 보이는군.”

“그러니까 뭔데?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 지껄여 봐!”

다위의 역정에 야닉은 자신이 추측한 내용을 술술 읊었다.

“이한율이 요구하는 거야 뻔하지. 제인을 달라거나, 아니면 내 목숨을 바치라거나. 둘 중 선택하라는 거 아닌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죽옷을 뒤집더니 반대편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손끝에서 피어난 열기에 소가죽에서 까만 연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올랐다.

“이한율에게도 선택지를 주어야겠군. 3번. 얌전히, 돌아간다.”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까만 글씨가 새겨지고 있었다.

뜨겁지도 않은지 평온해도 너무 평온한 얼굴에 제인만 사색이 되어 그를 살폈다. 그런데 정작 다른 사람들은 야닉의 손가락보다 그가 적은 내용에 웃음을 참고 있는 듯했다.

“거, 정중하게 말한 거치곤 내용이 너무 상스러운 거 아뇨?”

스캄의 말에 아연히 내려다보던 제인이 한껏 눈매를 좁히곤 떠듬떠듬 글자를 읽었다.

“가서 너의… 엉…덩이?”

“눈이 더러워지니까 그만 보세요, 공주님.”

포라킨이 즉각 손바닥으로 제인의 눈을 가리고는 찌릿 야닉을 흘겨보았다.

단정한 얼굴로 꿋꿋하게 마침표까지 찍은 야닉이 완성본을 들어 브레고에게 건넸다. 브레고는 누구보다 신난 얼굴로 재빨리 밖으로 나가 부하에게 넘겨주었다.

부하는 그 길로 계단을 내려가 답신을 적은 가죽옷을 동료들에게 선보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어쩐지 그들 나름대로 긴장감을 해소하려는 행위 같다고 제인은 짧게 생각했다.

시즈가 보낸 전령이 무용지물이 된 이상 충돌은 불가피했다. 어떤 대회도 이보다 더 목이 탄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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