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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닉의 답신을 받은 제국군은 한동안 눈에 띄는 행동을 보이진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밤새 취발론을 넘어와 쉬지도 못하고 막노동에 가까운 진지를 세운 그들에겐 절실한 휴식이 필요할 터.
강행군으로 혹사를 당한 몸과 익숙지 않을 북부의 매서운 날씨, 거기다 여전히 우렁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는 사기를 저하시키기에 충분했다.
눈치가 빠른 용병들은 취발론이 타오르는 걸 본 순간 이미 대거로 이탈했고, 어영부영 그들을 따라 탈영한 제국군도 적지 않았다.
취발론에서 죽거나, 이한율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도망을 치거나 해서 잃은 병력만 해도 3천에 육박했다.
당연하게도 이한율은 잠들 수 없었다. 그는 사령관을 위해 마련된 침상에 걸터앉아 막사 입구를 주시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밤새 천장을 두들기던 빗소리가 잦아들더니 해가 뜨기 시작하자 비는 완전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요새는 기다렸다는 듯 젖은 해자 위로 새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거대한 방벽을 둘러싼 구덩이에서 어른 키만 한 불꽃이 높이 솟아올랐다.
본격적으로 수비 태세를 갖추는 그들에게 화답하듯 제국군 역시 높은 창을 든 기마부대를 선두에 세우고 공성탑과 발리스타, 투석기를 줄지어 배치했다.
“기름에 빗물이 섞여 생각보다 불길이 높지 않습니다. 현자님께서 잔불만 처리해 주신다면, 해자 위에 다리를 놓고 건너가 성문을 부술 수 있습니다.”
“불화살을 쏠 때 현자님이 뒤에서 바람을 일으켜 주시면 훨씬 더 안쪽으로 날아갈 수도 있고요!”
막사에 모인 각 부대의 지휘관들 사이에서 이한율은 고리타분한 얼굴로 이들의 의견을 듣고 있었다.
4번 대대를 맡은 고위기사가 힐끔, 이한율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말을 얹었다.
“그런데… 전령이 가져온 소식이 진짭니까? 2황자님이 제위에 올랐으니 반드시 3황자를 제거하라는 황명 말입니다.”
“네. 여기 계신 우리 대주교님도 같이 확인하셨잖아요. 안 그래요?”
이한율이 냉소적으로 웃으며 턱짓으로 갈록을 가리켰다.
“무, 물론입니다. 황제가 되신 시즈 님께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이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모친의 세력이 남아 있는 3황자겠지요!”
갈록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연신 찍어 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전령이 가져온 새 황제의 칙서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쓰여 있었지만, 그는 진작에 이한율의 편에 서기로 마음을 바꾼 참이었다.
[대사원이 반역을 도운 대가로 아크만의 알리온 주교를 대주교로 추대할 거예요. 그걸 가만히 보고 있어야 되겠어요? 방해물은 없애야죠.]
그는 이한율이 했던 말에 깊은 공감을 하며 다시 한번 결심을 굳게 다졌다.
‘궁으로 돌아가면 협박을 당했다고 둘러대면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은 사제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운 알리온을 죽이는 게 급선무다.’
사리사욕을 채우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갈록뿐만이 아니었다.
이한율과 손을 잡은 직후 그는 구병호에게 은밀한 제안을 건넸다. 수도의 주교 자리에 앉혀 줄 터이니 자신을 도우라고.
예상대로 구병호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일정 구역을 대표하는 주교라면 신하처럼 거느릴 수 있는 사제와 부제들이 생기는 데다, 사원에서 매달 넉넉한 운영지원금이 들어올 테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남몰래 눈짓을 주고받은 갈록과 구병호는 적극적으로 이한율을 두둔하고 나섰다.
“3황자는 독재자입니다. 왕처럼 군림하면서 떵떵거리는 자가 고작 영지 하나에 만족할 것 같습니까? 제가 아크만에서 4년이나 있었잖아요. 거기 사정은 속속들이 전부 알고 있다니까요?”
대주교와 이방인까지 합세해서 목소리를 드높이자 자연히 고위기사의 기가 꺾여 나갔다.
“애초에 3황자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아 출정하긴 했지만, 저희가 전날에 시종장에게 전달받은 사항은 은밀히 빼돌려 아이노스로 보내라고…….”
“그건 선황제의 명령이었고.”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앉아 있던 이한율이 몸을 바로 세우며 말을 잘랐다.
“이제 여러분들이 모셔야 하는 황제는 헤바투스가 아니라 시즈 오베라죠. 지금 황명에 불복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불만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시라는 뒷말에 막사는 곧바로 어색한 정적에 휩싸였다. 이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종자의 시중을 받으며 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이제부터 제 말이 곧 황제의 말입니다. 부디 명심들 하시고…. 가서 사람이나 한 명 데려오세요. 검은 발톱 용병단이 데리고 있을 거예요.”
* * *
제인은 대지 위를 까맣게 뒤덮고 있는 군대를 보다가 고갤 돌려 옆에 서 있는 포라킨에게 시선을 옮겼다.
한 무리의 황실 마법사 군단이 앞으로 나와 지팡이를 올리는 광경을 포라킨이 착잡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단장님이 아는 분들이시죠?”
“한때는 마탑에서 밤낮으로 붙어 있던 사람들이니 모르고 싶어도 알아볼 수밖에요.”
포라킨은 쓰게 웃으며 망원경을 건네주었다. 그녀의 적갈색 눈동자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한 심경이 어렸다.
“하지만 지금은 적입니다. 저 역시 무른 각오로는 상대하지 않을 겁니다.”
말을 마친 포라킨이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붉은 나무의 끝에서 하얀 소용돌이가 일더니 바람 마법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윽고 로기아 후작이 크게 외쳤다.
“나는 아크만의 5대 영주, 테오도르 로기아다. 그대들은 전부 잘못된 명령을 이행하고 있다. 황제는 바뀌었고, 제국의 영토인 아크만은 시즈 오베라를 마땅히 주군으로 모실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검을 맞대야 할 이유가 없다! 지금이라도 황명을 받들어 회군할 것을 요청한다!”
제발, 그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기를.
불안한 적막 속에서 제인이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 아래에서 네다섯 명이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제인은 서둘러 망원경을 들었다. 렌즈 너머로 한 사람을 질질 끌고 오는 용병 두 사람과 전신 갑옷을 입은 기사가 흐리게 비치고 있었다.
“성문을 열지 않으면 지금부터 한 사람씩 공개처형을 하겠다! 이봐, 지금 당장 네 소개를 해라!”
기사의 외침이 마찬가지로 바람을 타고 방벽 너머로 울려 퍼졌다. 붙잡힌 자의 얼굴을 확인한 야닉이 곧바로 욕설을 읊조렸다.
“……빌어먹게 추잡한 짓을 하는군.”
제인은 험한 말을 내뱉는 그의 얼굴을 놀라서 보다가 재빨리 눈을 돌렸다.
목에 단검이 바짝 닿은 채로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남자가 벌벌 떨면서 힘겹게 입을 열고 있었다.
“제, 제 이름은 코스타스 아산입니다. 저는… 저는 헥토르 아산의 동생입니다!”
인질의 이름을 들은 로하겔 경이 즉각 자신의 종기사를 불렀다.
“헥토르!”
“……코스타스?”
순식간에 창백해진 헥토르에게 병사들이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었다.
“이봐! 헥토르! 진정해!”
“코스타스! 코스타스!”
곧장 제압당해 돌바닥에 꿇어앉은 그가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젠장! 헥토르를 끌어내!”
스캄이 욕설을 토해 내며 명령하는 가운데, 아래쪽에선 황실 기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재차 이어졌다.
“우리에겐 여기 이 불쌍한 코스타스 같은 자들이 많이 남아 있다! 가족을 잃고 싶지 않은 자는 지금 당장 검을 들고 반역자 야닉 리버스의 목을 가져와라! 그것이 불가하다면 요새를 개방하라! 우리도 불필요한 희생은 원치 않는다!”
삽시간에 성안이 술렁거렸다. 영지 바깥에 친족이 있는 병사들이 급격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개소리 집어치워! 내 가족들은 벌써 천년만년도 전에 몰살당했다고! 멍청한 짓거리로 동료들을 전부 사지로 몰고 갈 셈이냐?”
살벌한 기세로 일갈하는 다위의 말에 스캄이 받아치듯 거칠게 소리쳤다.
“티보! 고르칸! 용병들을 데리고 성문으로 가라!”
제인은 본능적으로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저쪽에서 야닉을 언급한 이상,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었다.
누가 됐든 그에게 접근하는 자가 있다면 망설임 없이 저지할 각오로 그녀는 입술을 바짝 깨물었다.
“기다려.”
고요히 아래만 주시하던 야닉이 문득 누군갈 발견하고는 제인을 지나쳐 걸어갔다.
“성문을 열어.”
“야닉!”
경악에 차 달려오는 아내의 어깨를 다독이듯 두어 번 두드린 그가 재차 스캄에게 명령했다.
“문을 열어서 안으로 전부 들여보내고 전투가 시작되면 다시 닫아.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붉은 늑대가 돌아왔다.”
야닉의 눈에 찬연한 이채가 돌았다. 곧바로 알아들은 스캄이 얼굴에 화색을 띠며 쿵쿵 발을 굴렀다.
“드디어 몸 좀 풀겠구만!”
“성문을 열어라!”
로기아 후작 역시 그의 의중을 알아채고 성큼성큼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전투가 벌어질 거야.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담담히 제인의 양어깨를 잡은 야닉이 고개를 숙이더니 진중하게 눈을 맞춰 왔다.
“그대는 야인족들과 같이 다리를 건너서 안쪽으로 가 있어.”
“그럼 너는?”
당황해서 튀어나온 말에 그가 피식 웃으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한율을 잡아야지. 요새에서 진정으로 내 걱정을 하는 사람은 우리 아내뿐이로군.”
이 여자 눈엔 내가 약해 보이는 건가, 야닉은 활을 들고 결사적으로 제 앞을 막아서던 아내를 떠올리며 설핏 웃었다.
“미르, 황자비를 내성벽으로 모셔.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말고.”
“네, 네. 어련히 알아서 잘 모십지요.”
지척에서 대기하던 미르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끌고 나왔다. 제인은 퀴버에 올라타면서 퍼뜩 떠오른 기억에 재깍 고개를 돌렸다.
“가능하면 생포해 줘!”
야닉을 향해 그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불쑥불쑥 치미는 분노에 잠시 마음이 흔들리긴 했지만, 제인은 이한율에 대한 한줄기 연민을 차마 거둘 수가 없었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한송이를 놓지 못하는 건 이한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치 ‘한송이’라는 망령에 휘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본인이 죽을 수도, 잡혀서 평생 감옥에 갇힐 수도 있는 곳으로 돌아온 것부터가 미친 짓이었다.
이한율은 명백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살아서 돌아갔으면 했다.
한송이는 13년 전에 사라졌고, 한재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마법도 없고 자신이 현자도 아닌 평범한 세상으로.
지금의 이한율에겐 어쩌면 그것이 가장 큰 벌일지도 모른다. 속죄할 수도 있는 마지막 기회를 부디 놓치지 않기를.
제인은 주머니 안에 넣어 둔 귀환석을 아프도록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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