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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벽의 병사들은 가운데에 길을 만들고 방어대형을 갖춘다!”
로기아 후작의 호령에 무장한 병사들이 팔꿈치까지 단단히 끼워 놓은 방패를 앞세워 이중으로 대열을 갖추었다.
용병 두 명이 달라붙어 레버를 돌리자 육중한 도개교가 아래로 내려가 해자 위로 무겁게 떨어졌다. 뒤를 이어 격자문이 열리고 완전히 개방된 성문으로 황가의 깃발을 든 기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무섭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제국군은 좌우로 길을 턴 아크만의 병사들 사이를 저돌적으로 치고 나가 경비 초소와 농경지를 가로질렀다.
만칠천여 명의 군대가 내성의 강철문 앞에 다다라 기다랗게 늘어서고, 이들과 양쪽에 포진한 수백 명의 아크만 병사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성곽을 잇는 다리 위에서도 언제든 발사 준비가 끝난 석궁과 화살들이 제국군을 겨냥하고 있었다.
“내성의 문을 열어라! 아크만의 성채는 제국군이 점령할 것이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황실 기사의 목소리에도 굳게 닫힌 까만 철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패를 든 아크만 병사들이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선두에서 호위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이한율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우쳤다.
“기어이 피를 보겠다는 것인가! 인질을 전부 데려와라! 모조리 처단하고 무력으로 문을 열겠다!”
까마득하게 높았던 외부 방벽에 비하면 시가지를 둘러싼 내성벽 정도는 충분히 공성탑과 투석기로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감이 실린 기사의 노성에 뒤쪽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었다.
“이, 인질들이 도망칩니다!”
누군가 큰 소리로 떠드는 말에 후방 대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맨 뒤에서 황실의 서코트를 입은 평기사 하나가 붙잡혀 온 사람들의 밧줄을 자르고 몰래 아크만 병사 쪽으로 넘기다가 발각된 것이다.
배신자의 붉은 고수머리를 본 누군가가 휘둥그레한 눈으로 소리쳤다.
“저놈은 우리 뒤만 줄창 따라다니던 주보 상인이잖아!”
달려드는 병사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마지막 남은 사람마저 빼돌린 하랑이 쏜살같이 도망치며 다리 위로 냉큼 올라섰다.
“틀렸어요! 저한텐 하랑이라는 멋진 이름이 있거든요! 인질을 후방에 두다니, 너무 멍청한 거 아니에요?”
“저놈을 붙잡아!”
해당 부대의 사령관이 소리침과 동시에 다리 위에 있던 궁수들이 일시에 시위를 놓았다. 한 개의 활에서 세 개씩 매달려 있던 화살들이 제국군의 머리 위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죽음을 향해서! 공격! 공격하라!”
“성문을 닫아라! 아크만이 곧 이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방패를 든 병사들 사이로 웅크리고 있던 거인족 용병들이 대검과 철퇴를 들고 일어서고, 지켜보던 아크만의 시민들이 로브 속에서 검과 창을 빼 들었다.
성벽 위에 모여있던 이방인들이 적군의 머리 위로 화염을 쏟아붓자 황실의 마법사들이 즉각적으로 실드를 전개했다. 그 아래에서 씩씩거리던 이한율이 악에 받친 고함을 질러 댔다.
“모조리 죽여!”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모여있는 군대를 향해 창과 화살이 빗발치고 마법사들의 불꽃이 서로 강렬하게 맞부딪쳤다.
방패를 든 병사들에게 제국군은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두 진영이 난잡하게 뒤엉켜 서로를 마구 찌르고, 베고, 치는 지옥 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각오를 다졌음에도 제인의 손과 다리가 사시나무 떨듯 세차게 흔들렸다.
성벽 위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영화도, 꿈도 아닌 현실이었다. 쇠붙이들이 거칠게 마찰하는 소리와 사람들이 고함과 비명을 지르는 소리, 모든 것이 바람결에 실려 살갗으로 생생하게 스며들었다.
“공주님! 벽에서 떨어지십시오!”
그녀의 주위에 있던 기사들이 전방을 주시하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제인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다른 사람들보다 훌쩍 높은 위치라면 오히려 적들의 눈에 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르! 우리가 불리한 거 아니에요? 아무리 봐도 붉은색이 훨씬 더 많아 보이는데…!”
영지민들이 대거로 합류하긴 했지만, 적들의 머릿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조금 전 야닉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던 말은 우리가 그만큼 빨리 패배한다는 뜻인가 싶을 만큼 열세임이 분명했다.
“자세히 봐봐요. 진짜로 질 것 같은지.”
미르가 허리를 숙이더니 제인을 한 걸음 앞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흐트러진 숨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전장을 둘러보았다.
제인은 곧 미르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숫자는 황실군이 곱절 이상 많았지만, 성난 기세와 대인 전투의 경험은 아크만이 월등했다.
스캄과 로하겔 경이 거침없이 길을 터서 나아가면 뒤따르던 용병들이 제국군의 대열을 무너뜨리고 고위기사를 찾아내 보란 듯이 처단했다.
지휘를 잃은 군인들은 우왕좌왕하다가 틈새로 파고든 다위의 도끼날에 허리를 베였다.
“영주님이다! 아크만의 영주님이 오셨다!”
로기아 후작마저 성벽에서 내려와 전투에 가담했다. 자신들의 주인이 진정 복귀했음을 깨달은 병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져만 갔다.
이방인들은 깃발을 들고 있는 기수들을 노려 불꽃을 퍼부었다. 머리 위로 자신들의 깃발이 보이지 않자, 땅에서 싸우는 자들은 누가 이기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눈매를 좁히고 이들을 살피던 제인이 곧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다리 위를 달려 나갔다.
블라산코가 날아오는 검을 날렵하게 피하며 폰에게 소리쳤다.
“어이, 폰! 자네 아직 살아 있나?”
“나는 멀쩡하다!”
“우리 잘생긴 대장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다 죽은 다음에야 등장할 셈인가?”
대꾸하려고 잠시 한눈을 판 사이, 폰이 순식간에 적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이제 곧 안 멀쩡할 것 같다!”
크르릉! 흔치 않은 농담을 던진 그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경계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앞을 막아선 병사의 허벅지에 푹 박혔다.
“빨리 빠져나오세요!”
성벽에서 이어진 다리 위에서 화살을 쏜 제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녀의 머리 위로 붕, 소리가 나더니 길쭉한 무언가가 묵직하게 날아갔다.
미르가 한 손으로 던진 창에 적군 둘이 동시에 꿰뚫렸다.
“바글바글하니까 대충 던져도 월척이네.”
태연하게 볼을 긁는 미르를 올려다보던 제인이 이내 이쪽으로 달려오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하랑!”
“한 주임님!”
또다시 부랑자에 가까운 몰골로 나타난 그를 반가운 마음에 있는 힘껏 껴안았다. 몸서리치게 놀란 하랑이 허둥지둥 제인을 밀어내며 두리번거렸다.
“황자님이 보시면 저 죽어요!”
그녀는 뜨거워지려는 눈시울을 서둘러 훔쳐내고 하랑의 등을 떠밀었다.
“가서 야닉 옆에 있어 줘요. 다들 아래로 내려가 있어서 그 사람 지금 혼자예요.”
“예? 그게 뭐가 어떻다고…….”
어리둥절한 하랑을 뒤로하고 할 말을 마친 제인이 얼른 아래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미르가 어깨를 한번 세우며 그만 가 보라는 고갯짓을 했다. 하랑은 어영부영 병사들 사이를 헤집고 뛰어갔다.
이번엔 아래에서 요란하게 검을 휘두르던 브레고가 제인을 발견하고는 부리나케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땀과 피로 얼룩진 얼굴로 그가 또다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제인 공주님! 미네는요?”
“단장님이요? 성문 위에서 다른 이방인분들이랑 같이 계실 거예요.”
제인이 조금 뒷걸음질 치며 대답하자 브레고가 크게 고갤 끄덕였다.
“저도 그쪽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걔가 한번 화가 나면 앞뒤를 안 가리고 마력을 써 대거든요.”
“…누가 물어봤나?”
미르가 중얼거리다가 사다리를 보더니 제인의 허리를 냅다 감아 올려 말에 태웠다.
“왜, 왜요?”
“우리도 그쪽으로 갑시다!”
제국군들이 다리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미르는 혀를 차며 고삐를 잡고 서둘러 말을 이끌었다.
“용병 나으리! 뒤에 조심해요!”
멀어지면서 미르가 던진 말에 브레고가 고갤 돌렸다가 우글우글 밀려드는 붉은 옷자락을 보고 안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렸다.
* * *
마법사들이 친 실드에서 빠져나온 이한율이 거칠게 아군을 밀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적들에게 둘러싸인 채로는 1만이든 2만이든 하등 쓸모가 없었다. 하물며 밀집된 곳만 노린 화살과 불꽃이 빗발쳐대는 통에 무의미한 사상자만 늘어나고 있었다.
그는 성가신 마법사들을 먼저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에 손을 올려 성벽 위에 있는 이방인들을 향해 물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포라킨이 거친 바람을 일으켜 먼 곳으로 날려 버린 탓에 날카로운 공격은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이 즉각 마주쳤다.
“단장님! 이제 이 정도는 몇 개라도 만들 수 있어요!”
한때의 스승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훌륭한 학생이군요.”
포라킨이 손등으로 턱을 쓸면서 입매를 비틀었다.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고작 한 차례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 해도 그녀에겐 상당히 버거운 수준이었다.
생각보다 강한 바람을 일으켜야 했기에 급격하게 줄어든 마력으로 인해 비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한율은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두 번째 공격을 개시했다. 포라킨이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드는 순간, 뒤쪽에서 역풍이 불더니 그녀의 앞을 대신 막아섰다.
“이 사원! 이 정신 나간 놈이 지금 누굴 공격하는 거야!”
“부장님도 실력이 많이 느셨네요?”
하하하 웃는 이한율을 보고 염 부장이 버럭 성질을 내며 완드를 휘둘렀다.
“저, 저, 미친…!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고! 너도 그만 돌아가, 인마!”
“누가 가든지 말든지 그딴 건 별로 관심 없고…….”
눈살을 찌푸린 이한율이 고개를 돌리다가 제인을 찾아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말에 탄 채로 싸늘하게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치자 그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주임님! 거기 계셨어요? 기다려도 안 오시길래 제가 데리러 왔어요!”
“…….”
날아드는 화살을 귀찮다는 듯이 실드로 튕겨 내며 웃고 있는 이한율의 모습은 도저히 제정신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제인은 낯빛을 흐리며 떨리는 두 손을 위로 올렸다. 울퉁불퉁한 성벽 위로 까만 활이 드러나더니 뾰쪽한 화살 끝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아직 쏘지도 않았건만, 저를 향한 화살촉이 날아와 심장에 콱 박히는 듯했다. 이한율은 감격스럽게 외쳤다.
“쏘세요! 한송이의 화살에 맞아 죽는다니, 이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거예요! 얼른 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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