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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은 이한율의 발치에 맞춰 정확하게 화살을 내리꽂았다. 저로 인해 벌어진 참상에 그녀가 괴로운 얼굴로 소리쳤다.
“그만 포기하고 항복해! 사람들이 죽고 있잖아!”
실드가 풀린 사이, 뒤에서 쏘아진 화살이 이한율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성벽 위 제인 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주저 없이 바람을 일으켜 화살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하얀 볼에서 한줄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감히 누구한테 활 질이야?”
성가시다는 얼굴로 지팡이를 휘둘러 무작위로 날린 물에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사람들의 단말마가 들렸다.
“현자님! 위험합니다! 어서 피하세요!”
그때 갈록이 허둥지둥 달려오더니 이한율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가 짜증스럽게 고갤 돌렸다.
“우리 숫자가 훨씬 더 많은데 뭐가 위험해요?”
“이젠 아닌 것 같은데.”
순간 근처에서 낮은 목소리 하나가 툭 날아와 끼어들었다.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익숙한 음성이었다.
저와 한 주임 사이에 끼어들어 그녀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눈엣가시 같은 남자. 늘 어딘가 깔보는 것처럼 자신을 내려다보던 건방진 자식.
으드득 이를 갈면서도 한편으론 드디어 결판을 지을 수 있겠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
“읏…!”
온몸이 급격하게 무거워지더니 머리와 어깨를 짓누르는 힘에 절로 무릎이 꺾이고 두 팔이 바닥에 닿았다.
콘크리트 더미가 등에 올려진 것 같은 압박감이 이한율을 덮쳐 왔다. 옆에 있던 갈록 역시 일찌감치 바닥에 엎어져 끙끙거리고 있었다.
“수업 첫날을 기억하나?”
야닉을 둘러싼 주위의 이들이 전부 주저앉거나 바닥에 엎드린 채로 억눌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불과 바람, 그리고 물. 이 세 가지가 모든 마법의 근간이 되는 마나 원소라고 했는데. 혹시 배웠던 순서도 기억해?”
그 무지막지한 힘에 이한율이 진 땅에 손바닥을 짚고 이를 꽉 물었다.
“바람 다음이 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이었지. 다시 말해 바람은 아주 기초적인 마법이란 뜻이야.”
무릎 꿇은 자들 위로 군림하듯이 느긋하게 걸어오던 야닉이 이한율의 앞에서 뚝,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네 등을 누르고 있는 게 바로 기초 중의 기초라고.”
“보내 주신 답장은 잘… 받았어요. 바빠서 회신을 못 했는데……. ‘엿이나 먹어, 이 XX야.’”
억지로 버티느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살기를 담은 어조에 야닉이 새삼 감탄 어린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아깝네.”
그가 발을 두어 걸음 뒤로 물렸다. 거리가 멀어졌음에도 젖은 땅을 밟는 소리가 이한율에겐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마지막 수업이라고 치고. 내 바람을 이겨 내고 일어서 봐, 이한율. 부하들 앞에서 현자의 자존심은 지켜야지. 안 그래?”
바람? 흑마술이래도 믿을 만한 이 무지막지한 힘이 겨우 바람이라고? 3황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갈록과 황실기사단의 안면에 경악이 서렸다.
누군가의 등을 의자 취급하며 걸터앉은 야닉을 지켜보던 제국군은 곧바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검을 맞대던 아크만의 병사들이나 트라야누스 용병들은 어느샌가 뒤로 물러나 있었고, 현자와 대주교가 3황자 앞에서 땅에 두 손을 짚고 개처럼 엎드려 있었다.
유리한 건 당연히 자신들이라 믿었건만, 눈앞에 펼쳐진 한 장면으로 인해 그들의 예상이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3황자의 손짓 한 번에 수백 명이 줄줄이 무릎을 꿇렸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일정한 범위 안에서 퍼지는 전염병처럼 병사들이 철퍼덕철퍼덕 쓰러졌다.
이 전쟁은 처음부터 이길 수가 없었던 싸움이었다.
봐주고 있는 쪽은 오히려 아크만이었고, 일부러 충돌을 야기한 것은 수적 열세를 능가하는 자신들의 무력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이쪽의 사망자는 이미 짐마차 열 대는 한가득 메울 정도였으나, 아무리 둘러봐도 아크만의 사상자는 오십도 안 되어 보였다. 그마저도 다친 병사에게 달려든 사제들이 순식간에 데리고 사라지기 일쑤였다.
거인족 한 명이 휘두른 철퇴에 열댓 명이 한꺼번에 고꾸라지고, 아크만 기사들의 칼날은 갑옷마저 뚫고 살에 파고들었다. 반대로 그들의 갑옷은 이음새가 정교하고 빈틈없이 물려 있어 틈새를 찾기조차 어려웠다.
요새 앞에 도착했을 때 이들이 먼저 공격을 했더라면, 3황자가 지금 바람이 아니라 불길을 내뿜었다면.
아크만이 봐주지 않았더라면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았을 거라고 그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제국군이 얼어 있는 와중에도 눈치 없는 자는 어딜 가나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황실의 궁사수 하나가 야닉을 향해 몰래 활을 겨누다가 냅다 시위를 놔 버렸다. 그러나 기대에 차 있던 그의 얼굴은 금세 경악으로 물들어 버렸다.
표적에 채 닿기도 전에 다른 화살이 날아오더니 제가 쏜 것의 옆구리를 반으로 쪼개 놓은 것이다.
콰직!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가운데가 쩍 갈라진 화살이 맥없이 추락해 누군가의 등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공중에서 화살을 화살로 맞히다니, 말도 안 되는 현실에 놀랄 새도 없이 성벽 위에서 경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마세요.”
궁수는 자신의 머리를 겨냥해 시위를 당기고 있는 제인을 보고 허무하게 활을 떨어뜨렸다. 아크만은 심지어 여성들조차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천사 같은 아내의 음성을 들은 야닉이 곧장 뿌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 아내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거든. 얌전히 따르는 게 이로울 거야.”
‘아내라고?’
“하…….”
끌어올린 입가와는 반대로 이한율의 이마에 시퍼런 힘줄이 돋아났다. 다 나았다고 생각했던 눈가의 상처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박탈감과 모멸감으로 얼룩진 감정이 초인적인 힘을 끌어내고 있었다.
목까지 새빨개질 정도로 힘주어 버티던 그가 간신히 검지를 움직였다. 그러자 손끝으로 집중된 하얀 소용돌이가 야닉의 것을 서서히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야닉은 한쪽 다리를 먼저 땅에 딛고 기어이 상체를 일으키는 이한율의 모습을 흥미롭게 관망했다.
이한율이 홉뜬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허리를 세우기 시작할 무렵, 앉은 자리가 수상하게 꿈틀거렸다.
“그대에겐 일어나라고 허락한 적 없으니 얌전히 의자 역할이나 해.”
“이익…!”
기회를 틈타 마법을 전개하려던 구병호의 손등을 야닉이 사뿐히 지르밟았다.
그사이 마침내 두 다리로 온전히 일어선 이한율이 보란 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제가… 이겼네요?”
“우리가 언제 내기를 했던가?”
“……뭐?”
메마른 낯으로 이한율을 보던 야닉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투명한 기둥이 날아와 배에 부딪힌 것처럼 이한율의 몸이 크게 접히더니 뒤로 나자빠졌다.
“컥!”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제인이 작게 움찔했다. 컥컥거리면서 바닥에 침을 흘리는 이한율이 아니라 처음 보는 분노에 찬 야닉의 얼굴이 더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야닉이 일어나더니 이한율을 향해 서서히 걸어갔다.
“감히 내 아내에게 약을 먹이고.”
이번에는 측면에서 날아온 바람이 이한율을 진창에 처박았다. 하얀 얼굴이 진흙탕으로 흠뻑 젖었다.
“납치해서 산을 넘고.”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두려움에 떠는 군중 사이를 그가 유유히 걸었다.
“내 땅에 쳐들어올 생각까지.”
가쁜 호흡을 뱉어내는 이한율의 멱살을 쥐고 그가 마침내 감정을 드러냈다. 호박색 눈에 드리워진 살기를 본 이한율이 큭큭 웃었다.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보지그래? 수천 명이 보는 앞에서 현자를 한번 죽여 보라고.”
“네 눈엔 내가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으로 보이나?”
야닉이 손에 힘을 주자 딱딱한 옷깃이 더욱 이한율의 목을 조였다. 피가 몰려 새빨개진 얼굴로도 그는 비아냥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은 몰라도 이방인들의 눈치는 보이겠지. 날 죽이면 과연 남은 이방인들이 계속 널 믿고 따를까?”
“착각을 하고 있군. 내가 널 살려 두는 이유는 딱 하나야.”
작게 속삭인 그가 반대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서 시작된 푸른 불꽃이 부피를 점점 키우더니 어느 순간 주저앉아 있던 구병호에게 빠르게 날아갔다.
“크아악!”
부지불식간에 온몸이 타오르던 인영은 불과 몇 초 사이에 까만 재로 변해 버렸다.
뼛조각 하나 남지 않은 부스러기가 바닥을 까맣게 물들이는 충격적인 광경에 제국군뿐만 아니라, 아군마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이방인을 태운 야닉이 태연하게 고갤 돌렸다.
“저건 너무 쉽고. 넌 어렵게 가야지.”
“으…….”
산소가 모자라 핏발이 섰던 눈동자가 까무룩 뒤집혔다.
기절한 이한율을 내동댕이치듯 바닥에 던진 야닉이 성가시다는 얼굴로 쯧, 혀를 찼다.
온통 공포심에 사로잡힌 시선들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황자 저하께서 처단하신 자는 날 속이고 수도로 도망친 대역죄인이다.”
얼어붙은 병사들을 가르고 로기아 후작이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적군의 수장이 호위도 없이 진영 한가운데로 파고들었으나, 그 누구도 함부로 다가서지 못하고 눈알만 굴려댔다.
후작은 남은 제국군을 향해 짐짓 엄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적이 아니다. 저 이방인들이 너희를 속이고 무력을 앞세워 협박한 것뿐.”
“맞습니다! 맞아요!”
그때 갈록이 부리나케 달려오더니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자님… 아니, 저 현자 놈이 군대의 사령관을 죽이고 전령까지 죽였습니다! 그리고 절 협박했지요! 3황자 저하께서 반역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제가 몇 번이나 말렸습니다만!”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세 치 혀를 놀리는 갈록의 모습에 제인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나한테는 마력도 없는 쓰레기라고 했으면서…….”
“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는데, 어느샌가 곁에 온 염 부장이 용케 알아듣고는 홱, 고갤 돌렸다. 옆에 있는 줄도 몰랐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 텁, 입을 다물었다.
염 부장은 손을 번쩍 들고는 반가운 지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성벽에 매달렸다.
“이봐! 책임자 양반!”
“오오! 이게 누구십니까!”
갈록이 한껏 신나서 아는 체를 하며 달려왔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한 명은 내려다보고 다른 한 명은 올려다보면서 반가운 척을 하는 두 사람을 제인이 찌푸린 눈으로 주시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
“저야 덕분에 잘 지냈지요! 사자님께서도 좋아 보이십니다!”
“저기, 내가 책임자 양반한테 줄 게 있는데!”
“오, 그래요? 무엇입니까?”
“잘 받으슈!”
염 부장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짧게 중얼거리고는 아래를 향해 훌쩍 던졌다.
제인은 찰나의 순간에 붉은색으로 반짝이는 무언갈 보고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 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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