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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은 쉬지 않고 활을 쏘며 머릿속으로 남은 화살의 개수를 헤아렸다.
가고일의 뼈다귀를 가공해 만든 화살촉은 철로 만든 것보다 살상력이 뛰어났다. 다른 궁수가 쏜 화살은 맥없이 튕겨 나가거나 얕은 생채기 정도만 낼 뿐이었으나, 제인의 것은 발리스타에서 발사된 굵은 창과 마찬가지로 그리핀의 몸통 깊숙한 곳까지 틀어박혔다.
그녀는 그리핀이 정면으로 도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슈팅을 이어 나갔다. 반동으로 튕긴 현이 가슴 보호대를 연달아 때려 댔다.
눈알에 화살이 박힌 그리핀이 괴성을 내지르며 제자리에서 발광하면 야닉이 가까이 접근해서 단숨에 숨통을 끊어 놓았다.
따로 연습한 것도 아닌데 손발이 척척 들어맞는 느낌에 희열감마저 드는 순간이었다.
다음 화살을 찾아 손을 머리 위로 올렸던 제인이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다 썼구나.’
정신없이 활 질을 하다 보니 도중에 화살을 세는 걸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빈손을 거두고 다급히 몸을 돌려 보급대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막사에서 성벽으로 부지런히 검과 화살을 나르던 움리족이 때마침 근처에 있었다. 서둘러 달려가 화살을 건네받는데, 그의 머리 너머 성채 안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알리온과 사제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내성문 앞에서 말에서 내려 문루의 병사에게 짧은 보고를 받고는 곧장 돌계단을 줄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제인은 즉각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공주님!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제인을 본 알리온이 지팡이를 바닥에 찧으며 달려왔다.
“전 괜찮은데 다친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녀의 말에 여기저기서 까만 연기가 피어오르는 대지를 내려다보던 알리온이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참, 병력이 많은 것이 오히려 피해를 키운 꼴이 되었군요…….”
제인은 씁쓸하게 공감했다. 아마도 사람이 적었다면 야닉이 좀 더 거창하게 화염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사상자는 지금보다 훨씬 적었을 테고.
죽은 그리핀만큼이나 비슷한 부피로 사람들이 대거 쓰러져 있었다.
이미 숨을 거둔 자와 곧 끊어질 자, 다친 부위를 끌어안고 신음을 흘리는 자, 누군가를 등에 업고 싸우는 자들을 보자면 이긴다 해도 경쾌한 승리라고 부르기 어려울 풍경일 것이다.
아크만 기사단과 트라야누스 대원들이 적은 구역은 피해가 더욱 심각했다. 아직 살아 있는 굶주린 마수들은 몸에 창과 검을 꽂은 채로 도륙과도 다름없는 사냥을 이어 가고 있었다.
싸움이 길어지면 무기와 체력이 고갈된 사람들의 피해는 더욱 커진다. 그렇기에 제인은 강력한 치유마법을 부리는 알리온이 더욱 반가웠다.
“다친 분들을 안으로 옮겨야 해요. 주교님이 와 주셨으니….”
“아직은 제 차례가 아닙니다.”
알리온이 나지막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핀이 나타난 건 계획에는 없던 일이지만, 제국군에게 황자님의 힘을 선보일 좋은 기회가 되겠군요.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으로 이제 그분의 힘은 만천하에 알려질 겁니다.”
“저기…. 야닉의 힘은 이미 충분히 보여 줬어요.”
밝았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수백 명의 무릎을 꿇려 순식간에 그들의 전의를 잃게 만든 걸 보지 못했으니 이런 말을 하는 거겠지.
어색하게 입매를 끌어올리던 제인이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알리온은 그녀가 멀어진 만큼 앞으로 몸을 내밀면서 눈을 부릅떴다.
“안타까운 마음은 물론 이해합니다만, 위대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선 자비와 관용 말고도 필요한 게 있지요. 바로 따르는 자들의 공포와 경외입니다. 그 두 가지에 ‘충분’이란 없습니다. 공주님.”
제인의 팔을 잡은 그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황자님에겐 앞으로 더 많은 힘이 필요할 겁니다. 황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권력 말입니다. 그것이 두 분을 지키는 방패가 될 겁니다. 부디 이 늙은이의 조언을 새겨들으십시오.”
옅은 갈색 눈동자 너머로 알리온은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인은 붙잡힌 팔을 다른 손으로 힘주어 내리며 단단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했다.
“무력으로 얻은 힘은 오래가지 못해요. 제가 살던 곳에서는 항상 그랬거든요. 그건 종교도 다르지 않고요. 죄송하지만 저는 주교님 말씀에 동의하지 않아요.”
뒤를 돌아 전장을 향해 걸어 나가는 여인에게선 처음 만났을 때의 조심스러움이나 망설임 따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듯했다.
“……황자님과 똑같은 소릴 하시는군요.”
알리온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깊은 침잠에 사로잡혔다. 한참 뒤에야 돌아선 그가 사제들을 향해 무겁게 지시를 내렸다.
“내성문을 개방하고 부상자들을 안으로 옮깁시다.”
“제국군도… 말씀이십니까?”
“다치고 병든 자를 돌보아라. 굶주린 이에게 빵을 내어 주어라……. 신께서는 내 편, 네 편을 나누어 돌보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요. 제가 잠시 신의 가르침을 잊었습니다.”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사제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뒤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안에서 수도복을 입은 사제들과 부제들이 들것을 가지고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가까운 곳에 쓰러진 자들부터 차례로 영지 안으로 옮겨 나갔다. 안전한 구역의 문이 열리자 겁에 질린 병사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가 사제들을 보고 하나둘 그들을 돕기 시작했다.
비로소 알리온의 눈에 부상자들이 선명히 비쳤다.
아직 전투가 한창인 곳에선 야닉이 조금 더 수월하게 그리핀을 토벌해 나갔다.
포라킨은 어느새 황실 마법사들과 합류해 그들을 지휘하며 실드를 전개했고, 비호를 받은 군인들이 동료를 챙겨 줄지어 대피했다.
화살이 닿는 사정거리엔 이제 마수가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
제인은 다른 궁수들이 사다리를 타고 성벽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미르에게 재빨리 손짓했다.
“우리도 내려가서 싸워요!”
“잠깐만, 잠깐만요. 저기 저거, 미친 왕녀 아니에요?”
성문 위, 삼각형 지붕이 달린 문루를 가리킨 미르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제인은 창백한 얼굴로 곧바로 미르의 손가락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병사를 뿌리치고 기어이 지붕 위로 올라선 세레나가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이혼은 무효야! 전부 다 이방인의 음모라고!”
두 사람 말고도 그녀를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둘 머리를 들어 쳐다보기 시작했다. 세레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종을 쳐서 더 많은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은 황손이고 나 세레나 리버스는 제국의 황자비입니다!”
“세레나! 위험하게 무슨 짓이야! 어서 내려와!”
몰래 그녀를 따라 나왔던 지미 크랩턴이 난간 위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을 거침없는 발길질로 쳐낸 세레나가 번뜩 눈을 부라리며 속사포로 다그쳤다.
“나한테 손대지 마, 이 더러운 자식! 너도 똑같아. 네 형처럼 한몫 뜯어내려는 속셈으로 여기 남은 거잖아!”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사미와는 달라!”
당황하는 지미 크랩턴을 뒤로 하고 세레나가 재차 허리를 세웠다.
“질투에 눈먼 이방인이 나를 쫓아내려고 계략을 꾸몄어요! 내가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남편과 내 사이를 이간질했답니다! 나는 억울합니다!”
제인은 사색이 되어 바닥에 손을 짚었다.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 서 있기조차 버거웠다.
득달같이 달려와 부축하는 미르에게 입만 벙긋거리던 그녀는 어느 순간 그것마저도 멈추어 버렸다.
“황자를 꼬셔서 내 자리를 넘본 사악한 마녀가 바로 저기…!”
콰앙!
갑자기 세레나의 모습이 가려졌다. 정확히는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희뿌연 먼지가 일고 돌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매캐한 먼지가 바람에 쓸려 날아간 후엔 송아지 크기만 한 바윗덩어리가 문루를 부수고 지붕 위에 처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뭐… 뭐가 어떻게…….”
처참하게 박살 난 지붕 아래로 붉은 선혈이 뚝뚝 흘러내렸다. 제인은 그것이 사람의 피라는 걸 깨닫고는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하! 누가 투석기를 쐈나 본데.”
황당한 숨을 토해 낸 미르가 바위가 날아온 방향으로 머리를 획 돌렸다.
“여기 사람이 깔렸어요! 두 사람입니다!”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진 성문 쪽으로 사제들이 부리나케 뛰어갔다.
제인은 몇몇 병사들이 달려가는 장면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미르의 시선을 따라 홀연히 고개를 내렸다.
기절한 줄 알았던 이한율이 투석기 옆에 서서 가슴을 크게 들썩이고 있었다.
“쫑알쫑알, 거 되게 시끄럽네…….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이니까 그런 꼴이 되는 거라고.”
혼자 힘으로 발사 줄을 당기려다 포기하고 결국 바람 마법으로 바위를 던지는 데 성공한 그가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자를 잡아라!”
멀지 않은 곳에서 그리핀을 토벌하던 로기아 후작이 검을 들고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하아.”
이한율은 고개를 뒤로 젖혀 번거롭다는 듯 끓는 신음을 흘렸다.
“아, 안 돼요. 영주님, 가까이 가면.”
제인은 무의식중에 벌떡 일어나 화살을 시위에 걸어 손을 놓았다.
‘멀어!’
이한율에게 채 닿지 못한 화살이 질척한 흙바닥에 내리꽂혔다.
그녀는 미르의 손을 뿌리치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축축해진 손바닥에서 장갑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거의 다 내려왔을 땐 아래를 한번 슬쩍 보고 그냥 뛰어내렸다. 생각보다 높이가 있었는지 발목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통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마구 내달리면서 새 화살을 꺼내 든 그녀가 멀찌감치 보이는 이한율을 향해 연속으로 활을 쏘았다.
흔들리는 시야로 조준한 화살들은 아슬아슬하게 그를 비껴 나갔다.
“오지 마세요!”
후작을 향해 소리침과 동시에 우뚝 발을 멈추고 쏜 한 발이 이한율의 왼쪽 어깨로 날아가 푹, 박혔다.
그의 몸이 휘청이더니 날카로운 물이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멈추지 않고 달려오던 로기아 후작은 검으로 눈에 보이는 물을 쳐내다가 이내 비틀거렸다. 미처 막지 못한 공격 하나가 그의 옆구리를 깊숙이 베고 지나간 것이다.
“윽…!”
갑옷이 깨끗하게 그어진 자리로 울컥울컥 피가 뿜어나왔다. 후작은 검 끝을 땅에 박고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영주님!”
한발 늦게 기사들이 달려들어 방패로 앞을 막아서고, 제인이 쏜 다음 화살이 이한율의 허벅지에 정확히 명중했다.
“제발 그만 좀 해!”
힘없이 떨어뜨린 팔 뒤에는 괴로운 얼굴을 한 제인이 있었다. 뛰어오느라 헐떡이면서도 그를 향해 걷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야닉이 멀리서 마물을 상대하고 있는 지금, 이한율을 막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이한율은 어깨와 다리에 화살이 깊게 박혔음에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웃고 있었다.
그의 감정이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너무나 무겁고, 섬뜩했다.
“저랑 같이 가요. 주임님. 멀리… 아주 멀리 떠나요. 아무도 우릴 못 찾는 곳으로 가서 둘이서만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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