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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율 씨…. 도대체 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주임님이 그랬잖아요. 날 사랑한댔잖아요.”
“그런 적 없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넌 날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냥 오래된 집착일 뿐이야.”
“아뇨! 나한테서 한송이를 빼면 아무것도 없어요. 한송이가 내 목숨을 살렸으니까… 한재인이 책임지는 게 맞아요.”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들더니 이한율을 우악스럽게 짓눌렀다. 강압적으로 손을 꺾고 다리를 잡아 제압하는 모습이 차마 보기가 힘들어 그녀는 눈을 감았다.
“네 마음을 강요하지 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네가 아니야.”
“그 남자가 주임님한테 정신을 조종하는 마법이라도 걸었나 보죠. 그런 게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니까.”
이한율의 내면은 뿌리부터 온통 썩은 채로 자라난 시커먼 나무 같았다. 송두리째 뽑지 않으면 주위를 전부 오염시켜 버리는 거대한 흉물.
처음부터 썩어 있었기에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걸까. 그래서 아무런 죄책감도, 고통도 못 느끼고 여전히 웃고 있는 걸까.
턱이 떨릴 정도로 율연하면서도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서 그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손부터 묶어!”
제압하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이한율의 팔과 다리를 꽁꽁 묶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저항하던 이한율은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고 쇠 신발과 군홧발로 온몸을 짓밟혔다.
그 모습을 의도적으로 지켜보던 제인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마지막 남은 귀환석이 손아귀에 들어왔다.
마음을 다잡고 발을 내디디려는데 문루를 살피고 온 미르가 땅을 쿵쿵 울리며 달려왔다. 제인은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미르는 피투성이가 된 이한율을 보고 멈칫했다가 제인의 앞을 막아서듯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미친 왕녀는 돌에 맞아 즉사했고 옆에 있던 남자는 중상. 아까 그 신관이 치료하다가 포기했어요. 가망 없어 보여요.”
“…….”
세레나가 죽었다.
직접 목격했음에도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듣는 말은 퍽 낯설게만 느껴졌다. 호수처럼 찰랑거리던 푸른 눈이 제인 앞에 어른거렸다.
[앞으론 우리 둘이서 사이좋게 지내자꾸나.]
위태롭게 소리치던 마지막 모습이 아니라, 저를 보고 해사하게 웃던 모습이 떠오른 건 왜일까.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에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그러나 긴박한 상황에서 세레나의 죽음에만 함몰되어 있을 순 없었다.
제인은 잔상처럼 떠다니는 얼굴을 머릿속에서 떨쳐 냈다.
“영주님이 많이 다치셨어요. 당장 회복마법이 필요해요. 주교님이나 단장님을 모셔 와야….”
“안 그래도 신관이 오고 있어요. 포라킨 단장은 저쪽에서 그리핀 사냥 중인 것 같은데.”
시야가 높은 미르의 눈엔 무언가가 보이는 걸까. 제인은 그녀가 턱짓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까치발을 세웠다.
쓰러진 마수와 사람들 너머로 푸른 화염이 높게 솟구치는 광경이 보인다. 쓰러진 로기아 후작을 둘러싼 병사들은 사제들을 찾아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그녀는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알리온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 * *
마지막 남은 그리핀 한 마리가 묵직하게 쓰러지며 쇳소리에 가까운 숨을 씨근덕거렸다.
집채만 한 마수가 넘어지면서 튀긴 흙탕물에 하랑의 얼굴과 몸이 온통 얼룩덜룩했다. 멀리 날아가는 그리핀 몇 마리를 보고 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전부 안 잡고 놔주시는 거예요?”
“저놈들은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이 되거든. 돌아가서 다른 무리에게 여기서 당한 일을 공유할 거다. 그럼 몇 년간은 그리핀 그림자도 안 보일걸. 후!”
그리핀에 올라탄 스캄이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 놓고는 훌쩍 바닥으로 뛰어내리면서 숨을 돌렸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뜨거운 털 위에 있을 땐 꼭 달궈진 모래를 맨발로 밟고 있는 느낌이었다.
웬만한 화기에는 깃털 하나 그을리기도 힘든 상급 마물을 연달아 통구이로 만든 상관이 새삼 괴물처럼 느껴져 그가 혀를 내둘렀다.
“대장이 이 정도로 힘을 많이 쓴 건 처음 아니우?”
“눈치챘으면 앞으로 보름은 나 찾지 마. 당분간 네가 대장 해.”
농담 같은 진담을 던지고 돌아서던 야닉이 끄트머리가 그을린 머리칼을 대강 쓸어 넘겼다.
이번에야말로 느긋하게 길러 볼까 싶었는데, 사냥 때마다 한 번씩 엉망이 되니 뒷머리를 제외하고 늘 다듬어야 하는 것이 사뭇 못마땅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증명하듯 호흡이 제법 거칠었다. 스캄의 말마따나 이번에는 스스로도 버겁다 느낄 만큼 마법을 많이 쓰기는 했다.
절제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껏 힘을 쓸 때는 좋았는데, 마지막 몇 마리를 남겨 두고는 넘칠 듯 출렁거렸던 마력이 뭉텅뭉텅 줄어드는 것이 선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상태면 이한율과 비슷하려나. 아니… 그보다 부족한가.’
살갗에 닿는 찬 바람이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것인지 가늠하려던 그의 귀에 브레고의 앓는 소리가 들어왔다.
혼자서 한 마리를 잡아 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잡긴 잡았는데 크게 다친 모양이었다.
나뒹굴던 기다란 방패에 기대앉은 브레고와 그 곁에서 회복마법을 거는 포라킨이 투덕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멍청해야 그리핀 발톱에 정면으로 긁힐 수 있는지.”
“얼굴은 전부 치료하지 마! 영광의 상처 하나쯤은 남겨 놓고 싶다고!”
“못생긴 얼굴에 험악함까지 더하면 참 보기가 좋겠네…….”
부쩍 창백해진 얼굴로 포라킨이 이맛살을 구겼다. 지팡이를 든 손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용병에겐 흉터가 경력이자 곧 명예인 법. 귀족 도련님 꼬리표를 뗄 순 없으니까 후천적으로라도 노력을… 어이, 미네. 너 괜찮냐…?”
포라킨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서서히 몸이 기울었다.
당황한 브레고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너 또 한계지? 괜찮다더니 하여간!”
“시끄러워. 한숨 자면 멀쩡해지니까… 얌전히… 데려다 놔…….”
“한숨은 무슨! 일주일은 골골대면서! 여기서 쓰러지면 어떡하냐! 야!”
제 가슴팍에 몸을 기대어 잠든 포라킨을 보고 브레고가 으아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쯧쯧…. 마력 고갈이라니. 이틀은 꼼짝없이 기절하겠군요.”
야닉의 시선을 따라 함께 지켜보던 로하겔 경이 한탄스럽게 혀를 찼다.
잔뼈가 굵은 기사와 용병들이 대부분 탈진할 정도로 수세에 밀렸던 전투였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곳곳에 즐비했다.
주군이 절반쯤 머릿수를 줄여 놓지 못했더라면…….
아찔해진 그가 파드득 몸서리를 쳤다. 아니나 다를까, 야닉의 얼굴에도 낯선 피곤함이 서려 있었다.
“영주님도 돌아오셨으니 황자님께서도 몇 달 정도는 푹 쉬십시오. 이참에 공주님과 여행을 다녀오시는 것도 괜찮고요.”
구름 사이로 밝은 햇살이 곧게 내리쬐는 광경 아래 야닉이 설핏 웃음을 머금었다.
여행. 여행이라.
시즈는 무난하게 황좌를 찬탈했고 맑게 갠 날에 전쟁은 끝이 났다.
사랑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데다 아크만의 영주 또한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비로소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야. 이참에 로엘에 들렸다가 배를 타고 아이노스에 가 볼까.”
새로운 나라와 이국적인 풍경을 제인에게 보여 줄 생각을 하니 단숨에 기대감이 차오른다. 어쩌면 눈 내리는 영지를 바라보던 그 예쁜 눈망울을 다시 볼 수 있겠지.
“아.”
야닉은 이윽고 탄식 같은 한숨을 흘렸다. 아직 큰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전에 델피온의 낡은 성을 먼저 보여 주게 생겼군. 휴가는 조금 미뤄야겠어.”
“델피온을 침공한다는 게 진심이셨습니까?”
로하겔 경이 즉각 펄쩍 뛰었다.
이혼하러 가던 길에 야닉이 왕도를 유심히 살피던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저 단순한 감상에 그친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크만보다는 좀 더 따뜻한가? 건물들이 전부 노후화됐군.’ 따위를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주군은 함락시킬 수 있는 땅인지,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영토인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어쩐지 자부심으로 뻐근해지는 가슴께를 느끼며 질문을 이어 가려던 찰나, 야닉이 성벽 쪽을 보더니 돌연 눈매를 날카롭게 좁혔다.
“후작에게 이상이 생긴 모양인데.”
벌써 저만치 멀어진 야닉에 멀거니 서 있던 부관들이 뒤늦게 진 땅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쓰러진 로기아 후작의 주위로 사제들과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생각보다 심각한 부상에 출혈 부위를 압박하던 천을 거두고 알리온이 급하게 신성력을 끌어모아 회복마법을 걸고 있었다.
모여 있던 기사들이 야닉을 보고 재빨리 길을 터 주자 그를 발견한 제인이 벌떡 일어났다.
“야닉!”
“당신은 괜찮아?”
파르르 떠는 제인을 보고 야닉이 강박적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마력이 부족해서 떠는 것이 아니기에 그녀는 손을 끌어내리며 도리질했다.
“난 멀쩡해. 그보다 영주님이…….”
그는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희멀건 낯으로 누워 있는 로기아 후작에게 신중히 다가갔다.
회복마법에 집중하고 있는 알리온의 안색 역시 좋지가 않았다.
“심각한 겁니까?”
“위치가 좋질 않군요. 상처가 조금 더 위였다면 심장을 베였을 겁니다.”
왼쪽 가슴 바로 아래에서 초록빛이 끊임없이 스며들었다.
포라킨보다도 훨씬 더 강한 신성력을 지닌 알리온이건만, 상태를 보아하니 그도 한계에 다다른 듯싶었다.
로기아 후작을 붙잡고 있던 사제들 역시 안절부절못하고 알리온을 만류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주교님께서도 위험해지십니다! 피는 거의 멎었으니까 이제 저희가 맡겠습니다.”
신도들이 말하는 신성력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지닌 마력을 굳이 신성력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사제들만이 치유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특권을 가지기 위해.
즉, 권력을 위해서였다.
치유마법을 터득하는 방법은 마물 전쟁 이후에 교회에서 폐쇄적으로 관리하며 독점해 왔다.
10여 년간 독실한 사제 생활을 해야만 신성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들의 계략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권력자가 제 발로 찾아와 신에게 무릎을 꿇게 만들려는 목적.
이방인이 아니고서야 타고난 마나가 많은 사람은 드물었다. 대륙 전역에 마법사가 넘쳐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고, 덕분에 치유마법을 사용하는 이는 더욱 소수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아직입니다.”
알리온의 이마에 맺힌 땀이 무고한 사람들이 흘린 피처럼 뜨거웠다.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들은 영주뿐만이 아니라 무수히도 많았고 그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포라킨과 자신, 단둘뿐이었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이란 말인가. 그의 눈동자에 찰나의 회한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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