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40화 (14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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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검을 놓고 살았던 벌을… 이제야 받는군요.”

힘겹게 중얼거리던 후작이 가슴이 들썩이도록 마른기침을 토해 냈다. 컥컥거릴 때마다 목구멍으로 역류한 피가 튀어 올랐다.

제인은 사제들에게 둘러싸인 로기아 후작을 걱정스럽게 보다가 야닉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제 이한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에 스며든 갈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한율을 원래 세계로 보내기로 약속한 걸 떠올린 것인지도 모른다.

황명을 거역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것도 모자라, 영주를 시해하려던 죄는 마땅히 죽음으로 책임을 물어야 했다.

제인은 불안한 심정으로 그의 옆얼굴을 살폈다.

그가 이 자리에서 당장 이한율의 목숨을 거둔다 해도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한율을 제압한 기사들과 지켜보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렇게 해 주길 바란다는 눈치였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로마에 왔으니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판단한 제인은 힘주어 걸으며 야닉의 곁에 다가섰다.

“약속은 신경 쓰지 마. 죄인은 원칙대로 처리하는 게 맞아.”

“……제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와 표정에는 그래도 괜찮겠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확고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했다. 이어지는 말에 쏟아지는 시선들이 따가울 정도로 느껴졌다. 자신이 무어라 말할지 궁금해하는 기색들이었다.

“과거에 동료였다고 해서 봐줄 순 없어. 당연히 죗값을 치러야지.”

동료와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겐 이한율이 원래 세계로 가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처벌이겠지.

“난 괜찮아. 정말로.”

제인은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단호한 음성으로 제 뜻을 전했다. 오히려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면죄부로 삼아선 안 된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도 바르게 살아온 사람이 훨씬 더 많으니까.

동정심 또한 가질 필요가 없다. 가해자가 죄책감을 느끼질 않는데 감정이입이라니,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란 말인가.

측은함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자신 역시도 피해자라는 사실 역시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가타부타한 이유를 차치하더라도, 솜방망이 같은 처벌로 인해 야닉이 비난을 받는 일만은 결단코 없어야 했다. 사실 이게 가장 큰 요소였다.

엄지로 아랫입술을 문지르며 고민하던 야닉이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는 습관처럼 제인의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걸어 넘기면서 눈을 맞췄다. 그 보드라운 손길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찔거렸다.

“목숨은 살려서 돌려보내되, 대가는 이곳에 남겨 두어야겠어.”

잔잔히 통보한 그가 손을 거두고 몸을 돌리더니 성큼성큼 멀어졌다.

“그대가 내게 주었던 선택지를 되돌려 주지.”

몰매를 당해 부어오른 눈으로도 여전히 적개심을 내비치는 이한율에게 그가 메마른 어조로 제안을 건넸다.

“첫째. 사지가 전부 잘린 채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 둘째. 성벽에 거꾸로 매달려 7일간 살아남아 사면을 받는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음산히 속삭였다.

“참고로 두 번째 선택지에서 살아남은 자는 없었어. 대부분 하루도 못 가서 와이번에게 뜯어먹혔거든.”

“…….”

이한율의 귓가에 피식거리는 주위의 비웃음이 새어 들어왔다. 죽음을 피하려면 불구를 감수하라는 이야기였다.

어느 것 하나 평온한 결말은 없었다. 그러나 절망만이 남아야 할 그의 얼굴엔 어쩐지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다른 용병단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뭐라더라. ‘신의 판결’이랬나?”

잇새를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감출 생각도 않고 그가 큭큭거렸다.

“검으로 겨뤄서 승리하면 위대한 신이 내 결백을 증명한다더라고. 어쩌겠어? 해야지. 나는 신의 판결을 요청한다!”

이한율이 큰 소리로 외쳤다. 동시에 기사들의 반발이 솟구쳤다.

“어림도 없는 소리! 신의 판결은 명확하지 않은 죄에만 해당된다!”

“이 자식이 어디서 잔머리를 굴려!”

그러나 사제들 사이에선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죄인이 신의 판결을 요구하면 응해야 합니다. 모든 죽음엔 그분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법으로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진 현장에선 이한율을 즉결처분해야 한다는 노성과 요청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대립각을 세웠다.

“죄인에게 검을 건네라. 마지막 소원이라니 들어주어야지.”

“황자님!”

기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닉은 손수 바스타드 소드를 뽑았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훅 끼쳤다. 그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강렬하게 경종을 울려댔다.

본능적으로 튀어 나가던 몸이 누군가에게 제지를 당하고 꽉 붙들렸다. 스캄이었다.

“놔둬. 이게 더 이한율을 편하게 보내 줄 수 있을 거야.”

“아니요. 그게 아니라, 나는 야닉이…….”

왈칵 눈살을 구기는 제인을 보더니 스캄이 샐쭉 장난스럽게 웃었다.

“대장은 힘이 생기기 전부터 이미 빼어난 검사였어. 공주님이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야닉이 초심자를 상대로 질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종류의 불안함이었다.

“조금이라도 허튼짓하면 바로 제압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랑 역시 검을 들고 앞을 막아섰다.

그의 부관들은 하나같이 기대감에 부푼 얼굴이었다. 자신을 철옹성처럼 둘러싸고 보호할 준비가 되었다는 그들 앞에서 제인은 혼란스러움에 잠겼다.

정말로 이한율이 편하게 죽기 위해 결투를 신청한 걸까? 그랬다면 차라리 붙잡힌 시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은 원래도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지만 섬찟한 위화감은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주교님!”

로기아 후작을 치료하던 알리온이 기어이 휘청거렸다. 그 광경을 목격한 제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하랑에게 물었다.

“단장, 단장님은 어디 있어요…?”

“마력이 고갈돼서 브레고 경이 업고 갔어요. 푹 쉬면 괜찮으실 거예요.”

그 말에 두방망이질 치던 심장이 더욱 거세게 요동쳤다.

사제들이 알리온을 살피는 소리와 다른 한쪽에선 결투를 알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따갑게 귀를 찔러 댔다.

“신께서 결투를 지켜보시고 종내엔 무고한 자의 손을 들어줄 것입니다. 죄인이 이긴다면 모든 죄를 사할지니 결과에는 어떠한 불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맹세하십시오.”

“야닉 리버스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

미르와 스캄의 커다란 덩치에 가려져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제인이 두 사람 틈을 비집고 나서자 미르가 곧장 막아섰다.

“안 보는 게 나아요, 공주님.”

“비켜 줘요. 말려야 해요. 결투는 꼭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잖아요. 적어도 단장님이 계실 때…….”

척척, 물기 어린 땅을 밟는 소리가 나더니 곧 속도가 붙었다.

서 있는 사람을 향해 누군가가 달려드는 소리였다. 그러더니 금방 날붙이 두 개가 날카롭게 부딪치고 누군가 크게 고꾸라졌다.

미르가 눈을 돌린 사이, 제인은 앞으로 나와 태연히 서 있는 야닉과 넘어진 이한율을 보았다.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건 당연하게도 이한율이었다.

바닥을 짚고 일어선 자리에 핏물이 고였다. 이한율은 고통을 잊은 사람처럼 일어서더니 검을 고쳐 쥐었다.

형편없이 떨리는 손과 다리에도 그는 웃고 있었다. 안 돼. 막아야 해.

모두의 시선이 이한율에게 집중되었을 때 제인은 활을 들었다. 그녀를 발견한 공허한 눈이 찰나의 빛을 머금었다.

“주임님……. 저랑 같이 가요.”

야닉을 앞에 두고도 이한율은 제인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가 손바닥을 편 동시에 제인이 팽팽했던 시위에서 손을 놓았다.

“커헉!”

날아간 화살이 이한율의 심장에 꽂힌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제인 앞에 투명한 막이 빠르게 드리워졌다.

“제인!”

실드를 전개한 야닉이 그녀를 살피려 휙 몸을 돌렸다.

“내가 아니야!”

활을 떨어뜨린 제인은 제 앞을 막아선 두꺼운 보호막을 두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녀의 눈동자에 허공에 떠 있는 날카로운 액체가 비쳤다.

이한율이 노린 것은 처음부터 제가 아니었다. 희미하게 웃던 이한율이 마지막으로 바라본 쪽은 야닉이 서 있는 곳이었다.

“뒤를 봐!”

제인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무자비한 응징의 칼날들이 이한율의 몸에 박히고, 피를 토해 내던 그가 최후의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방향을 전환한 물줄기가 야닉의 등을 묵직하게 할퀴고 떨어졌다. 그 모습이 제인의 눈에는 아주 천천히 보였다.

“황자비를 보호……하.”

거칠게 소리치던 야닉이 문득 등줄기를 가르고 파고드는 감각에 전율하듯 움찔거렸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그가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얼굴을 굳혔다가 등에서 선연히 느껴지는 통증에 왈칵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윽고 발아래로 붉은 피가 흩뿌려지더니 강철같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제기랄! 대장!”

“황자님!”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사고가 정지하고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무너진 실드 밖으로 모든 이가 자신을 제치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야닉?”

찰나의 순간 얼어붙었던 발이 저도 모르게 앞으로 움직였다.

야닉이 방금까지 저기 서 있었는데, 인파에 파묻혀 그가 보이질 않았다. 멍하니 걷던 발이 점점 빨라졌다.

그럴 리 없어. 내가 잘못 본 걸 거야.

얼마 가지도 못하고 힘이 풀려 엎어진 손바닥에 차가운 땅바닥이 닿았다. 삽시간에 주위가 고요해지고 모든 소음이 바람이 내는 공명처럼 뭉그러졌다.

“…임! 공주님! 제인!”

누군가에게 붙들려 일으켜 세워지자 먹먹했던 귓가가 한꺼번에 꿰뚫렸다.

“제인! 정신 차려!”

“미르.”

눈만 껌뻑이던 제인이 홀린 듯이 미르의 손을 밀어냈다.

“아니야…….”

내가 헛것을 본 거겠지. 그가 다치다니…. 말도 안 돼.

그녀는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리며 사람들의 등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다급한 외침이 선명해졌다.

“당장 신관을 데려와!”

“주교님도 한계예요! 지혈부터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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