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41화 (14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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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려든 사람들 사이로 쓰러진 누군가의 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

제인은 그의 발치에 꿇어앉아 천천히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 뒤늦게 제인을 발견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인파가 갈라진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야닉의 등을 누르고 있는 얼룩덜룩한 손들이 보였다.

사제들의 손을 흥건히 적신 것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그의 피였다. 사선으로 길게 찢어진 옷자락이 빠른 속도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닿으면 해가 될까 봐 차마 만질 수조차 없어서 그녀는 망연히 주저앉았다. 뒤늦게 목이 아프도록 꽉 조여들고 숨이 턱 막혔다.

벌벌 떨리는 제인의 손등 위로 뜨거운 손이 닿았다. 그녀는 익숙한 온기를 따라 스르륵 시선을 돌렸다.

“다친 곳은… 없어?”

“아, 아…. 어떡해…….”

토막 난 호흡에 울음이 섞여들어 가슴이 들썩였다. 그런 자신을 다독이는 것처럼 야닉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 얕은수에 넘어갈 줄이야…….”

“괜찮, 괜찮을 거야. 별로 심각한 건 아니니까…….”

그의 손을 움켜쥐곤 제인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경련이 이는 입매를 연신 끌어올리면서 잡은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주교님이 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거야. 그래. 맞아. 걱정할 필요 없어.”

누군가에게 업혀 온 알리온을 보면서도 그녀는 강박적으로 뇌까렸다.

야닉은 무어라 입을 열었다가 그것마저도 힘에 부치는지 입술을 감쳐물었다. 잇새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고 있었다.

“빨리 피부터 멈추게 해 봐!”

벌떡 일어난 다위가 성마르게 노인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사제들이 물러난 곳에 자리를 잡은 알리온은 힘겨운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가느다란 손이 상처 위에 올라갔다.

곧이어 희미한 녹색 빛이 제인의 눈동자에 콱 박혀 들었다. 그간 봐 왔던 알리온의 힘이 부쩍 줄어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급격히 창백해진 야닉의 얼굴과 상처 부위를 불안하게 번갈아 보던 그녀는 점차 사그라지는 마법에 초점을 고정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주문을 외듯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여기까지가…….”

알리온이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안 돼요. 지금 쓰러지시면 안 돼요! 아직도 피가 많이 나요. 주교님. 제발요. 일어나 보세요. 제발, 제발요…!”

제인은 그의 어깨를 잡고 미친 사람처럼 마구 흔들었다.

“저 이 사람 없으면 안 돼요. 일어나서 치료 좀 해 주세요. 주교님, 제발 부탁드려요.”

“주교님도 쓰러지셨어요! 그만 하세요! 저희가 누를게요!”

병동에서 본 적이 있는 사제가 드세게 제인을 밀어 내더니 마법이 사라진 자리에 천을 밀어 넣었다.

멀거니 내동댕이쳐진 황자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제가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소리쳤다.

“지혈제는 아직인가요?”

“조금 전에 다 떨어졌어요. 다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마지막 남은 광목천을 가지고 온 보급 담당 부제가 울먹거렸다.

제국군 사이에서 치료마법을 쓸 수 있는 자를 찾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나 누구도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 사이에 음울한 기색이 짙어졌다. 이는 곧 상황이 안 좋은 쪽으로 흐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을 따라 연방 두리번거리던 제인은 퍼뜩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기어갔다. 차가운 바닥에 엎드린 야닉의 얼굴이 갑자기 낯설었다.

“야닉, 일어나. 눈 좀 떠 봐…….”

“…….”

가빴던 그의 호흡이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었다.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감고 있던 속눈썹도 잘게 떨려 왔다.

희미하게 열린 눈동자는 언제나 그랬듯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금색이었다. 어느덧 주위는 조용해지고 깊게 가라앉은 고요가 이들을 둘러쌌다.

누구도 입을 열진 않았지만 그들은 전부 끝을 예감하고 있었다. 어깨부터 반대쪽 허리까지 길고 깊게 그어진 상흔에선 이미 너무 많은 피가 흐른 뒤였다.

충격과 참담함으로 얼룩진 이들에게선 더는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제인은 이제 야닉에게 절박하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나 너 없으면 못 살아…. 그러니까 포기하면 안 돼. 응? 야닉. 이러지 마…. 나 혼자 두고 가지 마. 응?”

야닉은 자꾸만 감기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한참이나 숨을 고른 그가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약속까지 해 놓고 미안해…. 나도 이렇게… 빨리 죽을 줄은 몰랐는데…….”

[당신이 외로웠던 시간보다 더 많은 날을 기쁨으로 채워 줄게.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평생 사랑할 거야.]

그가 야트막하게 웃었다.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는지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팔을 들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그를 대신해서 제인은 손바닥에 젖은 뺨을 비볐다.

“내 가족이 되겠다고 했잖아. 너 없으면 난 또 혼자가 된단 말이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 봐. 날 위해서라도 버텨 줘. 제발…….”

“제인. 내 아내…. 그대를 사랑해. 영원히… 사랑할 거야.”

“싫어. 인사하지 마. 그러지 마. 마지막인 것처럼 말하지 마!”

발작적으로 소리치던 그녀가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다급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귀환석을 쥔 손이 형편없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본 야닉이 마지막이 될 그녀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돌아가…. 당신 세계로 돌아가서 다 잊고… 새롭게 살아. 그대는… 할 수 있어.”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릴 듯 말 듯 한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는 사그라지는 불씨처럼 서서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팔린.’ 황급히 주문을 외고 더욱 밝게 빛나는 돌을 보며 제인이 조급하게 속삭였다.

“반드시 살아야 해. 내가 데리러 갈 때까지 무조건 살아 있어야 해. 알았지?”

모험이래도 어쩔 수 없다. 그를 살릴 수만 있다면 어떤 무모한 짓이라도 불사해야만 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희망을 전부 걸어 보는 수밖에.

갈록이 사라졌던 장면을 떠올리며 제인은 그의 손에 귀환석을 밀어 넣고 몸을 물렸다.

“다들 손 떼세요.”

위압감마저 느껴지는 음성에 상처를 누르던 사제들이 흠칫해서 물러났다.

불안하게 지켜보던 그들의 눈에도, 도박 같은 결정을 내린 제인의 눈에도 점차 투명해지는 야닉이 보였다.

차라리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했다.

눈을 뜨면 내 방의 형광등이 보이고, 티비에선 뉴스가 흘러나오던 그때로.

여느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출근 준비를 하고 회사에 나가 사무실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책상 앞에 앉았던 순간으로.

이한율은 그저 직장 동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바로 그 날로.

‘야닉 리버스’라는 사람은 까맣게 몰랐던 그때 그 시절로.

평범하게 우울했던 한 주임인 채로 그렇게 살았으면 지금 같은 절망은 없었을 텐데.

닦아 내도 쉼 없이 눈물이 흐르던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땐, 거짓말처럼 그가 사라지고 없었다.

제인은 허리를 굽혀 핏자국만 흥건한 바닥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야닉……?”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 그 사람이 여기 있었는데. 분명히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제인은 미지근한 온기가 남아 있는 땅을 한참이나 매만졌다.

보다 못한 미르가 달려와 몸을 일으켜 세울 때까지 그녀는 야닉이 누워 있던 자리를 기어 다녔다.

“이제 그만해요! 황자님은 벌써 갔다고!”

“…….”

제 손으로 귀환석을 사용했음에도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제인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당연하게도 잡히는 것은 없었다.

갔다. 정말로 그가… 사라져 버렸다.

“미르. 나… 말을 못 했어. 나도 사랑한다고… 말도 못 하고 보냈어…….”

“다시 만나면 하면 되죠. 꼭 만날 수 있을 거야.”

등을 감싸는 손길에 억눌렸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제인은 미르의 옷깃을 붙잡고 비참한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참담한 심경으로 지켜보던 이들 역시 숨죽여 울거나 고개를 돌려버렸다.

먹구름이 말끔히 걷힌 아크만에는 전에 없을 정도로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었지만, 그 누구의 마음속에도 볕 한점 들지 못했다.

“이봐, 잠깐. 놈을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싸늘해진 주검을 말 위에 싣고 있던 병사가 어깨를 잡아 세우는 손길에 여상히 고개를 돌렸다.

멋대로 이한율의 몸에서 검과 화살을 뽑아 버린 병사를 본 로하겔 경의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런데 병사의 열린 입에선 뜻밖에도 어린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자는 신성한 산을 망가뜨렸어. 이제부터는 우리의 몫이야.」

병사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건틀릿을 붙잡아 거리낌 없이 끌어내렸다.

엄청난 악력에 휘청이던 로하겔 경이 우그러진 자신의 쇠 장갑을 어안이 벙벙해서 내려다보았다.

“페어리들이 데려가서 복수하려는 거야. 가만 놔둬.”

어느샌가 다가온 다위가 혀를 차며 그를 만류했다. 망가진 건틀릿을 벗어 낸 로하겔 경이 욱신거리는 손을 매만졌다.

“이미 심장에 화살이 박혀서 죽었는데 복수라뇨?”

“육신이 죽었어도 혼은 한동안 남아 있지. 이때 안식을 허락받지 못한 놈들이 바로 구울이 되는 거고.”

“그럼 이한율도 구울이 되는 겁니까?”

쓸데없는 광경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안면을 구긴 다위가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저놈에겐 차라리 그게 나을 거다. 자아를 잃고 썩은 몸으로 헤매는 것보다도 더 큰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하나둘 흩어지는 인파 사이로 아직도 오열하는 제인이 보인다. 다위는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믿었던 동료가 배신하는 것쯤이야 놀라운 일도 아니다.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놈들은 또 어떻고.

그런 놈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런 흔하디흔한 일 따위, 여기선 발에 챌 정도로 많다.

저기 서서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우는 이방인 역시 그중에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단지 그뿐이건만.

[네! 감사합니다!]

검 한 자루 보강해 준다는 말에 환하게 웃던 얼굴이 불현듯 떠올라 못내 신경을 긁어 댔다.

“……빌어먹을 노란 눈깔 녀석. 허구한 날 잘난 척만 하더니 꼴좋다.”

보란 듯이 가래침을 카악, 퉤! 뱉은 다위가 투구를 벗더니 거칠게 집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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