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율을 태운 말이 검은 숲으로 들어섰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찰박거리면서 지나갈 때마다 가시덩굴과 수풀이 좌우로 갈라져 길이 생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자리에 가만히 멈춘 말이 엉덩이를 내리더니 등에 태운 이를 흔들어 떨어뜨렸다.
고작 몇 시간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도 신체는 제법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낙하한 주위로 아이들의 맨발이 서서히 다가왔다.
「일어나.」
페어리의 말에 이한율이 번쩍 눈을 떴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주임님이 쏜 화살을 맞고 죽었는데…….’
「그래. 네 육신은 죽었지. 뒤를 봐봐.」
앉아 있던 이한율이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눈도 감지 못한 채 파랗게 식어 있는 제 얼굴이 보였다.
‘아……. 누가 봐도 시체네.’
「놀라지는 않는구나.」
‘별로. 이렇게 될 걸 예상 못 한 건 아니었으니까.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이한율은 담담히 물었다. 빌어먹을 황자도 처리했겠다, 평생 소원이던 한송이의 손에 죽기까지 했으니 다른 여한은 없었다.
페어리들은 까르르 웃다가 동시에 뚝 웃음을 그쳤다.
「망자의 육신 안에 혼을 가두고 몸을 불태울 거야. 네가 망가뜨린 산이 전부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몸이 잿더미가 되면 우리가 다시 원래대로 만들어서 태우고, 또 태울 거야.」
「아주아주 고통스럽겠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한 아이가 손가락을 딱! 부딪치자 튕겨 나왔던 혼이 차디찬 육신으로 빠르게 되돌아갔다.
‘뭐라고?’
몸 안에 갇힌 이한율이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발작 같은 비명을 질렀다. 손끝에서부터 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전신을 덮쳐 왔다.
‘크아아악!’
이한율은 불이 붙은 제 신체를 보고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이미 죽어 버린 몸뚱어리는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 활활 타오르기만 할 뿐이었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닌데 산 채로 태워지는 격통이 그를 휘감았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 대도 목소리가 나오는 일 따위는 없었다.
살갗이 타들어 가고 검은 연기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육체 속에서 이한율은 정신을 잃지도 못하고 끔찍하게 생생한 고문을 겪어야 했다.
‘그만! 제발! 내가 잘못했어!’
그가 울부짖었지만 아이들의 오색 눈동자에 비친 불꽃은 오히려 부피를 점점 키워 갔다.
모든 수분이 증발한 피부가 까맣게 우그러들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지옥 불은 사람의 형태만 겨우 유지한 신체가 숯덩이가 될 때까지 이어졌다.
불티가 잔열에 탁탁 튀어 오를 때쯤, 그의 혼이 다시 바깥으로 끌려 나왔다.
‘하악! 하! 끄으으…….’
여전히 불길 속에 내던져진 고통에 휩싸여 헐떡이는 그를 페어리들이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이제 겨우 한 번인걸.」
「백 년이라고 했잖아.」
‘……뭐?’
이한율이 제대로 알아듣기도 전에 한 아이가 까만 인영 위로 맑은 물을 쏟아부었다.
커다란 잎사귀에 고여 있던 물이 주검 위로 흐르더니, 닿은 자리부터 신체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혈관과 근육이 자라난 위로 붉은 피부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가 고통도 잊은 채 망연히 제 몸을 관망했다.
‘그런 식이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는 건가?’
언뜻 스치는 생각으로 중얼거린 말에 페어리가 코웃음을 쳤다.
「치유의 샘은 생명까진 살리진 못해.」
「죽음 뒤에 남은 육신만 돌아오는 거야.」
찰나의 기대감이 바스러졌다. 허무하게 주저앉은 그가 또다시 시작될 화형식을 앞두고 공포심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에겐 그야말로 절망만이 남아 있었다.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사위를 돌아보던 이한율이 무기력하게 중얼거렸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한 주임님은 분명히 날 좋아한다고 그랬거든.’
그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것 같더라고. 주임님이 거짓말을 할 분은 아닌데, 무슨 조종 같은 걸 당한 건가…?’
「백 년 뒤에 알려 줄게!」
「그때까지 네가 제정신을 유지한다면 말이야!」
놀리듯이 깔깔대는 아이들을 보고 이한율이 미간을 좁혔다.
‘너희한테 물어본 게 아닌데.’
그가 손짓한 방향엔 하얗게 입김을 뿜으며 웃고 있는 양치기가 있었다.
「캬아악!」
아이들의 얼굴이 단박에 험악하게 일그러지더니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적인 소리를 내질렀다.
양치기는 페어리의 경고에도 크게 입을 벌려 웃고 있었다.
- 이한율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래. 맞아. 어서 날 양으로 만들어.’
그가 벌떡 일어나 희열에 찬 얼굴로 종용했다.
「이 인간은 우리 거야!」
「저리 썩 꺼져! 이 괴물아!」
- 나는… 질문에…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가로채는 건 용납 못 해!」
아이들이 이한율의 앞을 막아서서 이빨과 손톱을 뾰족하게 세우고 짐승처럼 그르렁거렸다. 양치기는 그들을 짜증스럽게 바라보면서도 답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제인… 리버스는… 요정의 현혹에 걸려 있었다…. 제인 리버스의… 의지는 없었으므로 기억 또한 없다…….
그러고는 지팡이를 들지 않은 반대쪽 손바닥을 내밀더니 손가락을 하나씩 구부렸다. 기다랗게 자란 손톱이 까딱까딱 움직이자 이한율의 육체가 공중에서 들썩거렸다.
페어리와 양치기가 그의 몸을 서로 가지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한율은 제 몸이 팽팽하게 당겨지든 말든, 허공만 바라보며 그저 허무하게 웃었다.
‘…어쩐지. 그랬을 것 같더라. 그냥 내 마음대로 믿고 싶었나 봐.’
- 몸은… 어쩔 수 없나…….
거센 저항에 기다란 한숨을 내쉰 양치기가 이번엔 손바닥을 아래로 뒤집었다. 그러자 이한율의 혼이 흡수되는 것처럼 빨려 들어가더니 늙은 양 한 마리가 어린 양으로 바뀌었다.
- 영혼만 담아 간다……. 먼 훗날 네가… 돌아갈 차례가 되어도… 요정들이 네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 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돌아선 양치기에게 이한율이 무어라 입을 열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메에에, 하는 소리로 아스라이 울릴 뿐이었다.
유일하게 알아들은 양치기가 고개를 돌려 이한율의 육신을 찬찬히 관찰했다.
- 그렇군…. 망각이 시작된 거야…….
재생된 몸 주위로 흥건한 물을 발견한 그가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 요정들은 남은 네 몸을 계속해서 태우고… 재생하는 일을 반복하겠지…. 그러나 양이 된 네게… 내가 대답해야 할… 의무는 없다….
어린양이 한 번 더 울었으나 양치기는 이번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양치기는 늘 그랬듯이 무리를 이끌고 안개 속으로 스며들어 이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한참을 경계하던 페어리들은 이한율의 육신을 자신들의 동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울퉁불퉁한 지면 위로 아무렇게나 끌려가던 몸이 어느 한 자리에 멈추고, 그 위에 다시 한번 화염이 솟구쳐올랐다. 혼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분풀이였다.
「백 년이 아니라 천 년간 불태워 줄 거야!」
처참하게 그을린 위로 또다시 치유의 샘, 다른 말로는 망각의 샘이 끼얹어졌다.
이한율의 몸도, 페어리도, 양치기도 모두 떠난 자리엔 웬 발가벗은 노인만이 홀로 주저앉아 어리둥절한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 * *
[제발 그만해! 넌 날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냥 오래된 집착일 뿐이야.]
세뇌를 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임님이 할 리가 없었다.
야닉 리버스. 그 자식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이고 싶었는데 갑자기 양이 되어 버린 바람에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
언제 취발론으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답지 않은 실수를 한 것이 분명했다.
사람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가능하면 주임님이 살아 있을 때였으면 좋겠는데.
가만, 다른 양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면 인간으로 돌아갈 다음 차례는 곧장 내가 되는 거 아닌가.
고개를 돌려 보니 온통 늙고 약해 보이는 양들뿐이다. 양치기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나머지 양들을 처리할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처음엔 혼란스러웠는데 환상을 본 후로 확신이 들었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은 황자가 아니야. 처음부터 너였어.]
믿을 수가 없었다. 주임님이 날 좋아하고 있었다니.
기나긴 기다림 끝에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에 그만 방심을 했나 보다. 내리막길에서 실수로 구른 뒤 눈을 떠보니 양이 되어 있었다. 아. 어떡하지.
[한율 씨도 싸웠어? 관사로 모이라는 것 같던데, 가 봐.]
최근 들어 주임님의 태도가 눈에 띄게 냉랭해졌다. 부쩍 3황자와 가까워진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조금 더 힘을 키워야겠다. 언젠가 3황자와 싸우게 될지도 모르니까…….
[이제부터는 제가 전부 상대할게요. 마지막까지 전부 다요.]
여우 주제에 주임님의 보살핌을 받다니.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었다.
우리 조가 아무도 다치지 않으면 아무도 주임님을 귀찮게 굴지 못하겠지. 뽑기를 조작한 3황자가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다.
[한율 씨 마음은 고마운데, 황자님은 내가 여기서 차별당할까 봐 배려해 준 거야. 황족의 연인이면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진 못할 테니까….]
주임님이 마력이 없다니, 낭패였다. 황자 대신 내가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만 아직 그건 좀 부담스러우시겠지.
[시간이라도 멈춘 거예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사무실의 문이 꿈쩍도 하지 않더니, 눈앞이 번쩍였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한 숲속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긴장은 크게 안 되고요. 평소에 훈련하던 대로 임하면 올림픽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지 않을까….]
한송이(16. 한선고). 자막에 뜬 이름을 수도 없이 가슴속에 새겨 넣었다.
내 생명의 은인. 그런데 왜 갑자기 은퇴를 했을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경찰이 꼭 잡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한율아.]
범인을 잡았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수술을 받지 못한 채로 죽어 버린 것 같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세계에서 나는 양이 되어 있었다. 의외긴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 더는 몸이 아프지 않을 테니까.
“메에.”
주위를 둘러보니 양들밖에 없다. 입을 열었더니 저들과 똑같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렇구나. 나는 양이구나.
뭔가를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이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