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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뚝배기 위로 김이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코끝이 축축해지도록 냄새를 맡는 양승원을 보고 마취과 최 교수가 혀를 찼다.
“그 판타지 월드에 순댓국은 없었나 보다?”
“술 마시고 헛소리한 거라니까. 하뜨뜨.”
성급하게 국물을 떠먹던 양승원이 곧바로 찬물을 들이켰다. 최 교수가 빈 잔에 다시 물을 채워 주며 팔짱을 꼈다.
“너 원래부터 한식 별로 안 좋아했잖아. 금수저 티 팍팍 내면서 파스타만 먹던 놈이 진짜 이상하네.”
“어……. 어릴 때 종종 아버지랑 왔었어. 혼자서도 가끔 왔고.”
“이런 거 보면 멀쩡한데 말이야. 너 어디 가서 그 레비탄인지, 구공탄인지 소환당했다는 이상한 얘기는 하지 마라. 한국대 병원 이사장 막내아들 조현병이라고 소문난다.”
뽀얀 국물에 밥을 말던 양승원이 문득 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 남짓한 시간, 매일 아침 고층 아파트에서 눈을 뜨면서도 그는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사실은 큰 사고를 당해서 지난 4년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 게 아닐까? 레비탄 제국이나 아크만 요새는 전부 무의식중에 꾼 꿈이고, 코마가 만들어 낸 환상 같은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서재 서랍을 열면 아크만에서 가져온 양피지 일기장이 떡하니 그를 반겼다. 양승원은 일어나자마자 습관처럼 양피지 꾸러미를 확인하는 것이 요즘 일과였다.
‘사용한 귀환석은 사라졌지만 다른 물건들은 전부 가져올 수 있었지.’
게다가 태어난 곳으로 좌표가 찍힐 거란 예상도 적중했다.
양승원의 피를 나눈 이방인들은 모두 한국대 병원으로 돌아왔다. 정확히는 십수 년 전엔 분만실이었을 내과 당직실이었다.
각자 다른 시간대에 행방불명되었던 이들이 돌연 여기저기서 나타난 사건은 뉴스에 나올 법할 일이었지만, 이방인들은 사전에 모의한 대로 조용히 흩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눈앞의 최 교수처럼 망상증 환자로 여기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였다.
양승원도 처음에는 소환당했던 이야기를 했다가 나중에는 그냥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둘러댔다.
납치와 감금의 의혹을 뒤로하고 정신과 치료와 심리상담, 나중엔 최면 치료까지 받았던 그로선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환자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굳이 다른 세계로 끌려갔다는 주장을 이어 갈 이유는 없었다. 그건 아마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의대 동기이자 20년 지기 최 교수 역시 아직까지 저를 치료가 필요한 환자 보듯이 보고 있었다. 그러니 별수 있나, 모르쇠로 일관할 수밖에.
“나 다음 달부터 병원 나간다.”
양승원이 여상히 통보하고는 새빨간 깍두기를 집어 먹었다.
“전문의 다시 따야 되는 건 아니고?”
반쯤은 진심인 것 같은 농담에 그가 젓가락으로 때리는 시늉을 하려다 멈칫했다. 최 교수가 손을 들어서 막더니 바지 주머니 안에서 징징 울리는 휴대전화를 꺼내고 있었다.
“야, 야. 잠깐만. ER.”
응급실에서 걸려 온 전화에 양승원이 자연히 손을 내려놓았다.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맞은편까지 들리는 듯했다.
심각한 얼굴로 ‘어, 어.’만 반복하던 최 교수가 벌떡 일어나더니 패딩 점퍼를 주워 입기 시작했다.
“아직 병원 앞이야. 5분… 아니, 7분이면 들어가.”
“환자?”
“어, 양 교수. 미안하다. 밥은 다음에 먹자.”
“마취과 당직 없어?”
“걔가 전화한 거야. 바이탈 안 잡히고 산소포화도 60이란다. 전공 1년 차한테 어떻게 맡겨.”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걸친 최 교수가 허둥지둥 밖으로 뛰쳐나갔다.
“심각하네…….”
교통사고 환자라도 들어온 건가 생각하다가 문득, ‘구급차 소리가 들렸던가?’ 그가 애매한 기억을 더듬었다.
멀거니 그의 뒷모습을 보던 양승원이 이내 입맛을 다시면서 그의 몫이었던 뚝배기 그릇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최 교수 말마따나 한식은 그다지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유년기를 외국에서 보낸 탓에 쌀밥보다는 치즈버거가 익숙했던 스스로가 신기할 정도였다.
칼칼한 양념을 풀어 두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그가 계산을 마치고 막 식당 문을 나서려는데, 테이블을 정리하던 직원이 그를 불러 세웠다.
“이거 일행분 짐 아니에요?”
최 교수가 앉았던 자리에 종이 쇼핑백 하나가 남겨진 모양이었다. 그것을 건네받은 양승원이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밖으로 나왔다.
11월의 찬바람이 한차례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정신머리 하고는, 어휴.”
빨랫감이 든 쇼핑백을 들고 고개를 들자 언덕길 끄트머리로 빨간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온다. 터벅터벅 걸어 올라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땐 늘 그랬듯 응급실의 분주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냥 최 교수 방에 갖다 놓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어머, 교수님!”
응급 코디네이터가 아는 체를 하며 달려왔다. 오래간만에 보는 아는 얼굴인지라 양승원도 달갑게 인사했다.
“정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저야 맨날 정신없죠. 미국 가셨다는 이야긴 들었는데 언제 들어오셨어요?”
간호사의 말에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4년간의 실종이 대외적으론 어머니가 계신 미국에 있었다는 설정이었다.
대강 얼버무리면서 인사치레를 한 그가 손에 든 쇼핑백을 슬쩍 들었다.
“최형진 교수가 옷을 놓고 가서요. 지금 수술 들어갔죠?”
“아, 네! 좀 전에 외상환자가 들어와서요. 출혈이 심해서 교수님이 직접 들어가셨어요. 그거 저 주세요. 나오시면 전해 드릴게요.”
그녀가 턱짓으로 가리킨 자리엔 핏자국만 남은 바닥이 보였다. 양승원이 그곳에 시선을 두자 간호사는 어깨를 추켜올렸다.
“배우인가 봐요. 옷차림이 촬영하다가 다친 것 같던데…. 병원 안에서 쓰러져 있었대요. 데리고 온 사람도 없고, 엄청 이상하죠.”
“병원 안에서요?”
“네. 감염내과 펠로우 쌤이 발견하셨대요. 당직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던데요? 신분증도 없고 보호자도 없어서 일단 무명남으로 등록했어요.”
일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양승원은 두방망이질하는 심장 박동을 억누르고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수, 수술실이 몇 번 방이에요?”
대답을 듣자마자 그가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간호사에게 전달하려던 쇼핑백은 여전히 손에 들린 채였다.
‘수술 중’이라는 불이 들어온 전등만 보고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을 때, 자동문이 열리면서 최 교수가 걸어 나왔다. 그를 본 양승원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형진아!”
“네가 왜 여깄어?”
눈을 동그랗게 뜨던 최 교수가 제 짐을 들고 있는 양승원을 보고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아이고, 내 옷. 이걸 깜빡했네.”
“왜 벌써 나와? 환자는?”
“블리딩(출혈) 잡으니까 혈압 금방 올라와서 맡기고 나왔지.”
“환자 상태는? 그 사람 어떻게 생겼어?”
“수혈 들어가니까 생각보다 괜찮던데? 상처가 커서 걱정했는데 예후는 좋아. 왜, 아는 사람이야?”
성마르게 묻는 그에게 최 교수가 마스크를 벗으며 되물었다.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하는 양승원의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추측이 맞다면 아마도 레비탄에서 누군가 다친 채로 귀환석을 사용했을 것이다.
누구지? 누굴까. 혼란스럽게 서 있는 양승원을 보고 최 교수가 설명을 덧붙였다.
“등에 칼자국이 엄청 길게 났더라고. 급해서 CT도 못 찍고 들어갔는데, C-ARM(이동식 엑스레이)으로 보니까 괜찮은 거 같아. 누군데? 너 연예인도 아냐? 엄청 잘생겼던데.”
양승원은 일단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말에 한숨을 돌리고는 뒷말을 찬찬히 곱씹었다.
“환자가…… 잘생겼어?”
“눈 감고 있는데도 잘생겼더라. 키도 커서 베드 밖으로 발이 튀어나와. 아, 그래. 양 교수 아는 사람이면 보호자한테 연락 좀 해 줘. 소지품도 챙기고. 촬영 소품인지 뭔지는 몰라도 귀중품도 있는 것 같던데.”
제 물건을 챙겨서 멀어지는 최 교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키가 크고 잘생겼다는 말에 단박에 떠오른 사람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그쪽 사람이 이쪽으로 넘어올 수도 있는 건가……?”
중얼거리며 돌아본 수술실에선 여전히 밝은 불이 유리창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양승원은 간호사가 보관 중이던 소지품 바구니를 받아 보고는 곧장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오 마이 갓.’
고동색 가죽 부츠 위엔 익숙한 모양의 금팔찌와 귀걸이가 지퍼백 안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수술은 예상보다 더 일찍 마무리되었다.
복부와 등을 전체적으로 감싸는 보호대를 차고 실려 나온 사람은 양승원이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돌겠네…….”
“보호자분 되세요?”
집도의가 즉각 양승원에게 말을 걸었다. 낯선 얼굴인 걸 보니 다른 곳에 있다가 온 의사인 듯싶었다.
망연히 고갤 끄덕이는 양승원에게 의사가 담담히 수술 결과를 통보했다. 자상 부위에 봉합수술이 이루어졌고 컨디션도 안정적이라는 이야길 들으며 그는 복잡한 심경을 애써 갈무리했다.
“중환자실에 며칠 계시다가 경과가 괜찮으면 일반 병동으로 가실 수 있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저기, 환자분 신원 등록 먼저 부탁드릴게요!”
불쑥 끼어든 간호사의 목소리에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텅 빈 복도에 홀로 남은 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직면한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는 엄지로 연락처 스크롤을 슥슥 내리다가 특정 이름을 발견하고는 곧장 통화버튼을 눌렀다. 짧은 연결음 끝에 칼 같은 응답이 돌아왔다.
- 아이고! 양 교수님!
“아, 기조실장님. 다른 게 아니라…….”
레비탄 제국의 황자에게 21세기 대한민국의 신원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그는 자신이 돌아왔을 때 주변 상황을 정리해 주었던 인물에게 재차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아. 이름이요? 음……. ‘이안’으로 해 주세요. 네. 안. 외자요.”
야닉이 종종 요새를 벗어나 잠행을 나갈 때 사용했던 가명이 번뜩 떠올랐다. 일단 서류는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제 은인이라…. 예.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병동은 1인실로 하고요. 네, 네. 감사합니다.”
양승원은 통화를 마치고 잠깐 고민에 잠겨 있다가 메신저 앱을 켰다.
스무 명가량이 참여 중인 단체 대화방에 이 기가 막힌 소식을 전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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