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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이란 말은 야닉 리버스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고귀한 존재였고 만인이 떠받드는 위치에서 자라났다. 어머니는 남국의 왕녀고 아버지가 제국의 황제였으니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모자람이 없으니 욕심낼 것이 없었고, 골치 아픈 정재계 문제는 제 몫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제위에 대한 열망이 없다 보니 어쭙잖게 달라붙던 세력들도 알아서 떨어져 나갔다.
충성스러운 심복이자 오랜 친우를 잃은 상실감은 곧바로 커다란 힘을 얻은 것으로 메워졌다. 비상한 두뇌와 방대한 힘은 북방의 변경백을 만나 날개를 펼쳤다.
게다가 아무런 이해 관계 없이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기까지 했다.
야닉 리버스의 삶에 결핍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었다. 이제까지는 말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낯선 소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텅 빈 관악기를 부는 것 같은 바람 소리와 난생처음 듣는 짧은 음이 번갈아 가면서 울렸다.
저세상에선 이런 소리가 나는 건가, 생각이 짧게 스치는 도중에 말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아는 목소리였다.
“어! 방금 움찔했다!”
“…….”
“황자님! 정신이 드세요?”
한층 더 선명해진 부름에 야닉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의사! 의사 불러! 아니, 간호사 쌤인가?”
“양 선생님 계시잖아요?”
“진정들 하시고, 일단 호출 벨이요.”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사이 여러 사람이 소란스럽게 왔다 갔다 하더니 다시 고요해진다. 조금 뒤에는 원래 세계로 돌아갔던 이방인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황자님이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예요?”
황당한 표정으로 묻는 양승원을 보고 야닉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을 반추했다.
이한율에게 기습을 당해 쓰러진 후 제인의 우는 얼굴을 보았다. 아내는 하얗게 질린 낯으로 덜덜 떨다가 귀환석을 사용했다.
그녀가 돌아갈 줄 알았는데, 우습게도 저를 보냈다. 날 보내면 마력 문제는 어떻게 하려고. 바보같이.
돌아갔던 이방인들이 모조리 죽은 게 아니라면 여기는 사후세계가 아닐 것이다. 의식이 또렷해지자 비로소 명확해졌다.
‘그런가……. 나는 지금 제인의 세상으로 온 건가.’
살아난 것에 대해 기뻐해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세계로 온 것에 대해 슬퍼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비스듬히 세워진 폭이 좁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왼쪽 팔에는 주삿바늘이, 검지에는 집게 같은 것이 매달려 있다.
아까부터 가슴이 답답하다 싶더니 상체가 단단한 무언가에 꽁꽁 매여 있는 것 같았다. 야닉은 제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양승원, 김유정, 최지웅…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이방인들 열댓 명이 침대를 빙 둘러싼 채로 서 있었다. 한 사람씩 둘러보는 와중에 눈을 마주친 몇몇 사람이 그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 황자님 눈이…….”
다급하게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든 김유정이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곧 납작하고 네모난 것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제 모습이 비치는 걸 보니 아마도 거울인 것 같았다.
야닉은 손바닥만 한 거울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까만 눈을 들여다보았다.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릴 적 눈동자와 같은 색이었다.
“…….”
“눈동자 색이 바뀌었네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김유정에게 그는 아무런 대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반신의 후손이라면 당연하게 가지는 금안이 사라진 이유를 자신이 알 턱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몸 상태 또한 낯설기 그지없었다. 요동치던 마력이 조금 전부터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힘을 많이 써서 고갈된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전신에 퍼져 있어야 할 마나가 무언가에 의해 꽉 막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천천히 손바닥을 들어 마력을 흘려보내려던 그가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야닉을 가만히 지켜보던 양승원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현 상황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쪽에서 치료를 못 받아서 이리로 넘어오신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잘하셨어요. 정말 위험했거든요. 심정지 직전까지 갔어요.”
넘어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죽었겠지. 위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수술은 잘 끝났어요. 척추나 신경도 이상 없고 감염 징후도 없고요. 봉합 부위만 잘 아물면 금방 퇴원도 가능하실 겁니다.”
“…퇴원을 하면 어디로 가지.”
입 밖으로 내뱉은 첫마디에 이방인들이 단박에 사색이 되었다. 김유정이 경악 어린 목소리로 빽 소리를 질렀다.
“설마 혼자 오셨어요?”
* * *
날이 어두워졌다. 누군가가 벽에 달린 것을 누르니 달칵, 소리가 나면서 공간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야닉은 천장에 매달린 빛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꼭 보름달을 가져다가 박아 놓은 것만 같다.
김유정이 코앞에 들이밀었던 네모난 것은 알고 보니 거울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기능이 있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그림처럼 만들어 보관도 가능했으며, 멀리 떨어진 사람과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마법보다도 훨씬 더 놀랍고 경이로운 물건으로 김유정이 누군가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언제 오실 수 있으신데요? 네? 당연히 와 보셔야죠!”
언성이 높아지는 거로 봐선 언뜻 싸우는 것 같기도 했다. 눈치껏 김유정을 밖으로 내보낸 지웅이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상아는 지금 지방 어머님 댁에 가 있어서 내일 오기로 했어요. 아직 임신 초기라 일단 저 먼저 올라온 거고요.”
“무리하지 않아도 돼. 굳이 나 때문에 부를 필요는 없어.”
“저도 말렸는데요. 황자님이 여기 있는 게 궁금하다고 꼭 직접 보고 싶다고 하네요.”
그 말에 야닉이 조금 웃었다. 하긴, 내 꼴이 이곳과는 딱히 어울리진 않지.
같은 글자가 반복적으로 새겨진 옷이 아무리 봐도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상의는 소매가 짧고, 하의는 길이가 짧아 발목이 다 드러난다.
아는 얼굴을 제외하고도 이곳 현지인 가운데 머리가 긴 남성은 한 명도 없었다. 하얀 피부와 짧은 머리, 크지 않은 신장들 사이에선 그들이 아니라 자신이 이방인이었다.
내가 이방인이라니, 생경한 감정이 피부에 와 닿았다.
멀리 있는 상대와 대화를 마친 김유정이 씩씩거리면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찰나의 순간 김유정과 함께 들어온 서늘한 공기에 우습게도 춥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차장님이요. 이것저것 막 물어보더니 자기는 당분간 바빠서 못 온다는 거예요. X 어이없어, 진짜.”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으니 아직 정신이 없나 보죠. 갓난아기도 있으시다면서요.”
박 차장을 잘 모르는 지웅이 좋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김유정은 되레 코웃음을 터뜨렸다.
“회사도 다 같이 잘렸는데 바쁘긴 개뿔이요. 단체 실종 기사 나가고 공개 수사했던 것도 지난주에 마무리됐는데 그냥 귀찮은 거죠.”
지웅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알만 도르륵 굴렸다. 김유정은 아직도 분통이 터진다는 듯이 이를 박박 갈아 댔다.
“거기서 가져온 금화도 금은방 가져가니까 엄청 비싸게 부르던데, 양심이 있으면 와서 들여다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진짜요? 얼마래요?”
“일단 제가 가져온 것만 해도 1억 조금 안 돼요. 오래 있었던 분들은 훨씬 더 많이 가져오셨겠죠? 몇 달만 더 버티다 올 걸 그랬나 봐요.”
“떠날 때 좀 더 넉넉히 챙겨 줄 걸 그랬군.”
잠잠히 듣고 있던 야닉이 설핏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너무 대놓고 돈 이야길 했나 싶어 두 사람이 꾹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공 대리는 잘 지내나? 아까는 안 보이던데.”
“아. 그건 저 때문입니다.”
손바닥을 들고 김유정이 순순히 자백했다.
“헤어졌거든요. 오자마자 각자 흩어진 다음부터 한 번도 연락 안 했어요.”
“그렇군.”
야닉은 짧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들의 이별 사유가 딱히 궁금한 건 아니었다.
조금 뒤 양승원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옷걸이에 걸어 둔 겉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 면회 시간 끝났습니다. 황자님도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내일이나 모레 다시들 오시죠.”
아쉬운 얼굴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은 사람들이 인사를 하고는 하나둘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양승원이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 조용히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저기……. 황자님 소지품에 귀환석은 없었어요. 말인즉슨, 누군가가 이쪽으로 데리러 올 때까진 꼼짝없이 여기서 지내야 한다는 뜻이고요.”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들의 신변을 책임지고 보호하는 입장은 늘 나였는데.’
정반대의 상황에 직면하니 새삼 이들이 얼마나 두렵고 막막했었을지 온몸으로 체감이 된다.
야닉은 이 순간 두렵고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제국이 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깨우침도 함께였다.
어쩌면 너도 똑같이 당해 보라는 벌을 받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편이 설득력 있었다.
포라킨이 쓰러지고 알리온이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멍청하게 등을 내보였다. 그전에도 역시 이한율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죽이지 않았다.
놈 앞에서 제인이 내 여자라는 걸 과시하고 싶었으니까. 진정한 힘 앞에 본인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유치한 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방만하게 행동한 결과가 결국엔 이 꼴이다.
“하.”
야닉은 고개를 떨구고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다른 이였으면 죽어도 싸다고 한심하게 여겼을 짓을 본인이 저지른 꼴이 그저 우스웠다.
“황자님이 일반인도 아니고……. 다른 분들이 조만간 모시러 올 거예요. 너무 상심은 마시고요. 일단은 부상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하는 걸로 하죠. 그러려고 오신 거니까요.”
양승원이 참담함을 이해한다는 듯이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문득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 이방인들이 양승원에 대해 떠들던 것이 생각났다. 알고 보니 커다란 병원을 몇 개나 소유하고 있는 집안의 자제라고 했던가.
이곳에서 모자람 없는 생활을 영위하던 양승원은 자신을 제 처지와 비슷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윽.”
야닉이 허리를 펴다가 등줄기를 파고드는 통증에 낮게 신음했다. 양승원이 재빨리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통제 좀 놔 드릴게요.”
“……부탁 좀 하지.”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던 양승원이 불현듯 몸을 돌려세웠다. 물끄러미 야닉을 위아래로 훑던 그가 고민 끝에 운을 띄웠다.
“황자님. 퇴원하기 전에… 그, 괜찮으시면 머리를 좀 자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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