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45화 (14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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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한국에서 젊은 남자가 머리카락이 길면 아무래도 주목을 받거든요.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타입이시라 불편하실 수도 있어요.”

그제야 옆으로 곱게 묶어 내린 뒷머리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일이 마무리되면 작정하고 옆머리도 기르려고 했던 야닉이 제법 심각해졌다.

요새에 남은 귀환석이라고는 이제 세레나의 예전 규방에 보관 중인 하나가 끝이다.

부하들이 페어리의 동굴로 찾아가 여분을 받아 오는 데 얼마나 걸릴지 선뜻 예측할 수 없었다. 운이 나쁘면 얻지 못할 가능성도 있고.

실패한다면 하나 남은 귀환석으로 제인이 이곳으로 건너와 함께 여생을 보내야 한다. 그의 가설에 제인이 오지 않을 거란 전제는 깔려 있지 않았다.

제인이 온다면 그때는 정반대의 처지가 되겠지만, 야닉은 무기력하게 아내에게 기대어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지 멀쩡한 가장으로서 그건 상상 속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짓이다.

일단은 아내가 나고 자란 곳의 문화를 익히는 것이 먼저였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야닉이 선뜻 제안을 수락했다.

“좋아. 자르지. 그대가 하자는 건 앞으로 뭐든 다 따를 생각이야.”

“어……. 그러면 한 가지 더.”

예상외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야닉을 보고 양승원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이마를 긁적였다.

“이번 기회에 그럼 말투도 한번 바꿔 볼까요?”

* * *

양승원이 돌아간 후 얼마 안 있어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여자 두 명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환자분 진통제 놔 드릴게요.”

상냥하게 말한 여자가 팔과 연결된 투명한 팩에 주사기를 꽂아 넣었다. 그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여자가 웃으며 돌아본다.

“다른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가요?”

레비탄에 온 적이 없는 현지인의 말 역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야닉에게 전달되었다.

소환진을 축소한 모양의 귀환석에도 언어이해에 대한 마법이 걸려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이었다.

야닉은 조금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병동 사제와 비슷한 직업으로 보이는 여자의 뺨이 공연히 발그레해졌다.

그가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퇴원은 언제쯤 할 수 있…습니까.”

하대하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던 양승원의 말대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정중하기로 마음을 먹은 참이다.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답변을 내놓았다.

“정확한 건 주치의 선생님께서 판단하시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 이상은 계셔야 해요. 상처가 꽤 깊었거든요. 매일 드레싱 하면서 상태도 체크해야 하고요.”

“그렇군요.”

“주무시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침대 머리 쪽에 버튼 눌러 주세요.”

“그럴게요. 고마워요.”

별 뜻 없는 인사에 여자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더니 함께 들어왔던 동료의 등을 찰싹찰싹 때리면서 빠르게 사라졌다.

야닉은 침대에 비스듬히 몸을 뉘고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창문 안으로 들어온 빛은 달빛보다도 훨씬 더 밝아서 실내가 흐릿하게 비쳤다.

손가락에 주렁주렁 매달린 기이한 물건에선 끊임없이 삐익삐익 하는 소리가 들렸고, 협탁 위에 놓인 정체불명의 물건에선 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벽 앞에 놓인 하얗고 길쭉한 상자는 어스름 속에서 보아하니 언뜻 마물처럼도 보였다. 괴물의 눈동자 같은 빨간빛이 내내 저를 지켜보는 것 같다.

천장에 뚫린 구멍에선 뜨거운 바람까지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들이 소란스럽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제인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그곳도 지금은 밤이려나.

아내의 성격상 모든 걸 자기 탓이라고 자책하고 있을 게 뻔했다. 방심한 건 저인데, 아내는 분명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을 것이다.

너무 많이 울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하얀 얼굴.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던 작은 손.

마지막 기억으로 남은 그녀의 모습은 온통 괴로움이었다. 다친 곳은 등인데 통증은 가슴에서 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약 기운에 취해 잠이 들었던 야닉은 이튿날 침대 위에서 낯선 이들을 마주했다. 양승원이 아크만에서 입었던 것과 같은 모양의 흰 가운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단체로 몰려온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매를 길게 끌어올리고는 앞다투어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들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감염내과 서명훈입니다. 저희 과 펠로우가 이안 님을 최초로 발견해서 응급실로 모셨다더군요.”

“신경외과 전문의인 제가 뇌도 꼭 찍어봐야 한다고 해서 정밀검사까지 전부 마쳤습니다. 외상환자를 대하는 기본이 바로 ‘탑투토’(Top To Toe)아니겠습니까? 하하.”

“엑스레이를 보니까 뼈도 참 잘생기셨더라고요. 정형외과 25년 근무 중에 크! 이런 완벽한 대칭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인을 주치의라고 소개한 의사가 자신의 현 상태에 대해 상세히,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야닉은 적당히 경청하는 척을 하다가 싱긋 웃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이쿠! 독일 교포시라고 들었는데, 한국말도 아주 유창하시네요!”

교포시…? 작게 중얼거린 야닉이 다시 한번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양승원은 언제 오려나 생각하며 문만 바라보는데, 남자들이 쉴 새 없이 앞에서 재잘거렸다.

“이사장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 달라고 하셔서 저희가 참 의아했거든요. 생전 그런 말씀은 안 하시던 분이었는데 오늘 뵈니까 딱! 알 것 같더라고요.”

“독일에서 유명한 배우시라면서요? 제가 독일 배우는 마이클 패스젠더 밖에 몰라서 이거 참 부끄럽습니다.”

“그게 누구였죠?”

“아이, 왜 있잖아요. 엑스와이맨에서 철분 조종하시는 분이요.”

아아, 하면서 크게 손뼉을 치는 사람들 뒤로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어어! 양 교수 왔어요?”

벌써 원내에 소문이 퍼졌구나. 관자놀이를 긁으며 들어선 양승원 주위로 의사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야닉은 어느새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양승원과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던 독일 출신의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권력자에게 빌어먹는 유형은 어딜 가나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양승원의 근황에서부터 시작된 대화는 부친인 재단 이사장의 안부까지 한참이나 이어졌다.

귀족과 평민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라고 들었지만, 이곳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복귀했다가 1년만 채우고 나가서 개원해야지, 이거 원 정신 사나워 안 되겠어요.”

한차례 폭풍이 몰아친 후 너덜너덜해진 양승원이 손수건으로 이마를 연신 찍어 눌렀다.

남자들이 전부 나간 것을 확인한 야닉은 내내 짓고 있던 형식적인 미소를 싹 지워 냈다.

“그대도 고생이 많았겠… 아니지. 선생님도 고생이 많으셨겠군요.”

“음. 40점입니다.”

“몇 점이 만점이지?”

“100점이요.”

만점이 아니라는 말에 왜? 하는 얼굴로 쳐다보자 양승원이 대수롭지 않게 비수를 날렸다.

“아직 말투가 좀 느끼해서요. 시간이 날 때마다 티비를 보시는 게 좋겠어요.”

그가 협탁 위에 놓여 있던 기다란 것을 집어 들고는 동그란 것을 눌렀다. 그러자 벽에 매달린 검은 상자에서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바닷속을 헤엄치는 괴생명체가 불쑥 튀어나왔다.

흉측한 생김새로 꿀렁거리는 것은 상자 속에 갇혀서 평화롭게 유영 중이었으나, 야닉은 반대로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웬만한 거로는 놀라는 성격이 아닌데도 이것만큼은 도저히 의연할 수가 없었다. 습관적으로 허리춤에서 검을 찾던 손이 허공에서 길을 잃고 허우적거렸다.

온 신경을 곤두세운 자신과는 달리 태연자약한 양승원을 본 후에야 몸에서 긴장감이 빠져나갔다. 막막함이 그 자리에 대신 밀려들었다.

야닉은 일순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에 맨몸으로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느낀 감정이었다.

이 작은 공간조차도 온통 모르는 것투성인데, 이보다도 훨씬 더 크고 넓은 바깥에서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레비탄에 왔던 이방인들은 처음엔 버벅거리긴 해도 생김새나 이름을 들으면 어떤 물건인지 정도는 수월하게 알아차렸다. 게다가 더 좋은 물건으로 만들어 내는 재주까지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어떠한가. 더 좋은 것을 만들어 내기는커녕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것들이 산더미다. 심지어는 이름을 들어도 무슨 용도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이방인들의 세상은 마법보다도 더욱 놀라운 것들이 여기저기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까마득한 무력함에 잠식당할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기묘한 흥분이 솟아올랐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과 함께 새로운 세계로 발을 들였다는 모험심이 나란히 찾아온 것이다.

불안과 고양감이 뒤섞여 요란하게 심장을 두들겨 댔다.

설명도 하지 않고 갑자기 틀어서 충격이 컸던 걸까, 양승원이 다급하게 리모컨을 치켜들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려던 그에게 야닉이 조용히 손을 들어 말렸다.

“그냥 둬. 괜찮아.”

“이제부터 하나씩 알아 가면 됩니다. 황자님이라면 충분히 적응하실 수 있어요.”

가만히 지켜보던 양승원이 차분한 음성으로 그를 다독였다.

마른세수를 하며 감정을 추스른 야닉이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다음에야 아까부터 등이 계속 아팠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젠장…….”

몸이고 마음이고 뭐 하나 멀쩡한 게 없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어느 쪽으로든 결론은 오직 하나였다.

“저건 티비. 이건 리모컨입니다.”

감성보단 이성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같은 판단을 한 양승원이 리모컨을 건네주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습기, 공기청정기, 히터와 에어컨. 병실 안에 있는 가전기기의 종류와 쓰임새를 알려 준 다음에는 대리점에서 사 온 최신형 스마트폰을 꺼냈다.

“현대인의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고 보니 황자님, 한글도 배우셨죠?”

아크만에서 배워 둔 덕에 뜻은 몰라도 읽은 순 있었다. 더군다나 귀환석을 써서 언어이해 마법이 적용된 다음부턴 한글이 모국어처럼 눈에 들어왔다.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한번 까딱하자 양승원이 안도의 한숨 뒤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다행입니다. 외국인들 다니는 한글학교라도 보내 드려야 하나 걱정했거든요.”

“세 살짜리 어린애가 된 것 같군.”

“세 살 무시하지 마세요. 아직 그 수준도 안 됩니다.”

“…….”

[어제 오후 강남 테헤란로 일대의 음식점에서 무전취식 후 도주하던 남성이 음식점 주인에게 주먹을 휘둘러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이 남성은 본인이 마법사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이어 나가고 있는 것으로….]

고요해진 병실 안에는 티비 속 뉴스 소리만 잔잔히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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