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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만 가득한 화면에서 관심을 거둔 두 남자는 재차 수업을 이어 갔다.
스마트폰의 간단한 작동법을 배우고 지문 등록까지 마치고 나니 연락처 부분에 낯익은 이름들이 보였다. 양승원이 저장해 둔 이방인들의 전화번호는 메신저 앱에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이번엔 자신에게 일대일 대화를 걸어 보라는 임무를 받고 야닉이 길고 곧은 손가락을 뜨문뜨문 움직였다.
나 : 안ㄴ녕하새요
중간에 불필요하게 들어간 자음은 지우고 다시 쓰는 것이 귀찮아서 그대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띠링. 양승원의 스마트폰에서 알람이 울리고 채팅을 확인한 그가 야닉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빠른 속도로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양승원 : ‘새’가 아니라 ‘세’입니다. 제가 재밌는 사실을 한 가지 알려 드릴까요?
“뭐지?”
육성으로 대꾸하자 양승원이 단호하게 고갤 젓고는 턱짓으로 기계를 가리켰다.
마주 보고 앉아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아니고, 남자 둘이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야닉은 화면을 대충 두드렸다.
간단하게 물음표 하나만 날아온 것을 보고 양승원이 뿌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언어 마법은 돌아와서도 적용이 되더라고요. 억양만 다를 뿐이지, 전 세계의 모든 언어가 전부 우리말로 들려요.”
“그래? 잘됐네.”
그다지 재밌는 사실은 아니었기에 시큰둥했으나 양승원의 목소리는 좀 더 고양되었다.
“본업 경력이 단절되었어도 어쨌든 먹고살 방도가 생긴 거죠. 소환당한 건 우리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론 큰 이득을 본 셈이고요. 살면서 이런 경험을 언제 또 해 보겠어요.”
양승원은 레비탄에서 보낸 시간을 외국에서 유학이라도 한 것처럼 귀중한 자산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살다가 겪어 본 신기한 일일지는 몰라도 야닉은 모두가 양승원 같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왔다는 소식이 알려졌음에도 끝끝내 모른 척하거나 대놓고 피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들에겐 지난 시간은 귀중한 경험이 아니라, 그저 피랍이었는지도 모른다. 충분히 고통이었을 것이다. 지울 수 없는 상처거나.
‘괜히 나를 만났다가 다시 끌려가는 건 아닌지 두려울 수도 있을 테고.’
이렇게 환영받고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어디든 존재하는 소수를 제외한 이방인 대다수는 정도 많고 챙겨 주는 것을 몹시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짧은 노크 뒤로 새로운 얼굴들이 무언가를 잔뜩 들고 와서는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야닉은 반가운 얼굴로 이들을 맞이했다.
* * *
11월의 끝자락에 야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의료진은 경이로울 만큼 빠른 회복 속도라고 추켜세웠지만, 오기 직전 받았던 치유마법의 효과가 어느 정도는 작용했을 것이다. 사정을 알 리 없는 아첨꾼들만 또 한차례 몰려와 세 치 혀를 놀려 댔다.
이 정도면 통원 치료를 해도 되겠다는 주치의의 소견에 따라 야닉은 본격적인 퇴원 준비에 들어갔다.
병실 안에는 병문안을 왔던 객들이 가져온 생활용품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짐 싣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모인 사람들 가운데엔 공 대리의 모습도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안 오려고 했거든요? 구여친 마주칠까 봐. 근데 그건 또 의리가 아니니까.”
“구여친?”
붕대로 칭칭 감은 몸 위에 셔츠를 입고 단추를 하나씩 채우던 야닉이 생소한 단어에 고갤 들었다.
‘티비’라는 것을 보면서 모르는 표현이나 단어들을 검색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는데도 새로운 말들은 봇물 터지듯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옛날 여자친구요. 그러니까 과거의 연인?”
“아.”
김유정을 말하는 거로군. 속으로만 생각하는데 공 대리가 머뭇거리다가 슬쩍 운을 띄웠다.
“근데 진짜로 한 주임… 아니, 재인 누나 집으로 들어가시게요? 양 선생님 아파트로 안 가고?”
“그래. 아내가 지내던 곳이 멀쩡히 있는데 다른 곳으로 갈 이유가 없지.”
야닉은 질문에 여상히 대꾸했다.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양승원이 혼자 사는 아파트가 있고 권유를 받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굳이 거기까지 신세를 지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제인이 살았던 곳을 꼭 가 보고 싶었고.
“박 차장님이 가족 여행을 가서 아직 그 집을 처분 안 한 건 다행이긴 한데, 거기 월세 아니었나? 반년 넘게 세가 안 들어왔을 텐데, 집주인이 가만히 있었대요?”
“알아보니까 집주인도 외국에 나가 있어서 모르고 있었더라고요. 그래서 번호 바꿨다고 문자 하고 일시금으로 지급했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양승원이 대신 대답하니 공 대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보증금에서 안 까고 선생님이 냈다고요?”
“얼마 안 하는데 뭐 하러 그래요.”
양승원은 정말로 얼마 안 하더라는 얼굴로 산뜻하게 웃고 있었다. 공 대리는 갑자기 배알이 꼴리는 기분이 들었다.
“어우. 양 쌤이 아크만에서 금화 좀 챙겨 오셨나 보네. 요즘 다들 난리던데. 일찌감치 팔아서 외제 차 산 사람도 있대요.”
“그대는 얼마나 가지고 왔는데?”
야닉이 소매의 단추까지 말끔히 잠그곤 가볍게 물었다. 그러자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진 공 대리가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주머니에 있던 두 개…? 나머진 깜빡하고 방에…….”
공 대리는 김유정에게 금화 좀 나누어 달라고 했다가 단칼에 차였다는 후일담까지 음울하게 덧붙였다.
침통한 결과에 다소 어색한 침묵이 공간을 맴돌았다.
큼큼, 헛기침을 하던 양승원은 서둘러 집에서 가져온 긴 코트를 야닉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자신의 신장을 망각한 채 사들였던 카멜 캐시미어 코트는 딱 한 번 입어 보고 그대로 옷장 깊숙이 잠들어 있던 것이었다.
그대로 화석이 될 뻔한 옷은 189.6cm의 훤칠한 미남에게 가서 만개한 꽃처럼 자태를 빛냈다. 양승원은 런웨이에 선 모델을 지켜보는 브랜드 디자이너처럼 한껏 만족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단골이었던 논현동 헤어숍에서 디자이너를 불러 머리를 다듬고 마스크에 목도리까지 두른 야닉은 얼굴을 가리면 가릴수록 더 그럴싸해 보였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뒤따르는 사람들 덕에 오해를 부추기는 것도 같았다.
원래도 대중의 시선이 익숙했던 야닉은 별다른 어색함 없이 병실을 나와 복도에서 마주친 의료진들에게 빠짐없이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누가 그랬던가, 결코 숨길 수 없다는 세 가지 중 하나가 바로 기침이었다.
공기청정기가 없는 곳에서 기어이 터진 기침은 병원 밖으로 나가는 순간 더욱더 잦아졌다.
야닉은 마스크를 하고 있음에도 미간을 잔뜩 좁히며 잔기침을 토해 냈다. 불쾌하고 답답한 공기가 폐에 한가득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길 반복하고 있었다.
광야를 달릴 때 이는 모래 먼지와는 다른 종류의 냄새가 연신 코를 찌르고 눈을 따갑게 했다. 말없이도 혼자서 굴러가는 마차(자동차라고 하던 것)를 구경할 새도 없이 그는 준비된 차량 뒷좌석에 황급히 몸을 실었다.
은색의 중형 SUV는 매끄럽게 병원을 빠져나갔다. 시내를 달리던 차가 8차선 도로로 진입할 무렵에야 들썩이던 몸이 안정을 되찾았다.
야닉은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도시 풍경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아내의 세상은 그야말로 온통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드라이브도 나가자고요. 구경시켜 드리고 싶은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에요.”
“로테월드! 아니다. 우리 클럽 가요!”
잔뜩 신나서 떠드는 목소리들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못했다.
어떤 군마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질주하는 자동차 안에서 야닉은 홀로 유리되어 다른 공간에 있었다.
티비 속에서 본 거짓말 같은 세상이 눈앞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통에 시야가 어지러웠다. 과도한 정보의 홍수가 머릿속을 헤집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돌연 치미는 구토감에 야닉이 허리를 굽히고 입을 틀어막았다.
“어, 어, 멀미하시나 보다! 봉투! 봉투 좀!”
“조금만 참으세요! 거의 다 왔어요!”
급격하게 속도를 줄이고 히터를 끈 양승원이 창문을 살짝 내렸다.
야닉은 밭은 숨을 연거푸 내쉬며 찬 바람에 호흡을 섞었다. 속은 뒤집히고 식은땀이 흐르는 와중에도 몸은 착실하게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피부에 닿는 차가운 공기에 무기력하게 휘둘리는 것이 얼마 만이던가. 춥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것 같다.
그가 기억하는 겨울보다 강렬한 한기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맹렬한 추위에 들끓던 뱃속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할 무렵, 골목으로 들어선 차는 10층짜리 오피스텔 건물 앞에서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지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금색 테두리가 둘린 공동 현관문 앞에서 양승원이 비밀번호를 눌렀다.
“황자님 오신다고 해서 여자분들이 한번 왔다 갔어요. 물건은 하나도 안 건드리고 청소만 간단히 하고 왔대요.”
야닉은 길쭉하고 매끄러운 건물 외벽을 올려다보다가 위잉 하는 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유리로 된 문이 혼자서 옆으로 움직였다.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엘리베이터에 올라 6층 버튼을 눌렀다.
또다시 저절로 문이 열리고 야닉은 조금 경직된 발을 내디뎠다. 제인이 아침저녁으로 지나다녔을 복도를, 그가 되짚어 나가듯 찬찬히 걸었다.
눈에 닿는 모든 것이 그녀가 매일같이 오가면서 보았을 것들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순간적으로 가슴이 꽉 죄었다.
“603호…. 아, 여기네요. 도어락 번호가 뭐더라.”
“603210.”
야닉의 입에서 즉각 튀어나온 답변에 양승원이 하나씩 번호를 눌렀다. 삐리릭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안으로 하얀 운동화가 들어섰다.
“전기랑 가스도 전부 살렸어요. 풀옵션이라 다른 건 필요 없으실 거고…. 일단은 냉장고부터 채울….”
“…….”
“어! 신발! 신발 벗고!”
짐을 내려놓던 일행들이 안으로 걸어 들어가던 야닉을 붙잡았다. 잠시 넋을 잃고 있던 그가 이방인들의 성화에 운동화를 벗었다.
홀로 시간이 멈춘 듯 서 있는 야닉의 주위를 사람들이 부단히 지나다녔다. 생수와 주스가 냉장고 안에 들어가고 싱크대 수납장에 즉석식품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병원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이 각각 제자리를 찾아갈 때까지 야닉은 얼어붙은 듯이 가만히 서서 집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테이블 위에 죽 있으니까 저녁에 데워서 드시고 푹 쉬세요.”
“어? 벌써요? 우리 짜장면 시켜 먹기로…….”
눈치 없이 짜장면 타령이나 하는 공 대리는 사람들이 알아서 끌고 나갔다.
달칵, 삐리릭.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잠금장치가 잠기는 소리가 들린 다음엔 사위가 온통 고요했다.
야닉은 혼자 남겨진 다음에야 참담한 심경을 겉으로 드러냈다.
“하…….”
이런 곳에서. 제인이. 몇 년이나 살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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